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1월16일]中 첫 주식회사 郭沫若, 클린턴 訪越

1987년 11월 16일 중국 공산정권 수립 후 최초의 주식회사 그룹인 중국 자링 공업주식회사그룹(中國嘉陵工業股份公司集團)이 충칭(重慶)에서 설립됐다.

자링 그룹은 군민(軍民)결합형 주식회사 기업으로 주식은 국유, 공유, 기업집체 소유와 직공 소유로 분산되었다.

재산권 관리위원회와 경영관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경영관리위원회의 민주결정 방식에 기초하여 총경리가 책임을 지고 회사를 운영하도록 하였다.

자링 집단은 설립 초기 자링 기기창(機器廠) 등 5개 기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전신은 7년 전에 세워진 ‘자링’ 표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회사들의 연합체이다. 7년 동안 이들 연합체가 생산한 오토바이 누계 대수는 85만 대로 중국 전체 생산의 50%를 차지하였다.

1892년 = 중국의 문학가·역사학자·정치가인 궈모뤄(郭沫若~1978.6.12)가 태어났다. 쓰촨(四川)성 르산(樂山)출신으로 본명 궈카이전(郭開貞)이다.

1914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1고등학교 예과(豫科), 제6고등학교를 거쳐 1918년 규슈(九州)제국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졸업 후 중국에 돌아와 신시(新詩)를 짓기 시작했고 상하이(上海)대학 등의 교수를 지냈다.

5·4운동 이후 사회혁명에 동조하면서 혁명문학을 제창하는 한편, 1926년에는 국민혁명의 근거지 광저우(光州)로 부임, 1927년 북벌혁명군에 참가하였다.

정치부에서 선전활동에 종사했으나 이해 4.12 쿠데타 전날 밤 장제스(蔣介石)를 비판, 지하로 잠적하고, 그 해 난창(南昌)봉기에 참가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난창 봉기 실패 후 1928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1937년까지 지바(千葉)현에 살면서 중국고대사·갑골금문(甲骨金文)을 연구하여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일본에 체재하는 동안 재일 청년과 중국내 문예계의 혁명문화활동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1930년 중국 국내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개시 직후에 귀국,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직접 지도 아래 국민당이 통치하고 있는 지구의 문화인사들을 조직하고 단결시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전 승리 후 문화계 내에서 반 장제스 활동을 주도하였다. 1948년에는 동북해방구(東北解放區)에 참가했으며 인민공화국 성립 무렵 무당파(無黨派) 민주인 민 대표 대회 당무위원 등을 지내며, 주로 문화·학술·국제교류 등의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1949년 8월 전국문련(全國文聯)의 초대 주석에 취임하였다. 공산정권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 겸 문화교육위원회 주임, 중국 과학원 원장, 중국과학원 청학사회과학부 주임, 역사연구소 제1소장, 중국과학기술대학 교장(총장), 중일우호협 명예회장을 역임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에는 격렬한 자기비판을 행하여 주목을 끌었다. 궈모뤄의 ㅇ이 같은 행동은 홍위병의 비판과 린치에 꼿꼿이 맞섰던 작가 라오서(老舍)와 대조된다.


[今天歷史-2월3일]낙타 상자의 작가 라오서(老舍)


문학작품으로는 시집 《여신(女神, 1921)》, 역사극 《왕소군(王昭君, 1925)》 《굴원(屈原, 1942)》 《채문희(蔡文姬, 1959)》 《측천무후(則天武后, 1960)》등이 있다. 이밖에 자서전 《유년시대(1928)》 《창조 10년(1931)》, 번역작품인 《파우스트》 등이 있다. 고고·역사학 저서로는 유물사관에 의한 중국초기 고대연구의 역작(力作) 《중국고대사회연구(1931)》와 30년대의 갑골금문연구서 《십비판서(十批判書)》 등이 알려져 있다.

특히 이자성(李自成)의 베이징(北京) 함락 300주년이 되는 1944년 발표된, 이자성의 성공과 몰락의 경과를 다룬 《갑신 3백년제(甲申三百年祭》는 마오쩌둥(毛澤東)이 ‘반면교사’의 텍스트로 중시하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갑신삼백년제는 1644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 이자성의 베이징(北京)입성과 몰락을 다룬 글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1944년 11월 21일 궈모뤄에게 편지를 보내 궈의 글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를 정풍(整風)문건으로 삼겠다고 했다.
마오는 그 글에서 “작은 승리는 교만에 빠지게 하고 큰 승리는 더욱더 교만에 사로잡히게 한다. 차츰차츰 잘못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잘못을 피할 수 있는지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국공 내전 승리 후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공산당 간부들에게 '이자성을 잊지말자'라고 강조햇다고 한다.

궈모뤄는 괄목한 학술적 업적을 이룩했으나 그보다는 어용 지식인의 전형으로 자주 언급 된다. 이는 문화대혁명 초기의 자아비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만에서 는 그를 권력자에 대한 아첨에 능한 어용문인으로 평가절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궈모뤄 형 지식인'이 적지 않았다. 일제 시기 일본 고문 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내던 중 광복을 맞이했던 한 인사는 참회하는 마음에 교직에 투신했다.그는 4·19 혁명 뒤 대학 교수로서 이승만 독재 하에서 침묵했던 자신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을 발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대학 총장까지 올랐던 이 인사는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 기간 중 유신 독재에 저항하지 못한 자신을 역시 처절한 어조로 비판하는 글을 발표 많은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인사는 5·18 신군부 쿠데타 후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권력을 추종하는 인사를 두고 '해바라기성(向日性)' 이라고 비나하는데 이 인사를 두고는 옥석 구분 없이 세력을 잡는 집단을 추종하는 '향세성(向勢性)' 인간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개겠다. 결과적으로 기회주의적 '상습 참회 지식인'으로서 전형적인 '궈모뤄형 지식인'이라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부인 힐러리 여사와 딸 첼시아와 함께 4일간의 베트남 방문을 위해 하노이에 도착했다(2000년).

1975년 베트남 전쟁이 종식된 뒤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기는 처음이었다. 클린턴의 베트남 방문에는 50개 대기업 대표와 경제무역관계 인사가 수행했다.


2018/11/1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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