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6 19:35



[今天歷史-9월29일] 중-일 수교, 4인방 재판 결정

보하이만 대규모 유전 완성, 신민당 전당대회서 김대중 의원 대통령 후보 선출, 五賊
게재로 사상계 등록 취소


1972년 9월 29일 중국과 일본이 정식 수교를 했다.

베이징(北京)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일본은 단절된 양국 국교를 다시 연다는 원칙 아래 과거의 전쟁을 통해 중국 국민에게 큰 피해를 주었음을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하며 깊이 반성한다는 내용을 전제하였다.

아울러 중국이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인정하고 대만이 중국 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라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며” 이를 “존중한다”고 밝혔다. 대만은 즉각 일본과 단교하였다.

중-일 수교 당시 일본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 1918~1993)였다. 미국이 대만 문제에 발목이 잡혀 수교까지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다나카는 과감하게 대만 문제를 정리하고 중국과의 수교를 단행한 것이다.

다나카는 경제정책 실패에 따른 물가앙등에다 문예춘추의 정치자금 비리 보도로 인해 중-일 수교 1년 4개월 뒤인 1974년 1월에 총리에서 물러났다.

다나카는 1976년 7월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전직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구속되었으며 1987년 실형이 확정되었다.

다나카의 이러한 정치적 몰락은 중국과의 수교에 있어 미국을 추월함으로써 미국의 세계전략에 타격을 가한데다 1973년 10월 4차 중동전 후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자 원유 도입선을 다변화 석유 메이저들의 이익을 침해한데 대한 응징이라는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 내 보수 세력이 연합했다는 이야기다.전광석화와 같았던 중일 수교와는 달리 중일 평화 우호 조약은 난산 의 진통을 거듭한 끝에 수교 6년 만인 1978년 8월 12일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일본 정치인들이 고속 중일수교의 후폭풍을 의식햇던 것도 한 요인이라 할 수 있겠다. 중일 우호 조약을 체결한 총리는 1972년 차기 총리 직을 놓고 겨뤘던 후쿠다다케오
[福田?夫]였다. 후쿠다는 다나카가 1974년 정치 자금 문제로 불명예 퇴임한 뒤 '클린 미키'라는 별명을 듣던 미키다케오(三木武夫)를 거쳐 1976년에 총리가 됏다.

중국은 중-일 수교 20주년이던1992년 뇌경색으로 실어증이 걸린 다나카를 초청, 환대함으로써 잇단 정치적 불우와 신병으로 인해 실의에 빠져있던 그를 감격케 하였다.

다나카는 2000년 아사히 신문이 ‘지난 1000년의 일본의 정치리더 독자인기투표’에서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4위로 뽑히기도 했다.

[今天歷史-7월7일] 두 명의 다나카와 蘆溝橋 사건


[今天歷史-8월12일] 중일 평화우호조약, 2차 영일동맹

1974년 = 중국 보하이(渤海)만 지구에 대규모 유전인 성리(勝利)유전의 건설을 완료함.

성리 유전은 1964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경제성이 있는 유전이 없는 지역으로 간주돼 온 화베이(華北) 지방에서 유전 건설에 성공함으로써 중국 석유 탐사와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1980년 5기 전인대 16차 상무위가 문화대혁명의 주역인 린뱌오(林彪), 장칭(江靑)일파를 반혁명 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 일파 주역 10명에 대해 공개재판을 실시한다고 결정했다.

이에 앞서 중공중앙은 린뱌오, 장칭 집단 재판 관련 통지에서 린뱌오, 장칭 반혁명집단에 대해 법에 따른 심판을 하는 것은 전당, 전군, 전 인민의 강렬한 희망이라고 말했다.

26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된 5기 전인대 상무위에서의 보고를 통해 최고인민검찰원 검찰장 황훠칭(黃火靑)은 기소된 10명의 주범은 장칭(江靑), 장춘차오(張春橋), 야오원위안(姚文元), 왕훙원(王洪文), 천보다(陳伯達), 황융성(黃永勝), 우파셴(吳法憲), 리쭤펑(李作鵬), 츄후이쭤(邱會作), 장텅자오(江騰蛟)이라고 밝혔다. 이미 사망한 이에 대해서는 기소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해 11월 20일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원이 개정되었으며 특별검찰청 청장 황훠칭은 린뱌오, 장칭 일파의 4대 죄상, 48개 죄행에 대한 기소장을 낭독했다.

2개월 5일간의 재판절차를 거쳐 1981년 1월 25일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10명의 피고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렸다.



◆선고법정의 4인방. 왼쪽부터 야오원위안, 장칭, 장춘차오, 왕훙원.


장칭, 장춘차오 사형(집행연기 2년) 정치권리 박탈 종신

야오원위안 징역 20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왕훙원 무기 징역 정치권리 박탈 종신

천보다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5년

황융성 징역 18년 정치권리 박탈 6년

우파셴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6년

리쭤펑 징역 17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츄쭤후이 징역 16년 정치권리 박탈 5년

장텅자오 징역 18년 정치권리박탈 5년


[今天歷史-10월 6일] 4인방 체포 2003/10/06 10:48

4인방 마지막 생존자 姚文元 구랍 23일 사망 2006/01/06 18:21

세계사 속의 오늘

돈키호테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탄생했고(1547)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사망했다(1902).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의원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1970), 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 간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 협상이 결렬되었다(1987).

문공부가 김지하의 담시 ‘오적(五賊)’의 게재를 문제 삼아 월간지 ‘사상계’의 등록을 취소했다(1970).

2018/09/29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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