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6 19:35



[今天歷史-9월30일] 리튼 보고서, ‘ 샤오핑 닌하오’

예젠잉 3차 국공합작 제의, 제임스 딘 사망, 한국과 소련 수교, kr 도메인 20만 개 돌파

1932년 9월 30일 = 국제연맹이 만주(滿洲)의 자치를 제안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를 일본정부에 전달했다.

리튼 조사단은 1932년 2월, 만주사변 처리에 대해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다. 중국 국민정부가 만주사변을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연맹규약 제15조에 따라 총회 개최를 요구하자, 일본은 조사단 파견을 제안했고, 1931년 12월 이사회에서 조사단 파견을 결정했다.

조사단은 영국의 V.A.G.R. 리튼을 단장으로 선임하고, 프랑스·미국·이탈리아·독일 등의 장군·외교관을 포함하여 모두 5명이었다. 1932년 3월 13일 상하이(上海)에 도착한 뒤, 6월 초순까지 상하이·난징(南京)·한커우(漢口)·베이징(北京) 등과 만주에서 조사를 마치고, 베이징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뒤 9월 30일 중국과 일본 양국 정부에 전달했다.

보고서는 이해 3월 1일 일본의 조종에 따라 건국을 선언한 '만주국'이 중국인의 자발적인 운동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만주를 중국주권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만주에 지방적 자치정부를 설치해 비무장지대로 할 것을 제안하고 만주에 관한 일본의 권익도 승인했다.

보고서는 10월 2일 공표되었다. 일본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리튼 보고서의 채택과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다는 내용의 19인 위원회의 보고서가 국제연맹총회에서 채택되자 일본은 19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1984년 = 10월 1일 중국 국경절 35 주년을 하루 앞두고 벌어진 경축행사의 하나인 각 단체의천안문 앞 행진에서 베이징(北京) 대학의 몇몇 학생들이 ‘小平您好'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나와 전국적인 반향과 국제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은 5 주년 단위로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루기 때문에 이해 경축 퍼레이드가 다른해보다 확대됐다..

‘샤오핑 안녕하세요’란 내용의 이 문귀는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우상화 기억이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최고 지도자에 대한 호칭으로서 ‘파격적’ 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버릇없는’ 행동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친근감을 더할 나위 없이 잘 표현했으며 덩샤오핑 등 당시 지도부도 자신들이 집권 이후 추진한 개혁개방에 대한 학생층의 만족과 지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플래카드를 작성한 학생들은 베이징 대학 81학번으로 생물학과에서 세포유전을 전공하던 궈칭빈(郭慶濱), 리위(李禹), 루안샤오펑(欒曉鋒) 등이었다. 이들은 국경절 행사를 하루 앞두고 당과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감정을 나타낼 문귀를 논의했다.

‘교육개혁이 필요하다(敎育要改革)’, ‘개혁은 가속화하여야한다(改革要加速)’라는 문귀등이 거론된 끝에 ‘덩샤오핑 만세(鄧小平萬歲)’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만세’라는 표현이 친근감을 주지 못하다는 의견에 따라 ‘덩샤오핑 동지 안녕하세요(鄧小平同志您好'

好!)’로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러나 찢어지기 쉬운 종이 대신 비닐 탁자보를 플래카드로 활용하면서 ‘小平您好'

font size=3>?好’라는 4글자로 압축되었다. 비닐 플래카드에 많은 글자를 쓰게 되면 눈에 뜨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이들 학생들은 천안문 앞 금수교(金水橋) 앞을 지나면서 “샤오핑 닌하오!”를 외치면서 플래카드를 치켜 올렸다. 궈칭빈 등 일행은 천안문 망루 위의 덩샤오핑이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이 사진은 행진이 있은 이틀 뒤인 10월 2일자 인민일보 2면에 게재되었고 이어 세계 각지로 전송되었다. 당시 덩의 나이는 만 80세였고 플래카드를 들고 나온 대학생들의 나이는 20세 전후였다.

문화대혁명 당시 젊은 세대에 의해 노인세대들이 곤욕을 치루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던 중국인들에게, 또 사진과 기록으로 이를 간접 목격했던 세계인들에게 이 사진은 ‘변화된 중국’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5년 뒤인 건국 40 주년을 맞은 해인 1989년 천안문 사태가 터지면서 덩샤오핑에 대한 학생들의 시각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이해 6월 4일 유혈진압을 전후하여 베이징대를 비롯한 각 대학가 기숙사에서는 ‘작은 빈병(小甁)’, 즉 ‘샤오핑’이 이 곳 저 곳에서 깨뜨지는 반정부 퍼포먼스가 줄을 이어 벌어졌다. ‘샤오핑 닌하오’가 ‘샤오핑 다다오(小平打倒)’로 바뀐 것이다.

이후 역사 속으로 묻혀졌던 이 문귀는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의 캐치프레이즈가 되면서 대중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덩샤오핑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고 각종 사진전, 또한 기념 웹 사이트의 제목에 ‘小平您好'

font size=3>?好’가 사용되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로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는 또 한 차례 갈등을 빚었고 그 갈등의 상처는 2018년 현재까지도 치유되고 있지 않고 있다. 중국인들은 덩샤오핑의 탄생 100주년이던 2004년 당시 다시 한 번 ‘샤오핑 안녕하세요’를 외쳤다(再一聲 ‘小平您好'

font size=3>?好)”. 20년 전과 같은 화해를 위해서였다.그러나 다시 불러낸뒤 1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러한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덩 탄생 110주년인2014년에는 주목할만한뚜렷한 정치 이벤트는 없었고 덩샤오핑 전기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덩샤오핑은 이제 '여전히 살아 있는 정치적 아이콘'에서벗어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반열의 '전설'이 된 것이다. 그것은그 역시 잊혀진다는 의미다.

1981년 =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예젠잉(葉劍英), 대만에 대해 제 3차 국공합작 평화통일 방안 제의.

세계사 속의 오늘

영화 ‘이유없는 반항’으로 젊은이의 우상으로 떠올랐던 미국 영화배우 제임스 딘이 24세의 젊은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으며(1955),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확대개편됐다(1961).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소련과 수교가 이루어졌고(1990), .kr 인터넷 도메인이 50만개를 돌파했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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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30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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