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17 23:46



[今天歷史-9월15일] 일본 만주국 승인, 인천 상륙 작전

2차 奉直전쟁,중화 인민공화국 헌법 통과, 대만 영화 悲情城市 베니스 영화제 황금 사자상 수상,탱크 첫 전투 투입

1932년 9월 15일 일본은 이해 3월 1일 성립된 만주국과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를 체결하고 만주국을 승인했다.

일본과 일본 자신이 세운 괴뢰국 만주국과의 ‘일만의정서’ 협정 체결은 이날 일본 관동군(關東軍) 사령관 겸 주만(駐滿)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와 만주국 총리 정샤오쉬(鄭孝胥)에 의해 창춘(長春)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성립시켰으나 국제연맹의 리튼 조사단이 활동하는 동안 공개적으로 이를 승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리튼 조사단의 결론이 만주국을 인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만주국을 승인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를 말한다.

중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발생한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 제안으로 맞대응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는 조사단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하고,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일본은 리튼 조사단이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인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케 하여 이를 기정사실화 하려 하였다.

조사단은 1932년 3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한커우(漢口), 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는 10월 1일 중·일 양국에 전달되었고 2일 공표되었다.

보고서는 '만주국'의 건국을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으며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함과 동시에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보고서에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리튼 보고서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 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국 승인을 앞둔 1932년 일본에서도 큰 정치적 소용돌이가 벌어졌다.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해군의 과격 청년장교 그룹이 중심이 된 ‘5 · 15 사건’으로 피살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의 정당내각 정치는 붕괴됐다.

이후 혼란을 거듭하던 일본 정국은 이해 8월 초 수습의 가닥이 잡혔고 이는 국제여론을 무시한 만주국 승인으로 이어졌다.

9월 13일 일본 추밀원의 ‘일만의정서’ 통과에 이어 9월 15일에 협정 서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만의정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 2가지이다.

- 일본이 만주국 영역 내에서기존의 일-중 양국 조약. 협정, 기타 조관(條款), 및 공사 계약에 근거하여 향유하고 있는 일체의 권익을 만주국은 승인한다.

- 양국은 공동으로 국방의 책임을 지며 일본은 만주국 영역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갖는다.

의정서는 이해 3월 10일에 이루어진 일본과 만주국과의 밀약을 지속시킨 외에 일본이 만주국의 교통망, 광산, 국방. 치안 등을 위탁관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밀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약 체결의 형식을 빌어 만주국을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든 것이다.

만주국은 일본이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1932년 3월 1일에 만든 괴뢰국가이다.

만주국의 영역은 현재의 중국 둥베이(東北)지구에 있는 3성(省)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으로 구성되었으며, 만주국 성립 후에는 러허(熱河)성도 판도에 넣어, 1940년의 행정구획으로는 18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柳條溝) 사건을 통해 만주사변을 일으킨 중심인물인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 등 관동군의 장교들은 사건 직후부터 당초의 만주에 대한 군사점령이라는 구상을 변경하여 괴뢰국가 건설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국민혁명(國民革命)에 부정적인 만주군벌의 시챠(熙洽), 장징훼이(張景惠), 창스이(臧式毅),장하이펑(張海鵬), 간츠산(干芷山), 마잔산(馬占山) 등에게 강요하여 각 성(省)을 독립시키고, 1932년 3월 1일에는 그들이 조직한 둥베이 행정위원회(東北行政委員會)에 의한 '건국선언'을 발표시켜 중국인 자신에 의한 독립이라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리고 톈진(天津)에 은거하고 있던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비밀리에 만주로 데려와 3월 9일 푸이의 집정(執政) 취임식이 거행되어 '만주국'의 모양이 갖추어졌다(후에 푸이 '황제'로 즉위).

만주국의 주권은 집정(황제)에게 있었으며 헌법은 없고 정부조직법이 이를 대신하였다. 입법·행정·사법·감찰의 4권분립제였으며 집정(황제)의 자문기관으로서 참의부(參議府)가 있었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행정권이 강력하였고 행정의 중심은 국무원(國務院)이었으며 수반은 국무총리였다. 집정(황제)에 대한 보필의 책임은 국무총리 한 사람만이 지고, 국무원 예하의 각 부 총장은 소관 사무에 대한 행정장관이었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권한이 큰 편이었으며 이 국무총리의 참모적 지위에 있는 것이 총무청(總務廳)으로서 총무장관이 국무총리가 직접 관장하는 인사·회계·조달(調達) 등을 처리하였다. 이처럼 총무장관에게 실권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총무청 중심주의라 불렀다.

총무장관은 반드시 일본인이 임명되었으며 총무청 내의 각 처장과 행정 각부의 차장 이하의 일본인 관리를 사실상 감독하였다.

실질적 지배 주체인 일본 관동군은 4,000만 이상의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민족협화(民族協和)'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의 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1932년 7월에 발족시켜 민중 지배의 첨병으로 삼았다.

태평양전쟁( 1941년 12월 7일 ~ 1945년 8월 15일 ) 에 의하여 만주국은 식량과 광공업(鑛工業) 원료의 생산확대가 불가피하여 통제가 강화되었고 수탈적 요소가 더욱더 증대하였으며, 협화회가 이 수탈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43년 봄 이후부터 만주국의 물리적 기반인 관동군은 병력을 남방 각 지역과 일본 본토작전에 전용(轉用)하며 약체화하였으며, 1945년 8월의 소련 참전과 일본의 패전으로 만주국은 해체되었다.


1924년 = 제 2차 ‘봉직(奉直)전쟁’이 발발했다.

봉군(奉軍 : 봉천奉天, 즉 현재의 선양 瀋陽을 본거지로 하고 동북 3성을 관할하던 군벌) 총사령관 장쭤린(張作霖)이 직계(直系), 즉 직예(直隸)파(베이징 등 화북 일대에 기반을 둔 군벌)의 차오쿤(曹?)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쟁이었다.

장쭤린은 이 전쟁에서 승리, 중국 북부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했으나 1928년 남쪽의 국민혁명 북벌군에 쫓겨났다. 장쭤린 자신도 세력 근거지인 만주로 이동하던 중이던 이해 6월 일본군에 의해 폭사햇다.
그의 아들로 후계자가 된 장쉐량(張學良) 이해 12월 국민혁명군에 투항함으로써 일단 국민혁명군에 의한 중국 통일이 이루어졌다.

1954년 = 중국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를 베이징에서 개최하였다. 이 회의폐막일인 같은 달 20일에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이 통과되었다.

1961년 = 중국 공군 비행사 샤오시옌(邵希彦)과 가오용우쭝(高佑宗)이 AN-2 경형 수송기를 몰고 제주도로 망명.

1989년 = 호우샤오시엔(侯孝賢) 감독의 대만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

일본 패망이후 국공내전을 거치는 시기 혼란과 격변 속에 사는 대만의 가족이야기를 지루할 정도로 조용하고 담담하게 그렸다.

헐리우드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속도감 있는 편집, 화려한 볼거리 등의 다양한 기교들을 배제하고 역사적 진실을 이야기하기위해 먼 곳에 카메라를 고정시키는 단순한 방법을 채용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영국이 처음으로 탱크를 전투에 사용하였다(1916).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1950). 이 상륙작전은 유엔군 총사령관 D.S. 맥아더가 구상하였다. 워싱턴은 당초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어서 승인에 주저하였지만 맥아더가 강력하게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맥아더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인천의 자연조건상 상륙작전을 수행하는 데 매우 불리하지만 이 불리한 여건을 역이용, 상대방의 허점을 찔러 기습공격을 감행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9월 15일 E.M. 아먼드 장군의 지휘 아래 한국의 백인엽(白仁燁)대령이 가세하여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쳤다. 상륙부대의 병력은 약 7만여 명에 달하였다. 북한군의 대비 부족으로 이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낙동강전선에 집중 투입된 북한군의 보급로는 끊겼고 북한군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전은 6·25 당시 낙동강전선까지 밀려난 유엔군과 한국군이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대반`격을 취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2018/09/15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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