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08/19 08:01



[今天歷史-5월16일] 5·16 통지...문화 대혁명 본격화

국부군 15만 저우산 열도서 대만섬으로 철수, 중일 러시아 혁명 대응 군사동맹 협정 체결, 나폴레옹 황제 옹립, 佛 크레송 첫 여성 총리 취임, 이란 하타미 대통령 사우디 방문, 옴 진리교 교주 체포, 5.16 쿠데타, 신미양요

1966년 5월16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는 마오쩌둥(毛澤東)이 기초한‘5 · 16 통지’를 통과시켰다.

정식 명칭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통지’인 문건은 10년 동안 계속된 중국 문화대혁명의 강령적 문건이다.

5 · 16 통지가 통과된 이 날을 펑전(彭眞) 등 실권파 주요 인사가 해임된 이해 5월10일 대신 문화대혁명의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今天歷史-5월 10일] 문화대혁명 발동

5 · 16 통지는 이해 2월12일 당 중앙위원회가 통과시킨 이른바 '2월 제강(二月提綱)'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2월 제강'은 1964년 당 중앙과 마오쩌둥의 지시에 의해 펑전을 조장으로 하고 루딩이(陸定一), 캉성(康生), 저우양(周揚), 우렁(吳冷)을 조원으로 하여 구성된 '문화혁명 5인소조’가 작성했다.

마오쩌둥이 공산사회 실현이라는 목표 아래 1958년부터 시작한 급진적인 대약진 운동이 야기한 재앙적 피해로 인해 1959년 8월 국방부장 펑더화이로부터 비판을 받자 마오쩌둥은 펑을 축출하는데 가까스로 성공했으나 당내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 1959년 4월 국가주석 직을 넘겨준 류사오치에게 상당한 실권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펑더화의의 비판에 동조한 류사오치는 마오의 노선과 다른 실용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하여 1961년 대약진 운동을 '안락사' 방식으로 종식시켰다.

마오는 이에 브레이크를 걸기 위해 '문혁 소조'를 구성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마오는 문혁 소조가 그의 노련한 외곽 때리기 '포대'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마오의 지시로 5인 문혁 소조가 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는 '친마오'와 '비마오'가 대립했다.

'비마오'는 마오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은 없었으나 참담한 실패로 끝난 마오의 정책을 더 이상 따르지 못한다는 자세였고 '친마오'에서도 '진마오'와 '먼마오'로 나뉘어져 마오의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하지 못했다.

5인 소조는 이러한 당내 역학 지형이 반영되었다. 무엇보다도 마오의 아바타 4인방 일원인 야오원위안이 1965년 11월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점화하기 전에 구성되었기 때문에 마오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물과 그를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인물이 뒤섞여 있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조장인 펑전은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등 실권파 지도자와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마오가 '리트머스 시험지'로 던진 야오원위안의 글에 관해 마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문건이 작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5인 소조는‘현 학술토론에 관한 회보제강(關于當前學術討論的匯報提綱)’이라는 명칭의 이 문건에서 1965년 11월10일 상하이 시당위 기관지 해방일보 편집위원 야오원위안이 상하이 문회보에 발표한 '신편 역사극 해서(海瑞) 파관을 논평한다'가 야기한 당시의 갈등과 충돌을 정치적인 것이 아닌 학술적인 논쟁으로 축소, 취급했다.

제강은 중국의 문화체계에 대해 총체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으며 "학문적인 불일치의 문제는 보다 복잡하고 어떤 것들은 짧은 시간 내에 정의되기 어려운 " 까닭에 "우리는 이 투쟁을 지도부의 지휘 아래 진지하고 확실하게 또 신중한 방식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심지어 일부 완고한 혁명적 좌파조차 무언가 잘못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마오는 이를 장칭(江靑) 등 4인방 배후의 자신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펑전은 펑더화이처럼 황제의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마오는 '외곽 때리기'가 전혀 먹혀 들지 않자 '중앙 돌파'로 전환한 것이다.

마오의‘5 · 16 통지’는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격인 첫 번째 부분은 ‘2월 제강'과 ’문화혁명 5인 소조‘ 및 그 사무기구의 철폐하도록 하고 새로운 ’문화혁명 소조‘를 구성하여 정치국 상무위에 소속시키도록 하였다.

이는 향후 마오가 뜻하는 바대로 문화대혁명을 이끌고 나갈 조직 지도부 구성을 확립하려는 것이었다. 5월28일 확대한 새로운 문혁 소조가 구성되었다.

두 번째 대목은 ‘2월 제강’의 10 가지 죄목을 축조 비판하고 새로운 ‘좌(左)’의 이론, 노선, 방침, 정책 등을 제시하였다.

결론인 세 번째 부문에서 각급 당위원회가‘2월 제강’의 집행을 즉각 정지하고 문화영역의 영도권을 탈취할 것을 지시하였다. 아울러 당정군 및 문화계에‘자산계급 대표인물’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전개하도록 촉구했다.

마오가 5인 소조를 이끌던 펑전과 루딩이를 해임한데 이어 '2월 제강'을 맹비난하는 문건을 발표함으로써 문혁의 방향을 자신이 구상한 대로 이끌고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1966년 6월1일 인민일보는‘일체의 우귀사신을 일소하자(掃一切牛鬼蛇神)’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어 5 · 16 통지를 알리는 연속 사설을 게재했다. 중국 대륙 전역을 혼란으로 몰고간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1951년 = 현리전투 개시.

한국전에 참여한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중공군이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겨냥한 춘계 6차 대공세 과정에서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한국군 대병력을 궤멸시킨 전투.

펑더화이는 이 전투에 앞서 한국군 3군단의 선봉을 전선 깊숙이 끌어 들인 뒤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는 보급로 요충지 오마치 고개를 기습 점령함으로서 한국군 대병력을 포위망에 빠뜨렸다.

전방에 포위된 1만9000명의 한국군은 붕괴되어 무질서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력의 40%만이 복귀하였고 무기는 모두 빼앗겼다.

1951년 5월16일에 시작하여 같은 달 5월22일에 끝난 이 전투의 패배로 한국군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이 해체되었고 작전 지휘권도 모두 미군 장성에게 부여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1994년 10월 탈북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는 현리전투 후퇴 과정에서 포로가 됐다.

그는 현리전투에 앞서 중공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니 모두 텅 빈 상태여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는 증언을 남겻다.

이 증언은 적의 예봉을 끌어들이고 빠른 기동으로 보급로를 차단 포위한 것을 확인해주는 방증으로 연안 공방전에서 구사했던 전략이었고 2차대전 당시 독소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썻던 전략이기도 하다.

현리전투는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이 당한 최대 참패다. 우리나라 전사상 정유재란 때의 칠천량 패전,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 패배와 함께 3대 패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951년 5월16일 저녁 중공군은 대공세를 펴면서 인제, 현리,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3군단(3, 9사단)과 10군단 예하 국군 5, 7사단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이들 4개 사단이 아무래도 미군보다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군 지휘부는 인제 오마치 고개에 병력을 투입하여 보급선과 유사시의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한국군의 대패주로 귀결된 현리전투는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지 못 한 때문에 일어났다.

그 당시 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된 3군단의 2개 사단, 즉 3, 9사단에 대한 유일한 보급로가 이 오마치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오마치 고개를 적이 차단하면 2만에 가까운 병력이 전방에서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국군 3군단의 유재흥 군단장은 9사단 29연대의 1개 예비대대를 이 고개에 배치했다. 그런데 미군 측은 앞서 전투지경선을 조정하면서 이 오마치 고개를 3군단이 아닌 미군 10군단의 7사단 관할로 변경시켜 버렸다.

유 군단장이 항의해도 앨몬드 10군단장은 막무가내였다. 앨몬드
군단장은 한 술 더 떠 오마치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재흥은 "무슨 소린가. 우리 군단의 생명선을 우리가 지키는데"하고 버텼다.

앨몬드는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서 상급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무인지경이 된 이 요충지를 중공군이 기습 장악해버린 것이다. 중국 측 공간사에 따르면 '항미원조지원군 20군 60사단은 신속하게 적의 종심을 향해서 진격하여 17일 새벽 3시에 오마치 일대를 점령, 국군 3, 9사단의 철수로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지도상으로는 23km이지만 실제 거리는 30km를 넘는 험준한 산중을 8시간만에 신속한 야간행군으로 돌파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것이다. 이 경이적 행군 속도가 유재흥 군단장의 계산을 흔들어버렸다.

하진부리에 위치하고 있던 제3군단 전술지휘소에서는 좌인접 군단인 미 제10군단에게 상황추이를 문의하였더니 "우리 군단 정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라고 하면서 제7사단의 전선 붕괴 사실마저 은폐하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3군단장은 작전 판단상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현리의 패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투사 현리전투에서 발췌)

유재흥은 1950년 낙동강 교두보 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다. 현리전투의 우리군 지휘관으로서 패전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미군 측의 잘못된 상황 판단과 틀린 정보 제공 및 부당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 군의 참담한 패배를 안겼다.

이는 조선 시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국왕 선조와 중앙 조정의 잘못된 판단과 그릇된 전략 지시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단 번에 괴멸된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승리, 일본 대함대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였으나 이후 명나라가 파견한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 함대에 의해 작전상 제약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리전투 패전 이후 우리 군의 상황과 유사하다. 1597년과 1951년의 상황은 너무도 비슷하다.

원균과 유재흥의 패전 이후 운명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다르면 다르다.

원균은 칠천량 패전 직후 아들 원사웅과 함께 배에서 내려 피신, 뭍으로 상륙한 것이 조정에서 파견한 종사관의 생환 뒤 조정에 보고한 기록에 나와 있으나 그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아들과 함께 쫓는 왜군에 참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왜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장수복을 벗어 버렸기에 왜군도 그를 죽인 뒤에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햇던 것 같다.

원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권율, 이순신과 함께 무신 3명의 1등 공신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나 명나라도 인정한 이순신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원균은 비록 칠천량 패전으로 일본 수군이 대 병력을 싣고 서해를 따라 한양 인근에까지 올라 갈 수 있는 길을 터놓아 다시 한번 도성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를 전략적 위기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으나 자신의 죽음과 패전을 감수하면서도 왕의 명령 따른 충성심을 기린 것이다.

선조의 이런 평가는 선조가 죽은 이후 원균이 패전과 조선 수군 괴멸이라는 오명 외에 시기, 고자질과 부패 등 일방적 주장의 오명을 모두 뒤집어 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순신 장군은 트라팔가 해전의 승장 넬슨 제독보다 더욱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성인'으로까지 미화하는 것은 지나치고 적확한 평가도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장 중 무장이며 충성심과 효성 그리고 부하 아끼는 마음 등 우리나라 유교사회의 고매한 인격을 지녔음은 분명하나 수도승과 같은 탈속한 사람은 아니다.

반면 천하의 악인의 모든 것이 구비된 인물로 그려지는 원균은 패전과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장수로서 책임은 마땅히 비난받고 준엄한 평가가 내려져야 하지만 인격 모독적인 폄하 역시 지나치다.

유재흥은 박정희 정권 때 국방장관을 지냈는데 현리 패전이 전적으로 그의 과오가 아니며 그가 당초부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군이 정확하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공과가 적절하게 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공군 측 승전의 지휘관 펑더화이는 현리전투에서 그가 국공내전 당시 연안 공방전을 지휘하면서 구사한 전략을 재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중재로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은 1945년 10월10일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 간 '충칭교섭(重慶交涉)'을 기초로 내전을 피하기 위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하고 이 협정에 근거하여1946년 1월에 정전(停戰)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군 공격으로 같은 해 7월 이후에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옌안공방전은 압도적 수적, 물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민당군이 공산군에 대해 공세를 가하던 내전 초기의 중요 전투이다.

종전 후 공산군이 장악했던 도시 지역에서 공산군을 몰아낸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당정군 중추 지휘부가 소재하는 옌안을 함락시키기 위해 서북(西北)지구에 34개 여단 25만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 같은 국민당군의 전략에 대응하여 공산군은 적절한 시기에 옌안을 포기한 뒤 옌안 북북 산지 지역으로 지휘부를 옮겨 반격의 전기를 마련하고 자신의 근거지에 깊숙이 들어온 국민당군을 단계적으로 격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7년 3월13일 국민당군의 남부전선부대는 이촨(宜川), 뤄촨(洛川)방면으로부터 전면적 공격을 가했다.

공산군의 서북야전군은 원래 세운 계획대로 한동안 방어한 뒤 퇴각하면서 국민당군에 큰 손실을 입히는 한편 지휘부 중추의 이전을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공산당의 주요기관은 3월18일 이전을 완료했고 하루 뒤인 3월19일 서북야전군의 주력이 옌안에서 철수했다.

옌안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그러나 서북야전군의 지속적인 습격과 반복되는 공방전으로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식량 및 연료 등 보급도 차질을 빚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북야전군은 국민당군이 극도로 약화된 기회를 틈타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국민당군을 각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공산당이‘옌안 보위전’으로 부르는 옌안공방전에서 공산군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대단위로 운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결국 내전 승리의 전기를 마련했다.

옌안공방전을 지휘한 공산군의 지휘관은 펑더화이(彭德懷)와 시중쉰(習仲勛)이었다. 시중쉰은 현재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중국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의 부친이다.

1918년 = 중국 단기서(段琪瑞 :두안치루이)정부와 일본이 베이징(北京)에서 ‘중일육군 공동적 방지를 위한 군사협정(中日陸軍共同防敵軍事協定)’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이어 19일에는 양국 해군 간에 유사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여기서 적은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정을 타도하고 성립된 공산 러시아를 말한다. 일본은 러시아 혁명기를 틈타 만주를 독점하려 들었으며 이것이 비밀 군사협정을 체결한 배경이 되었다.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은 전쟁기간 중국 영토내에 진주한다 ;

- 일본군이 중국 국경밖에서 작전을 수행할 때 중국은 파병하여 지원한다 ;

- 작전 기간 양국 군대는 무기와 군수품을 상호 공급한다.

군사협정이 체결된 뒤 일본은 대규모의 병력을 만주로 파병하여 러시아가 갖고 있던 만주 북부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1914년7월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해 8월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산둥 반도로 츌병, 독일이 구축한 제국주의적 이권을 빼앗은데 이어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하고 뒤이은 사회주의 혁명으로 내전이 발발하여 혼란에 빠지자 러시아의 만주 지역 내 제국주의적 이권을 강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청일전쟁(1894~1895년) 승리로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던 일본은 독일, 프랑스와 러시아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 의 이른바 '3국 간섭'으로 이를 토해내야 했다.

그러나 20년 뒤 독일과 러시아가 서로 갈려 싸우는 사이에 일본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독일과 러시아의 중국에서 제국주의적 이권을 손쉽게 단계적으로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중국은 일본의 부속국이 될 위험성에 처하게 되었다.

군사 비밀협정 내용이 전해지자 당시 펑파이(澎湃) 등 중국의 일본 유학생은 도쿄(東京) 시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또 많은 유학생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구국단체를 결성하고 애국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베이징대 학생 2000여명이 총통부로 몰려가 협정 폐지를 촉구하였고 이어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푸저우(福州) 등지의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으며 전국 각지의 상공업자도 단기서 정부의 매국행위를 규탄했다.

1941년 = 해방일보가 공산당 기관지로 옌안(延安)에서 창간되었다. 해방일보는 중국 공산화 이후 중국공산당 상하이 시당 위원회 기관지가 되었으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때 이들의 노선을 실천하는 선전 선봉 역할을 하였다.

1950년 = 저우산(舟山) 군도에 주둔하던 국부군 15만명이 대만으로 철수하였다. 저우산군도는 저장성에 속해 있으며 중국 대륙의 태평양 출구다.

전국 섬 5분의 1이 되는 1390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우산 섬이 제일 크다. 저우산 군도는 상하이, 항저우, 닝보 3대 도시 클러스터와 양쯔강 삼각주 등 넓은 배후지를 가지고 있다.

<2차 국공내전 일지( 2차 대전 종전 이후)>

1946년 7월 = 국부군과 공산군 간 충돌이 본격화함.

1946년 11월9일 = 저우언라이 등 중공 대표단 난징서 연안으로 철수 2차 국공합작 공식적 와해. 이후 국공내전 본격적으로 전개.

1947년 3월13일 = 국부군 옌안 공격 개시로 연안 공방전 시작. 옌안 공방전에서 국부군은 옌안을 한때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공산군의 작전상 후퇴로 전열을 정비한 공산군에 의해 각개격파됐다. 이후 공산군은수세에서 반격을 본격화하였다.

1947년 9월 = 마오쩌둥 인민해방군에 수세에서 반격으로 전환할 것을 지시

1948년 9월 12일 = 랴오선 전투(遼瀋戰役) 개시
1948년 11월 2일 = 선양 공산군에 함락됨으로써 으랴오선 전투 종료
1948년 11월 6일 =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개시
1948년 12월 5일 = 핑진 전투(平津戰役) 개시

1949년 1월10일 = 화이하이 전투 공산군 승리로 종료

1949년 1월21일 = 장제스 총통 직에서 사임하고 대리 총총에 리쭝런

1949년 1월31일 = 베이핑 수비 국부군 항복으로 핑진전투 종


1949년 2월25일 = 국민정부 최대 함정 충칭호 공산군에 투항

1949년 4월1일 ~15일 = 국공 대표단 베이핑(베이징)에서 회담을 갖고 평화 협정에 합의

1949년 4월20일 = 국민정부 평화 협정 거부

1949년 4월21일 =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

1949년 4월23일 = 인민해방군 100만명 양쯔강 도하 완료하고 국민 정부 수도 난징 함락

1949년 4월27일 =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 우한(武漢)과 상하이(上海)를 점령함으로써 도강전역(渡江戰役)은 채 1주일만에 공산군의 완승으로 끝을 맺었다. 국민당군은 이 전투로 15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1949년 10월1일 = 중국공산당 베이징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선포

1949년 10월25일 ~ 26일 = 국부군 진먼다오에 상륙한 인민해방군 3개 사단 완파. 국부군 해방군 7000여명을 사살하고 7340명을 생포

1949년 12월7일 = 국민정부 대만 타이페이로 천도 선언

1949년 12월27일 = 국부군 대륙 내 최후 주요군 공산군에 섬멸. 이로써 대륙 내 국부군이 소멸됐다.

1950년 3월28일 =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 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

1950년 = 저장성 저우산(舟山)군도에 주둔하던 국부군 15만명이 대만으로 철수. 저우산 군도는 상하이, 항저우와 닝보및 양쯔강 삼각주를 배후에 두고 있는 곳으로 중국 대륙의 태평양 출구다.

1955년 1월20일 = 국부군이 장악하던 저장(浙江)성 연안의 이장산다오(一江山島)가 중국 육해공군의 합동 공격으로 함락됨. 이 섬을 지키던 대만 군병 720명이 전사하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프랑스 상원이 나폴레옹을 황제로 옹립하였고(1804), 에디트 크레송이 프랑스 첫 여성총리에 취임하였다(1991). 모하마드 하타미 이란 대통령이 회교혁명 후 이란 지도자로서는 처음 사우디 아라비아를 방문했다(1999).

일본 경찰이 도쿄 지하철에서 사린가스 테러를 자행한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를 체포했다(1995).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한 군사 쿠데타가 발생, 장면(張勉) 내각이 붕괴했으며(1961) 미국 함대가 강화도 해안으로 침입해 신미(辛未洋擾)가 일어났다(1871).

2018/05/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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