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5월10일] 펑전 숙청, 문화대혁명 발동

베이징大 차이위안페이 총장 사임, 베트남 소련에 캄란만 해군기지 허용, 나치 독일 네덜란드 등 침공과 처칠 영국 총리 취임, 5·10 제헌국회 선거 실시. 원충연 대령 등 군 일부 쿠데타 모의 적발

1966년 5월10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펑전(彭眞) 베이징(北京) 시장, 루딩이(陸定一) 당중앙 선전부장, 뤄루이칭(羅瑞卿) 총참모장, 그리고 양상쿤(楊尙昆) 전 중앙판공청 주임이 일체의 공직에서 해임되고 비판받았다.

정치국 확대회의는 5월4일 개막되었는데 해임 조치 6일 뒤인 5월16일에는 문화대혁명의 지침 구실을 한 마오쩌둥(毛澤東)의 ‘5 · 16 통지'를 채택하였다.

1965년 11월10일 상하이(上海)시 당위원회 기관지 해방일보 편집위원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상하이 문회보에 베이징시 부시장 우한(吳)이 1960년 발표한 역사극‘신편 해서파관(海瑞罷官)’을 “사회주의를 비판한 독초”라고 공격한 지 6개월 만에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앞서 해방일보는 4월18일자 사설에서 야오원위안의 비판 이후 전개된 일련의 과정을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으로 처음 공식 규정했다.

5월10일에 모든 직책을 박탈 당한 펑전과 루딩이는 야오의 비판이후 문예정풍의 양상으로 전개된 비판운동을 지도하던‘문화혁명 5인 소조’의 구성원이었으며 더군다나 펑전은 최고 책임자인 조장이었다. 5인 소조는 마오와 당중앙의 지시에 의해 1964년 설치됐다.

뤄루이칭은 린뱌오(林彪)의 군부 내 경쟁자로‘적극 방어' 입장에서 군대의 근대화를 주장한 인물이다.

이는‘공세적 포위’의 인민전쟁 방식을 신봉하는 마오쩌둥, 린뱌오 노선과 대립되는 것으로 1959년 마오에게 의견서를 제출했다.

국방부장에서 해임당한 펑더화이(彭德懷)의 노선과 가깝다는 비판을 받았다.

린뱌오의 전략은 국공내전 당시 국부군을 패퇴시킨 농촌을 근거지로 한‘도시 포위 전략’을 글로벌화 한 것이다.

중국을‘세계의 농촌'으로 삼아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결속시켜 '도시'인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을 포위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의 현대화보다는 게릴라전 능력과 사상무장 강화를 중시했다.

1965년 11월 청와대 비서실과 경호실 역할을 겸하는 중앙판공청 주임 직에서 전격 해임되어 광둥성 서기로 정치적 유배를 당한 양상쿤은 판공청 주임 시절 도청기를 설치하거나 기밀문서를 외부인에게 복사해주었다는 기밀누설죄가 숙청 이유였다.

양상쿤은 덩샤오핑(鄧小平)의 동향이자 측근이었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뒤 펑전은 전인대 상무위원장(국회의장)에 양상쿤은 국가주석을 역임하게 된다. 루딩이도 정협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뤄루이칭은 4인방이 숙청된 뒤인 1978년 8월3일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권력 장악은보지 못한 것이다.

이들의 해임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의 피아가 명확하게 구분됐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로써 문화대혁명은 비판자와 비판대상이 혼재된 가운데 주도권을 놓고 권력 및 이론 투쟁을 벌이던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진정한 문화대혁명의 시작을 야오의 비판 논문이 발표된 1965년 11월이 아닌 이때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중국은 현재 문화 대혁명 기간을 1966~1976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1976년은 마오가 죽고 4인방이 체포된 해이다.

문화대혁명은 비주류 3결합에 의해 시작되었고 강고한 이 결합이 탈권을 성취한 뒤 단계적으로 실세하면서 끝이 났다.

비주류 3자는 공산당에서는 마오와 그의 아바타 4인방이고 군에서는 린뱌오였으며 사회에서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홍위병이었다.

류사오치를 우두머리로 한 당권파로부터 탈권한 뒤 가장 먼저 1968년 홍위병 세력이 하방운동을 통해 실세했고 이어 1971년에 군의 린뱌오가 제거됐으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1976년 당에서 마오가 죽은 뒤 그의 아바타인 4인방이 숙청됐다.

펑전의 해임을 비롯한 정치국 확대회의 결과는 6월3일 발표되었는데 대부분 외국 언론은 “문예 비판을 둘러싼 책임 문제에 의한 실각”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가장 반공적임며 극우적 논조 성향을 지닌 산케이(産經) 신문의 시바타 미노루(柴田穗)는 이를‘대권력 투쟁’으로 해석하는 기사를 작성하였으며 산케이는 6월4일자에 이를 해설이 붙여진 1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극좌파의 의도를 이념적으로 가장 먼 곳에 위치한 극우파의 시선이 모두에 앞서 또 가장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시바타는 직후 베이징 지국장으로 부임했지만 1967년‘일관된 반(反)중국 보도’를 이유로 지국이 폐쇄되면서 퇴거 조치됐다. 산케이에 대한 지국 폐쇄는 그후 31년간 계속되었다.

1979년 = 베트남, 소련에 캄란만 사용을 허용하였다.

이해 2월17일부터 3월16일까지 중국의 침공을 받았던 베트남은 소련을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하는‘이강제강(以强制强)’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중국은 이를 소련의 대중 포위망 구축 일환으로 보았고 이후 중소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 중 하나로 캄란만 기지에서 소련군 철수를 주장했다. 또다른 전제 조건은 아프간 철군이었다.

1919년 = 베이징(北京)대학의 차이위안페이(蔡元培)총장이 5 · 4 운동에 따른 학생시위를 해결할 수 없다며 사임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영국 동인도 회사가 고용한 인도인 용병‘세포이’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1857).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침공한 가운데 윈스턴 처칠이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1940).
그 5주년 사흘 전에 독일이 무조건 항복했다.

베트남 평화회담 예비회담이 파리서 개박됐다(1968). 이해 1월 31일 남베트남 공산 게릴라 베트콩이 북베트남의 월맹군 최고지휘관으로 디엔 비엔 푸 함락의 영웅 인 보 응우엔 지압(보 구엔 지압)의 지도 아래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을 비롯 주요 도시에 대한 일제 총공격을 감행하는 이른 바 '테트 공세'를 전개했다. '테트'는 구정, 즉 설날을 말한다.

결국 미국은 북베트남 월맹과 베트콩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렁 출구전략의 한 방식으로 북베트남과 베트콩 대표를 상대로 한 평화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속의 오늘

남한 단독으로 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의원 198명이 선출됐다(1948).

육군 일부 장교의 반정부 쿠데타 음모가 적발되어 원충연(元忠淵) 대령 등 10명이 체포되었다(1965).

원충연은 5.16 주체 세력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 후 설치된 국가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대변인)에 임명되었으나 민정 이양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의 방미 뒤 발표한 귀국 성명에서 민정이양 약속을 이행하겠다는 내용을 담아 주체세력의 반발을 불러 공보실장 직에서 해임됐다.

쿠데타 모의 당시 정훈학교장이던 원충연은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69년 15년형으로 감형됐고 10.26사건 2년 뒤인 1981년 출감했다.

1984년 이후 캐나다에서 거주하며 국내를 오가면서 생활하다 2004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018/05/10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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