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16 17:15



[今天歷史-5월13일] 국민정부 불평등 조약 폐지 선언

안후이성서 초대형 탄광 사고, 일본 식민지 대만 게엄령,베트남 파리 평화회담 개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피격, 일본 사회당 사회주의 노선 포기 선언, 류성룡 타계
1931년 5월 13일 중국 국민정부의 국민회의가 외국과의 불평등조약 폐지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서방의 응답은 12년 뒤인 1943년 1월에 나왔다. 일본의 침략이 중국을넘어 동남아 등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하자 중국에서 그들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를 지킬 수 없게 된 서방은 이의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더 이상 '못 먹을 감'에 대한 생색내기를 통해 동남아 지역에서의 식민주의적 이권을 보호하자는 계산이었다.

[今天歷史-1월11일] 국민정부 영-미와 치외법권 폐지 협정

[書中一滴] “이제 아시아에서 ‘식민지 지배자 삶’은 끝났다”

2003년 5월 13일 오후4시(현지 시간) 중국 안후이(安徽)성 화이베이(淮北)광업집단공사의 루링(蘆嶺) 탄광에서 가스 폭발로 인한 초대형 탄광사고가 발생, 86명이 사망했다.

가스 폭발 당시 갱도에서는 114명이 작업 중이었으나 28명만이 생환했을 뿐이다. 이 사고가 발생한 뒤 중국 공산당 당중앙과 국무원은 빈발하는 탄광 가스 폭발 사고를 중시하고 이를 대비하기 대책 수립에 부심하였다.

하지만 이로부터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2005년 2월 14일 랴오닝(遼寧)성 푸신(阜新)시 쑨자완(孫家彎) 탄광에서 역시 가스 누출에 따른 폭발사고로 공산 중국 건국이래 탄광사고 희생자로는 가장 많은 216명이 사망. 실종하는 등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처럼 안후이성 탄광 폭발사고 이후 중국 당국의 높은 관심과 대책에도 불구하고 사고는상당 기간 줄어들지 않았다. 또한 희생자 수도 대형화하였다.

중국에서 이 같은 탄광사고의 빈발과 대형화는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중국이 겪고 있는 심각한 에너지 부족현상을 베경으로 하고 있었다. 급증한 석탄수요를 맞추기 위해 안전 대비를 하지 않고 이미 폐광된 곳을 포함 무분별한 석탄
채굴이 철야로 진행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2005년통계에 따르면 중국의 탄광사고 중 80% 이상이 가스 폭발로 인한 것이며 10명 이상의 사망사고의 경우 그 점유율은 90%까지 치솟았다.

1905년 = 러일 전쟁을 이유로 일본 식민지이던 대만 전 지역에 계엄이 실시됐다. 러일 전쟁은 1904년 2월 8일 발발햇는데 1년 3 개월 여 뒤 대만에 계엄령이 실시된 이유는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을거쳐 인도차이나 반도에 잠시정박한 뒤 블라디보스토크 항으로 항진해오고 잇기 때문이었다.

발트함대의 항로는 러일전쟁 당시의 국제 역학관계를 드러내 준다. 영국이 스웨즈 운하를 막았기 때문에발트 함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항해해야 햇고 프랑스의 식민지 마다가스카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잇엇다. 또한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의 항구에서 잠시 기항하여 물자와 물을 보급받을 수 있엇다. 베트남과 블라디보스토크 사이 중간 지점에 있었던 대만 섬에 발트함대가 발을들여 놓지못하도록 일본이 이곳에 계엄령을 실시한 것은 당연햇다. 러일전쟁이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 간의 대결 구도 하에서 벌어진전쟁임은 분명햇다.대륙 국가인 러시아와 프랑스가 손을 잡앗고 해양국가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후원햇다.

발트함대는 대만에 대한 계엄령 실시 2주일 뒤인 이해 5월 27일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 한 대에 궤멸된다.

세계사 속의 오늘>/b>

파리서 미-북베트남 평화협상 개막되었고(1968), 일본 사회당이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미일 안보조약 인정하는 획기적인 당강령 개정안을 마련했다(1993).
이로써 만년 야당이던 사회당은 자민당과의 연립 정부에 참여 처음으로 총리를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비호하던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정일이 직접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이후 급속히 쇠락, 현재는 존재감조차 없는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탈리아의 로마의 바티칸 시티 성 베드로 광장에서 터키 극우파 회교도 청년 알리 아그자에게 피격, 부상했다(1981).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온늘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국난을 극복하고 이를 수습한 류성룡(柳成龍)이 사망했다(1607). 1542년 생으로 향년 65세였다.


2018/05/13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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