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6 19:35



[今天歷史-9월17일]시안사변 楊虎城 피살, 북일 평양선언

미국 연방헌법 제정, 소련군 폴란드 침공,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서울 올림픽 개막,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 가결

1949년 9월 17일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張學良)과 함께 시안사변(西安事變) 을 일으킨 양후청(楊虎城)이 충칭(重慶)에서 피살됐다.

시안 사변이란 장제스(蔣介石)의공산군에 대한 5차 토벌로 장정을 거쳐 서북 지구로 쫓겨 간 공산군 토벌에 미온적인 장쉐량에게 직접 독려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한 장제스를 체포 연금하고 일본군과의 젅쟁에 주력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할 것을 강요한 사건을 말한다.

시안 사변으로 결국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으나 양후청은 맡고 있던 국민정부군 서북군 총사령의 직책을 압력을 받고 내놓아야 했다. 이후 외국을 여행하다 중일전쟁이 본격화하자 귀국했다.

장제스는 그러나 귀국한 양후청을 12년 동안 감금했으며 대륙을 공산당에게 내어주기 전 그를 처형하도록 했다.장제스는 시안사변 당시 그를처형하고자 주장했던 양후청을 결코 살려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시안 사변 직후부터 연금 중이던 장쉐량은 대만으로 끌고 가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장쉐량은 장제스가 사망한 1975년 이후에도 연금이 해제되지 않았고 그가 자유의 몸이 된 때는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가 사망한 1988년 1월 이후다

시안사변 당시 장쉐량은 장제스 중심으로 국공합작을 이루어 일본 침략에 대항하자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장제스를 죽이자는 양후청의 말을 듣지 않앗다.

양후청은 1893년 11월 26일 산시(陜西)성 푸청(蒲城)현에서 출생했다. 마오쩌둥과 동갑이다. 마오는 그가 태어난지 꼭 한 달 뒤에 출생햇다. 후청(虎城)은 그의 호이다. 그의 부친은 반청복명(反淸復明) 조직인 ‘가로회(哥老會)’의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처형되었다.

부친 처형 후 반청활동을 전개하던 그는 1911년 신해혁명 때 군에 투신, 1917년 위여우런(于右任)의 산시정국군(陝西靖國軍)에 들어가 안후이(安徽)계의 군벌과 싸우면서 산시성 내에서 기반을 쌓아나갔다.

1930년 장제스으로부터 산시성정부의 주석 직첵을 임명 받았지만 장제스가 서북지방의 직접지배를 꾀했기 때문에 1933년에 파면당했다.

장제스에 대한 불만과 신변상의 이유로 공산당원인 조카 왕빙난(王炳南)을 비서로 채용했고 공산당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

1936년 12월 12일의 시안사변 때에는 시안수정공서(西安綏靖公署) 주임으로서 시안군(西安軍)을 이끌고 장쉐량과 행동을 같이했으며 장제스에게 항일(抗日)을 강요했다.

사건이 해결된 뒤 강제적으로 외유를 당했으며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항일전에 참가하기 위해서 귀국했지만 국민당의 특무기관에 의해서 감금당했다. 감금된 채 각지를 전전한 끝에 1949년 9월 17일충칭에서 살해된 것이다. 그가 기사회생시킨 중국 공산당이 베이징(北京)의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기 바로 2주일 전의 일이었다.

시안사변 및 장쉐량과 관련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今天歷史-4월 9일] 張學良-周恩來 비밀회담

[今天歷史-10월14일] 張學良 사망

張學良, 蔣介石 황제를 꿈꾸었다 2002/06/08 09:54

張學良 구술증언기록 공개 2002/06/04 13:30

張學良 장례식 23일 하와이서 거행 2001/10/18 00:04

西安사건 주역 張學良 1백세로 사망 2001/10/15 21:08

西安사건 주인공 張學良 위독 2001/10/11 22:48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이 연방헌법을 제정하고(1787), 소련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1939).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중국 충칭으로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했고(1940), 제24회 서울 올림픽이 개막됐으며(1988)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안이 만장일치로 가결됐다(1991).

북한 김정일은 북한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국교정상화 회담 교섭을 재개하는데 합의함과 함께 4개항의 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2002).

이 평양선언에서 북한은 과거청산 문제에는 ‘경제협력’ 방식에 동의했으며, 2003년까지 한시적으로 못 박은 미사일 발사실험의 모라토리엄(유예)도 연장하겠다고 선언했다.

김정일은 평양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하고 사과한 뒤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당시 북한의 이 사과를 받아내는 데는 현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아베는 2006년 9월 고이즈미의 후임 총리로 선출됐다가 한해 뒤인 2007년 9월 후쿠다 야스오에게 총리직을 넘겨 주고 물러났다. 그는 2012년 12월 총선에서 승리, 총리에 다시 올랏다.2차 아베 정권은 2014년 5월 말 일본인 납북자를 포함한 북한 내 일본인 실태 조사와 대 북한 제재 일부 해제를 연계한 '스톡홀름 합의'를 이끌어냇다.

2018/09/17 02:50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