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1월22일] 林則徐, 뤼순 함락, 段祺瑞

케네디 암살, 김영삼 서거

1850년 11월 22일 아편 전쟁( 1840~1842)발발의 원인을 제공한 임칙서(林則徐)가 세상을 떠났다. 1785년 생으로 향년 65세.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 출신인 임칙서는 도광제(道光帝)의 중용을 받아 강소(江蘇)순무와 호광(湖廣)총독에 임명된 뒤 1839년 3월 광저우(廣州)에 와 전례 없이 강력한 아편단속을 벌인다.

그는 영국 등 외국 상인들로부터 230여만 근의 아편을 압수, 후먼(虎門)해안에서 불태워 버렸다.

이처럼 아편에 관한 강경한 정책을 썼지만 그는 결코 맹목적인 반 외세 수구주의자가 아니었다.

'지피지기(知彼知己)'의 시각에서 서방의 사정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외국의 지리서(地理書), 법률서, 신문 등을 번역하도록 했고, 직접 '사주지(四州志)' '각국율령(各國律令)'을 편집했으며, 정당한 무역은 보호하면서 외국의 근대병기를 구입하여 방위력 증강을 도모했다.

또 어민과 수상생활자로 해상의용군을 조직했다. 1840년 양강총독(兩江總督)에 임명된 뒤 곧 아편전쟁이 시작되었는데, 북진하는 영국군을 눈앞에 두고 조정에서 화평론이 득세하자 전쟁도발자로 몰려 파면당했다.

1841년 신강(新疆)성 이리에 유배되었고, 3년 후 섬서(陝西)순무, 운귀(雲貴) 총독 등으로 재 등용되었다. 1850년 광서(廣西)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흠차대신으로 현지에 부임하던 도중 병사했는데 아편상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는 민족의 존엄성을 지키려던 애국자일뿐만 아니라 서방학습이라는 새로운 기풍을 일으킨 중국 유신(維新)사상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

1894년 =일본군에 의해 뤼순(旅順)항이 함락됐다. 중국이 갑오(甲午) 전쟁으로 부르는 청일전쟁( 1894~1895)의 주요 전투 중의 하나이다. 뤼순은 이홍장(李鴻章)의 북양군벌의 해군기지가 있던 곳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이홍장이 육성해오던 북양 함대를 궤멸시켰다. 해군력을 상실한 중국은 일본이 1945년 패퇴할 때까지 수세적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첫 항공모함을 띄우고 남중국해에 대한 패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다시 66년을 기다려야 했다. 2011년에 와서 중국은 항공모함의 시험 운항을 하고 남중국해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를 할양받았지만 러시아가 주동이 된 삼국간섭으로 청나라에 돌려 주어여 했다. 일본이 함락한 뤼순은 러시아에 넘어갔고 러시아는 이곳을 ‘포트 아서({Pott Arthur)’란 해군 기지를 건설했다.청일전쟁 10년 뒤인 1904년 뤼순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고 또다시 일본에 의해 함락됐다. 이 두 번째의 뤼순 함락(1905년 1월 2일 러시아군 항복)과 대한 해협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 격파( 1905년 5월 27일)를 계기로 일본은 아시아의 패권 국가가 되었다.

중국 첫 항모의 이름은 뤼순 항이 소재한성(省)에서 따 온 '랴오닝'이었다. 중국은 구 소련이 제작하다 소련 해체로 중단한 '바랴그'호를인수, 개조하여 랴오닝 호를 만들었다. '바랴그
'란 이름은 러일전쟁 초 인천 항에 정박해 있다 일본 함대의 기습을 받고 자침한 러시아 군함의 이름과 같다. 중국은 물론소련도 해군력 건설 과정에서 과거의 치욕을 상기하고 있음을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1917년 =돤치루이(段祺瑞 : 단기서)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펑궈장(馮國璋) 총통의 인물인 왕다셰(汪大燮)가 대리총리에 임명되었다.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사망으로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자 베이징(北京)정부는 지역적 기반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군벌의 합종연형으로 하루아침에 지도자가 바뀌는 일이 빈번했는데 돤치루이의 총리사임도 그 중 한 사례였다. 돤치루이는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1916년부터 장제스(蔣介石)의 북벌이 완료된 1928년까지의 군벌 시대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돤치루이 외에 우페이푸(吳佩孚), 장쭤린(張作霖), 펑위상(馮玉祥)이 무력을 기반으로 베이징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던 주요 군벌들이다.

남쪽에 근거지를 둔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청조 말기에 군인으로 입신한 이들 군벌들을 제압하고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군벌 분열 시대를 끝내고 통일 시대를 열었다.

그 경과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후 부총통이었던 리위안훙(黎元洪)이 중화민국의 제2대 총통이 되었지만 국무총리 돤치루이와 갈등을 빚어, 정국은 불안하였다.

후베이(湖北)성 출신인 리위안훙은 신해(辛亥)혁명 때 혁명군에 의하여 악군도독(鄂軍都督)에 선출된 인물이었다. 반면 돤치루이는 북양군벌(北洋軍閥)의 원조인 이홍장(李鴻章)과 마찬가지로 안후이(安徽)성 출신으로 위안스카이의 심복이었다. 또한 그는 안푸(安福 : 안후이와 푸젠성)군벌의 지도자였다.

이처럼 지역기반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총통과 총리가 갈등을 빚는 틈을 타 여전히 청조(淸朝)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있던 안후이독군(安徽督軍) 장쉰(張勛)에 의해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溥儀)를 옹립하여 청조의 재건을 꾀하는 복벽(復辟)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복벽 해프닝에는 변법운동을 주도하였던 캉유웨이(康有爲)가 참여하였다.

이 복벽 해프닝 뒤 돤치루이, 왕스전(汪士珍)과 함께 위안스카이 휘하에서 ‘베이징3걸(北京三傑)’의 한 사람으로 불리우던 펑궈장(馮國璋)이 대리 총통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후 돤치루이의 독주에 펑궈장이 제동을 걸면서 다시 총통과 총리간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돤치루이는 일본의 지지 아래 무력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1917년 9월 광저우(廣州)호법군(護法軍)이 북벌을 개시하자 돤치루이 정부는 후난(湖南)에 군대를 파견, 남북군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펑궈장은 이해 10월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베이징 주변을 지역기반으로 한 직예(直隸)군에게 후난으로부터의 철수를 지시, 이를 성사시켰다. 결국 이러한 와중에서 돤치루이는 총리 직에서 사임한 것이다.

펑궈장은 1919년에 사망하였고 돤치루이는 1924년 임시 집정에 취임, 다시 권력을 장악하여 1926년 3.18 사건 당시 학생운동을 탄압하는 등 반동적 정책을 추진하다 1928년 북벌완료와 함께 세력을 잃고 1936년 상하이(上海)에서 사망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서 암살당하였다(1963). 1917년생으로 향년 46세였다. 공
교롭게도 암살당한 박정희 대통령도 1917년생이다. 케네디 대통령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그로부터 16년 뒤인 1979년10월 26일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

케네디가 비명에 간 지54년 뒤인 오늘까지 그 배후가 여전히 밝혀지고 있지 않다. 배후로 미 중앙정보국(CIA), 마피아와 쿠바 등이 거론되었으나 진상은 여전히 미궁이다.

이런 가운데 2006년에는 피델 카스트로를 지목하는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책에서 부통령으로 있다 케네디의 뒤를 승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오스왈드가 쿠바를 다녀왔다는 보고를 묵살했다는 알렉산더 헤이그 전 국무장관의 증언이 담겨있다.

당시 존슨은 쿠바와의 전쟁을 우려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2013년 7월 호주에서는 케네디를 절명케 한 총탄이 케네디 탑승차 바로 뒤를 따르던차량에 타고 있던 경호원이 쏜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책이 출간되기도 햇다.
.오스왈드의 저격을 계기로 혼란이 벌어진 상황에서 또 다른 음모세력이 케네디를 암살한 것일 수도 있고 경호원의 대응 경고 사격이 오발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오스왈드와 경호원이 동일한 음모 세력에 의해 역할 분담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케네디는 사후 그 비극적 최후로 인해 미국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 장기간에 걸쳐 역대 대통령 중 최고 지지를 밪는 대통령으로 오르기도 햇다.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난 지금은 링컨, 레이건 그리고 클린턴에 이어 4 번째로 밀려나 잇다. 그러나 카터, 클린턴과 오바마 대통령 등 공화당 집권을 종식시킨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케네디 계승을 내세우며공화당 후보를 물리쳤을 정도로 미국 정치에서 케네디의 영향은 여전히 지속되고 잇다.

2013년 케네디 사망 50주년을 앞두고 오바마 행정부는 주일 대사로 케네디의 딸 캐롤라인 케네디를 임명햇다. 그녀가 일본 국왕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가는 길가에 많은 일본 시민 이 몰려 나와 지켜 봤을정도로 케네디에 대한 관심은 아직도 전세계적으로도 식지 않고 잇다.

케네디가 암살당하기 20일 전인 1963년 11월 2일 남부 베트남의 대통령 응오 딘 지엠(吳廷琰)(과거 ‘고 딘 디엠’으로 불렸다)가 돈 반 민 ('두옹 반 민'으로 불렸음)장군이 주도한 쿠데타 과정에서 암살됐다. 이 쿠데타는 미국 CIA 조종을 받은 것이었다. 응오 딘 지엠 정권은 독재와 부패, 족벌 정치를 펼쳤으나 미국의 간섭 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자세가 그의 몰락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조종 아래 쿠데타를 일으키고 응오 딘 지엠 형제를 암살한 돈 반 민 장군은 12년 뒤인 1975년 남부 베트남 임시 대통령으로서 북에서 밀고 니려 온 북 베트남군에 항복했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한국의 정치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기여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별세했다(2015). 1927년 12월 20일 경상남도 거제도 출생으로 생으로 향연 88세.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1993~1998을 역임했으며 재임 중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햇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햇다. 또한 전두환, 노태우 군부 출신 대통령을 군사 반란죄와 부패 혐의로 구속, 법의 심판을 받게 했다. 이와함께 일제 침략의 상징인 조선 총독부 청사를 철거햇다.

그러나 국제 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요청하지않을 수 없는 금융 위기를 초래하여 외세에 의한 경제 구조 개편을 당하게 만드는 치명적 과오를 범했다.

김영삼의 정치적 모델은 존 F 케네디엿고 그의 40대 기수론은 케네디의 영향을 받은 것이엇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놓은 이 슬로건은 장로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지못햇던 야당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야당 신민당의 당수인 유진산으로부터 '구상유취(口尙乳臭)', 즉 젖비린내 난다라는 냉소적 비판을 받았으나 김영삼의 슬로건은 야당 정치 판도에 쓰나미가 되었다.

결국 71년도 야당 대통령 선거 전은 각각 경남, 전남 그리고 전북을 지역 기반으로 한 40대의 젊은 야당 지도자 김영삼, 김대중 그리고 이철승의3파전이 되엇다. 그러나 승자는 기수론의 기수 김영삼이 아니라 김대중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에 선출되기는 1997년 김영삼이 김대중을 앞섯다. 김대중ㅜ은 1997년 김영삼 뒤를 이어 대통령에 선출됐다.

김영삼은 그의 정치 롤 모데델 케네디 52 주기 날에 세상을 떠났다.

2018/11/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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