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1월19일]周恩來 “南京 올 경우는...”, 孫立人

1946년 11월 19일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전국정치협상회의, 즉 정협(政協)에 참가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비행기 편으로 국민정부 수도 난징(南京)을 떠나 공산 세력 중심 본거지 옌안(延安)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西安事變) 을 계기로 성립된 2차 국공합작이 무너졌고 전면적인 국공 내전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공산당은 이 철수 조치는 국민당이정협 결의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헌법을 제정한 데 대한 항의라고 주장했다.

이 철수 조치로 국민당과 공산당의 타협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저우언라이는 난징에서 가진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자신들이 난징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했다.

그 하나는 국민당이 (정치적으로) 패퇴하여 다시 협상을 제의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을 ( 군사적으로) 패퇴시키고 입성하는 경우라고 말한 그는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저우언라이의 이 예언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다

이해 1월 10일 중국 내의 모든 정치 세력이 참가하여 개막한정치협상회의는 1945년 10월 10일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쌍십협정(雙十協定)’에 따른 것이다.

대일전 승리 후 첫 정치 협상 회의인 이 회의에는 국민당 대표 8명, 공산당 대표 7명, 청년당 대표 5인, 민주동맹 대표 9인. 기타 사회 지도급 인사 9인 등 모두 38명이 참석하였다. 회의는 정부개조, 평화건국강령안, 헌법초안 등의 사항을 논의했다.

정협회의는 국민당이 독재통치 및 내전정책을 중단하는 것이 인민민주주의에 의한 평화건국방침에 유리하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월 31일 회의가 폐막된 당일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정협회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정협의 결의를 부정한 이 같은 소란에 대해 장제스(蔣介石)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묵시적 동의였다

이후 장제스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장은 이 정협 결의를 공산당의 통일 전선 전술에 휘말린 또 하나의' 시안 사변'으로 간주하고 다시 한 번 '청당' 즉 '4·12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어 공산군 토벌, 다시 말해 제2의 '초공(剿共), 을 벌여야 하겟다고 결심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에 국민당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바람에 중국은 내전이 불가피하게 됐다.

중국 공산당은 정치적, 군사적 약세를동조 세력을 결집하는 통일전선전술로 돌파하여 국민당을 고립시켜 코너로 몰았고 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수적, 질적 우위의 국민당군 병력을 자신의 근거지로 끌어 들여 전력 분산과 함게 지리한 소모전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한 가지 빼 놓을 수 없는 사실은 2차 대전 기간 주적 일본을 군사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국민당군과 공산군모두와 협력했던 미국 민주당 정권은 마오쩌둥 지도 하의 공산 세력을토지개혁 세력으로 간주한 착시의 기초 위에서 국공 합작을 도모하였고 일는 결과적으로국공 내전의 발발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사이 동북 지역의 공산군은 국경을 접하고 있 고 또한 한반도 북부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으로부터 막대한 무기 지원을 받았고 이로써 만주로불리던 동북 지역에서의 국민당군의무기 측면에서의 압도적 우위는 흔들렸다.

만주 지역은 1928년 국민당의 북벌 완료 이후에도 위안스카이 북양 군벌의 한 갈래에 뿌리를 둔 장쉐량의 군벌이 실질적으로반독립적 지배를 유지햇고 1931년만주 사변을 거쳐 1932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이었다. 1945년 이후에도 상당 기간 소련군이 진주, 점령했엇다.

이런 사실에서 보듯만주는 국민 정부의 정치, 경제 그리고 사회적 지배 권 밖에 놓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 절대적 우위가 무너졌으니 전쟁이 장기화할 숳록 국민당군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국공 내전 패배는 장제스의정치적 군사적 전략 실패, 미국구의 초기대응실패 그리고 소련의 적극적 군사 지원에 공산당 지도부의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이 맞물려 이루어졌다.

트루먼 행정부의중국 내전 초기에서의 판단과 대응 실패가 반면 교사가 되어 한국전 발발 후 신속한 초기 대응을 가져와 중국의 완전한 공산 통일을이루지 못하게 하였고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을 보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계 공산주의 세력은 중국공산화에있어 대만굲사적점령의 호기를 놓쳐 화룡정점을 찍지 못햇고 해양 자볹주의 세력은 한반도에서 자유주의 교두보를 기적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중국의 불완전한 통일과 한반도의 분단 장기화라는견고한 비정상 상태를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0년 항일전쟁 당시 국민정부군의 명장이었던 쑨리런(孫立人)이 대만에서 사망했다. 1900년생으로 향년 90세.

안후이(安徽)성 루장(廬江) 출신으로 칭화(淸華)대학을 나왔으며 미국에 유학, 퍼듀 대학 토목공학 학과를 마친 뒤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버지니아 군사학교는 '웨스트 포인트'로 별칭되는 미국 국립 육군 사관학교와 비견되는 사관 생도를 전문적으로육성하는 학교로 웨스트포인트가 여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것과는달리 버지니아 주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 조지 마셜 이 버지니아 굲사학교출신이며 조지 패튼 은 웨스트포인트로 옮기기전에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다닌적이있다).

일본 군사학교 유학생 출신인 장제스(蔣介石)과 미국 사관학교 유학생 출신인 쑨리런의 불화는 국공내전 패배의 한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국공 내전 초기 미국 군사 고문 웨드마이어 장군은 공산군의 주력을 소련과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동북 지방과 공산 해방 지역에 묵어두눈 봉쇄 작전을 권고 햇는데 장제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옌안과 동북지역 주요 도시들로 깊숙이 진격하는 결과적으로 적의 전술에 말려드는 전략을 선택했다.

쑨리런은 공산진영의 린뱌오(林彪)처럼 일본군과의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보기 드문 국민정부의 장군이다. 특히 1942년 버마 전선으로 진출한 뒤 인도까지 후퇴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했다.

미국 중국 방면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으로부터 국민당 장군 중 최고라는 찬사를 들었으며 ‘동양의 롬멜’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국공내전 당시 양 진영을 대표하는 맹장이었던 쑨리런과 린뱌오(林彪)는 동북(東北)지방에서 1946년과 1947년 초에 여러차례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쑨이 밀렸다.

최고지도자와의 불화 역시 린뱌오와 마찬가지였다. 동북 지방에서의 패전 이후 장제스의 신임을 잃은 그는 내전의 최전선에서 밀려난 채 한직을 전전했다.

버마 전선을 거치며 그가 발전시켰으며 '천하제일군'이라는 명성을 누렸던 '신일군(新一軍)'이 린뱌오 군에 의해 1948년 10월 전멸되는 것도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대만에 옮겨온 뒤 쑨리런은 대만 방위사령관, 육군총사령관 겸 보안사령관으로 중용되기도 하였으나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와 불화를 빚었다.

장제스부자는 항일 전 당시 심각한 불화를 겪었던 스틸웰 장군과 가까운 쑨을 결정적 순간에 등을 찌를 수 있는 '제2의 장쉐량'으로 극도로 경계했다.
결국 1955년 10월 31일 쿠데타 모의 연루 혐의로 총통부 참군장(參軍將)직에서 해임된 뒤 타이중(台中)에 연금됐다. 쑨리런이 복권되어 자유를 얻은 것은 장징궈가 사망한 2개월 뒤인 1988년 3월이었다.


◆ 버마 전선에서의 전리품 코끼리와 함께한 쑨리런.


◆ 창춘에서 린뱌오군과 싸울 당시의 쑨리런.


◆ 1948년 신일군(新一軍)' 사령관 직에서 물러나면서 마지막으로 사열을 하고 있는 쑨리런


◆ 유럽 방문 시 패튼 장군과 함께 포즈를 취한 쑨리런.


2018/11/19 03:46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