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22 09:03



[今天歷史-5월14일]江靑 자살, 핵개발 책임 녜룽전 사망

북한 남한에 전력 공급 중단. 바르샤바 조약기구 결성. 미국 오키나와 일본에 반환, 고르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독립 선언 불법 규정
1991년 마오쩌둥(毛澤東)의 미망인이며 문화대혁명(1966-1976) 당시 ‘4인방’의 일원이었던 장칭(江靑)이 연금 중이던 베이징(北京) 근교에서 목을 매어 자살했다. 1914년 생으로 향년 77세였다.

장칭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날은 문화대혁명 발동 25주년 나흘 뒤였다. 새가 죽을때 마지막 울음 소리가 곱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본 성명이 리윈허(李雲鶴)으로 '구름 속의 학'이란 뜻을 지닌 장칭의 경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그녀는 유서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지극한 연모의 감정을 담았으나 정적인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증오의 독설을 퍼부었다.
▶ 1981년 4인방 재판 당시의 장칭. 이 것은 공식석상에서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기도 하다.

장칭은 자살 당시 보석으로 석방되어 병원에서 치료 받던 중이었다.

산둥(山東)성 주청(諸城)에서 태어난 장칭은 193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으나 상하이(上海)에서 체포되어 당 조직을 떠났다.

중일전쟁 기간 옌안(延安)으로 와 마오쩌둥과 결혼했다.

▲ 옌안에서 마오쩌둥과 함께.

문화대혁명이 개시되면서 그녀는 중앙 문혁소조의 제1 부조장이 되었고 해방군 문혁소조의 고문이었다.

▶ 문혁 당시 한 집회에서 앞 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장칭이다.

마오의 사후 1개월이 채 못 지난 1976년 10월 6일(마오는 9월 9일 사망) 화궈펑(華國鋒)과 예젠잉(葉劍英)에 의해 체포되었고 1977년 7월 영구 출당조치되었다.

1981년 재판에서 2년 집행유예부 사형판결이 내려졌으나 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화궈펑의 ]‘탈당’과 천두슈의 ‘출당’(1)- 장칭의 유서 2001/11/13 12:08

[今天歷史-10월 6일] 4인방 체포, 북-중 수교

4인방 張春橋 출옥 장쩌민과 만나 2002/08/13 00:00

1992년 = 인민해방군 창설 주역의 한 사람인 니에룽전(?榮臻)이 사망했다. 1899년 생으로 향년 93세였다.

니에룽전은 쓰촨(四川)성 출신으로 1919년 말 근공검학(勤工儉學) 프로그램에 따라 프랑스에 유학하여 화공학을 공부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하였고 1922년 ‘재불소년공산당(旅毆少年共産黨 : 후에 ’중국 공산주의청년단 재불지부‘로 명칭이 바뀜)에 참여하고 1923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에서 6개월간 군사분야 공부를 한 후 귀국하여 저우언라이를 도와 황포군관학교에서 일했다.

대장정 후 린뱌오(林彪) 밑에서 홍1군단(紅一軍團)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55년 10대 원수의 한 사람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중국과학원 원장으로 중국 핵무기 개발의 책임자였다. 문혁 당시 해임되었으나 마오 사후 예전잉 원수와 함께 4인방 타도에 가담하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소련과 동구 7개국이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하고(1955), 미국이 오키나와 섬을 일본에 반환하였으며(1972),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선언을 불법으로 규정했다(1990).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북한이 남한에 전력공급을 중단했다(1948).


2018/05/14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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