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0/17 23:46



[今天歷史-9월25일] 大慶유전 발견, 1자녀 정책, 魯迅

서구인 첫 태평양 발견, 남북한 첫 국방장관 회담, 한국군 주월 사령부 창설
1959년 9월 25일 중국 석유탐사대가 둥베이(東北)지방의 쑹랴오(松遼)분지에서 석유가대량 매장되어 있는 유전을 발견했다.

중국 건국 10주년을 앞둔 시점에 발견되어 ‘다칭(大慶)’으로 명명되었다. 다칭 유전의 발견으로중국은 석유빈국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9년 이전 중국에서는 깐수(甘肅), 신장(新疆), 그리고 산시(陝西) 등지의 3개의 소규모 유전과 쓰촨(四川)의 2곳 가스 유전에서 연간 10여 만 톤 정도의 석유가 생산되어 대부분의 석유는 외국으로부터 수입해야 했다.

다칭 유전의 개발로 석유생산이 크게 늘어났으며 1963년 12월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중국이 사용하는 석유는 현재 기본적으로 자급이 가능하다. 중국 인민이 수입석유(洋油)를 사용하는 시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의 이 같은 전망은 완전히 틀렸다. 그의 노선을 이어받은 덩샤오핑(鄧小平)의 1978년 집권 이후, 개혁, 개방정책으로 중국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중국의 석유수입은 다시 급
증하기 시작했다.

개혁 개방 40년이 흐른 지금 세계 1위 에너지 소비국인 중국은 2016년 석탄 소비량에서 선두, 석유 소비량 경우 2위, 천연가스 소비량 3위를 각각 차지했다.

2018년 현재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은 소비량의 60% 이상을 사들이고 있다.
중국의 석유자원 대외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데 2016년 석유가 65%, 천연가스는 35%였다.

2017년 1~10월 중국 원유 수입량은 전년 동기 대비 11.8% 증가한 3억4900만t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저우산(舟山)과 전하이(鎭海), 다롄(大連), 톈진(天津), 황다오(黃島), 두산쯔(獨山子), 란저우 등에 9개 대형 전략석유 비축기지를 운용하고 있으며 일부 기업도
전략비축용 원유를 보관하고 있다.

2004년 중국은 원유 공급 차질을 예방하고 전 세계 에너지 가격의 급격한 변동에 따른 국내 정제유 시장에 대한 영향을 축소하고자 전략석유 비축기지 건설에 나섰다.

국무원이 비준한 '국가석유 비축 중장기 계획'은 2020년 이전에 중국이 전략석유 비축을 위한 제2기와 제3기 공사를 통해 100일분의 석유를 확보하도록 명기하고 있다.
2017년 6월 말 현재 중국이 원유 수급 불균형에 대비해 비축한 전략석유량은 3773만t에 달했다.

이 같은 중국의 전략석유 비축량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3.5% 늘어난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이 크게 늘고 잇다. 2017년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LNG 수입국으로 부상했다.

에너지 관련 정보업체 S&P 글로벌 플래츠 통계에 따르면 2017 년 중국의 LNG 수입량이 전년 대비 48.37% 크게 늘어난 3789만t에 달했다.
이해 중국의 LNG 수입 규모는 한국의 3651만t을 상회하는 것이다. 일본은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많은 8162만t의 LNG를 사들였다.

앞서 2005년 중국의 석유수입량은 1억 3,600만 톤으로 전 세계 석유교역량의 6%를 차지했다. 수입의존도 43%였다.

다칭 유전은 2002년 175억 4,000만 위안(2조 6,310억 원)을 납세, 중국에서 가장 많은 액수를 납세하는 기업이 됐다. 2004년 9월에도 중국의 100대 납세기업 중 1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칭 유전은 1975년 처음 생산량 5,000만 톤을 돌파한 뒤 2002년까지 28년 간 생산량이 5,000만 톤 이하로 내려간 적이 없다. 그러나 2004년부터 매년 200만 톤 씩 감산되기 시작, 2005년의 생산량은 4,640만 톤에 그쳤다.

다칭 유전은 인근에 새로운 유전개발 등을 통해 생산량 5,000만 톤 수준을 회복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시베리아 유전과 송유관으로 연결, 안정적인 석유공급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1980년 =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1부부 1자녀 갖기를 촉구하는 공개서신 발표. 이 서신에 중공중앙은 20세기 말까지 인구를 12억 명으로 제한하기위해 1부부 1자녀 갖기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자녀 정책은 2016년부터 두 자녀 허용 실시로 폐지되었다.

인구가 당초 목표를 훨씬 상회햇음에도 불구( 2016년 말 현재 13억 8271 만 명), 한 자년 정책을 더 이상 유지하지 않기로 한 것은 인구 곻령화에 맞물려 생산 가능 연령의 비율이 크게 저하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2015년 10억명에 이른 노동연령 인구가 저출산과 인구 고령화로 인해 2030년까지 5000만명, 2050년에는 2억명 가까이 각각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다.

국가위생계획생육위원회 는 2017년 3월 전인대에서 한자녀 정책 폐지 시행 첫 해인 2016년 2001년 이후 줄곧 1.5~1.6으로 추이하던 합계 특수 출생률(여성 1명이 평생 출산하는 아이 수)이 1..7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1881년 = 중국의 소설가 루쉰(魯迅) 탄생.


루쉰(魯迅 : 1881∼1936)
중국의 작가·사상가. 자는 위차이〔豫才〕, 본명은 저우수런(周樹人).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 출생. 저우쭤런(周作人)의 친형이다. 어려서 한문교육을 받았고 1898년 난징(南京)으로 나가 남경수사학당(南京水師學堂)에 입학했고, 1901년 노광학당 채광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02년 강남독총공소(江南獨總公所)에서 파견되어 일본에 유학, 도쿄(東京) 고분학원(弘文學院)과 센다이 의학전문학교(仙臺醫學專門學校)에서 배웠다. 1906년 교실에서 러일전쟁(露日戰爭)의 환등(幻燈)기 영사물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중퇴했고, 그 뒤 도쿄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특히 유럽의 약소민족의 문학과 슬라브계 민족의 저항시에 관심을 가졌으며, F.W.니체에 심취했다. 이 무렵 몇 편의 논문을 썼고, 친동생인 저우쭤린( 약력 뒤쪽 수록)과 함께 동유럽 각국의 단편소설을 번역해서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발간했으며, 장삥린〔章炳麟〕에게서 국학(國學)을 배웠다.

잠시 귀향(歸鄕)하여 인습적 결혼을 했으나, 이것은 뒤에 그에게 큰 심적 상처를 입혔다. 1909년 완전 귀국하여 고향에서 교원생활을 했고, 민국혁명(民國革命) 뒤에는 동향의 선배인 치이위안페이(蔡元培)에게 초청되어 베이징(北京)으로 가 교육부에 들어갔다.

처녀작 《광인일기(狂人日記,1918)》를 발표, 그 전해에 시작된 문학혁명을 더욱 촉진시키는 구실을 했다. 이어 소설 《공을기(孔乙己, 1919)》 《약(藥, 1919)》 《명일(明日, 1920)》 《일건소사(一件小事, 1920)》 《두발고사(頭髮古事, 1920)》 《풍파(風波, 1920)》 《고향(故鄕), 1921)》 《아큐정전(阿Q正傳, 1921)》 등을 발표했다. 특히 《아큐정전》은 세계적 명작이 된 그의 대표작이다.

1920년부터 베이징대학(北京大學)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그 강의안(講義案)은 뒤에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으로 간행되었다. 1924년 저우쭤린과 함께 어사사(語絲社)를 만들었으며 이어 외국문학연구를 주로 한 청년지도기관인 주명사(朱名社)를 설립했다.

1926년 정부의 문화 탄압에 위협을 느껴서 베이징을 탈출, 남하(南下)하여 광둥중산대학(廣東中山大學)에서 가르쳤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의 불안한 사회정세를 피해 상하이〔上海〕의 조계(租界)에 숨어서 제자인 쉬광핑(許廣平)과 동거했다.

이 무렵부터 중국좌익작가연맹(中國左翼作家聯盟, 1930)의 중심인물이되어, 창조사(創造社)·태양사(太陽社) 등의 극좌적(極左的) 경향과 대립하면서 프롤레타리아문학이론을 내세웠다. 이 때 우익(右翼)의 량스추(梁實秋), 제3종인(第三種人)의 문학을 주장한 두헝(杜衡) 등의 예술지상주의, 개성주의를 주장하는 린위탕(林語堂) 등의 공격을 받아 논쟁에 열중하여 작품 창작은 부진했다.

고골리의 《죽은 넋》을 번역했고, 외국문학을 연구했으며, 《맹아(萌芽)》 《대중문예(大衆文藝)》 《북두(北斗)》 《문학(文學)》 《역문(譯文)》 《작가(作家)》 등의 잡지에 관계하다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기 전 해에 죽었다.

《단오절(端午節, 1922)》 《백광(白光)》 《토화묘》 《압적희극(鴨的喜劇)》 《사극(社劇, 1922)》 등의 소설이 있고 《광인일기》 이후부터 《사극》에 이르기까지 전 작품을 수록한 소설집 《눌함(訥喊)》, 산문시집 《야초(野草)》 등의 많은 작품이 있다.

저우쭤런(周作人 : 1885∼1967)

중국 산문작가. 계명(啓明)·지당(知堂) 등의 별호와 많은 필명이 있다.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 출신. 형인 루쉰 따라 1906년 일본에 유학, 릿쿄대학〔立敎大學〕에서 수학하였다. 그동안 형제가 번역한 소설집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 2책)》이 출판되었다.

신해혁명 직후에 귀국, 그 뒤 베이징대학(北京大學)의 문과교수가 되었으며 때마침 일어난 문학혁명운동에 호응하여 <사람의 문학> <사상혁명> 등의 평론을 통하여 언문일치(言文一致)를 표방하는 한편, 개인주의적 휴머니즘을 제창하였다. 또한 일본·영국·그리스 등의 해외문학을 열성적으로 소개했다.

작가로서는 일찍이 자유로운 소품산문(小品散文)에 대한 독자적 가능성을 시도하였고 《우천(雨天)의 글(1925)》 등 20여 권의 수필집을 남겼다. 이 수필집들은 근대의 합리주의에 의해 밀려난 전통적 문인필기(文人筆記)의 최후 고봉(高峰)과도 같은 풍모를 드러낸다.

1920년대 중반부터 날로 확산되는 혁명운동에는 불참, 차츰 반시대적인 은일(隱逸)의 자세를 취하였고, 중일전쟁 동안에는 일본에 협력적인 왕징웨이(汪精衛)정권에 참여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전범으로 투옥되었다.

중국 치하에서는 《루쉰의 고가(故家, 1953)》 등 루쉰 관계 저술과일본문학 번역에 종사하였다.
세계사 속의 오늘

스페인 탐험가 바스코 발보아가 서구인으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했다(1513).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주월 한국군 사령부(사령관 채명신)가 창설됐고(1965), 조성태 국방장관과 북한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간에 제주도서 사상 첫 남북 국방장관 회담을 개최했다(2000).

2018/09/2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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