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1 04:03



[今天歷史-11월21일] 中, 印 침공군 철수,李自成 반면교사론,探喪

대만 양안 전담 기구 '해협 교류 기금회' 발족, 베이징 기생집 전면 폐쇄
1962년 11월 21일 = 중국이 인도와의 정전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중국은 2개월 전인 이해 10월 20일 인도와 분쟁을 빚고 있는 동부, 중부, 서부 국경 지역 중 동부와 서부 양 측면에서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중국군은 인도군을 패퇴시킨 뒤 이
날 12월 21일을 기해 1959년 11월 7일 중국과 인도 쌍방 간에 합의한 실제 통제선 후방 20km 지점까지 철수한다고 밝히며 일방적으로 정전을 선언했다.

인도와의 국경분쟁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것이었으나 1959년 3월 제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에 망명하여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수립한 것을 계기로 양국 간에 첨예한 긴장이 조성된 끝에 무장충돌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군은 인도군으로부터 노획한 탄약과 기타 군용물자를 인도군에 돌려주고 인도군 포로를 전부 석방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일방 종전선언 44주년을 하루 앞둔 2006년 11월 20일 인도를 방문했다.

1944년 = 마오쩌둥(毛澤東)이 궈모뤄(郭沫若)에게 편지를 보내 궈의 글 ‘갑신삼백년제(甲申三百年祭)’를 정풍(整風)문건으로 삼겠다고 했다.

‘갑신삼백년제’는 1644년 농민 반란군의 지도자 이자성(李自成)의 베이징(北京)입성과 몰락을 다룬 글이다.

마오는 그 글에서 “작은 승리는 교만에 빠지게 하고 큰 승리는 더욱더 교만에 사로잡히게 한다. 차츰차츰 잘못에 빠져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잘못을 피할 수 있는지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이어 태평천국의 경험을 다룬 글을 써 볼 것을 권유했다. 그는 “잘못과 결점을 보게 되면 수시로 알려주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

실패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으려는 마오의 이러한 자세는 차기 지도부에 면면히 이어지면서 공산 중국이 오늘까지 존속할 수 있는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식인을 존중하고 또 이들의 견해를 경청하는 마오쩌둥의 자세는 문화대혁명 당시의 그와는 사뭇 다르다.

1944년의 마오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직전의 다윗이었다면 말년의 마오는 왕이 된 다윗이었다.
궈모로도 1944년 에는 역사를 비추어 미래의 길을 찾는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면 20년 뒤엔 최고 권력과 현실 권력화한 대중에 아첨하는 곡학아세의 지식인으로 전락햇다.



추억...李自成과 鄧世昌 동상
2010/10/16 15:46


1988년 =중국 상하이(上海) 시민 쉬쑹린(許松林)이 처음으로 대만여행증(入台旅行證)을 발급받아 대만으로 가 부친의 장례에 참석하였다.

1950년 헤어진 부친이 대만 지룽(基隆)시에서 1988년 9월에 사망하자 쉬쑹린과 대만의 그의 친척들은 그를 발인에 참여시키려 하였으나 대만 당국의 불허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병문안을 위해 대만을 일시 방문했던 중국인이 병문안을 받던 당사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장례까지 참석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쉬쑹린의 대만 내 친척들은 다시 대만 당국에 호소, 마침내 대만여행증을 얻을 수 있었다. 상하이 당국은 하루 만에 모든 수속을 끝내 쉬링린이 빨리 대만을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1990년 11월 21일 = 양안관계를 전담하는 대만의 반관영 단체인 ‘해협교류기금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2018/11/21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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