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1월24일] 韓 臺北대표부 개설,興中會 劉少奇

유엔 헌장 발효, 미군 필리핀 수비크灣서 철수

1993년 11월24일 한국이 타이베이(臺北)대표부 초대 대표 한철수(韓哲洙) 씨가 부임했다. 25일에 타이베이 대표부가 정식으로 설치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수교(1992년 8월 24일)로 대만 대사관이 폐쇄된 이후 1년 3개월 만의 일이었다.

1894년 = 손문(孫文)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창설했다. 이때 손문의 나이 28세였다.

흥중회는 국민당의 모태이다. 흥중회는 , “만주의 적(賊)을 제거하고, 중화(中華)를 회복하여, 합주정부(合衆政府)를 창립한다.”라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는 아편전쟁(1840 ~ 1842)과 태평천국의 난(1850 ~ 1864)을 계기로 청(淸)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한족(漢族) 관료들이 추진했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과 전혀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양무운동과 변법자강운동이 정복왕조인 소수 민족 만주족의 청조를 인정한 가운데 중국을 부강케 하려는 개혁운동이라고 한다면 흥중회가 추구하는 바는 민족주의 혁명이었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의 미래에 대해 갖가지 비전이 제시되었는데 모두 외국 사조의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태평천국의 난에는 기독교 영향이, 양무운동에는 부국강병주의가 그리고 변법자강 운동은 일본의 명치유신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흥중회에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민혁명의 영향이 공산당에는 러시아 볼셰비즘 혁명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었다.

흥중회는 화흥회(華興會) ·광복회(光復會) 등의 혁명단체와 합병하여, 1905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로 발전하였고 손문이 동맹회의 지도자인 총리를 맡았다.

중국혁명동맹회는 민족(民族)주의, 민권(民權)주의와 민생(民生)주의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강령으로 하고, ‘청의 타도, 중화 회복, 민국 창립, 지권(地權) 평균’을 주장하였다.

동맹회는 신해혁명 다음 해인 1912년에 수천년 동안 지속되온 제정(帝政)을 쓰러뜨리고 공화정(共和政)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하자. 비밀결사에서 공개적 정당으로 개편됐다.

당시 명칭이 바로 국민당(國民黨)으로 현재 대만의 집권당 국민당은 이의 후신이다.

국민당은 1913년 2월에 치러진 중화민국 수립 후 첫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나 손문의 양보로 중화민국 총통이 된 북양(北洋)군벌 지도자 위안스카이(袁世凱)의 탄압을 받아 강제 해산됐다.

손문은 1914년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을 조직하였다., 1919년 ‘5 ·4운동’의 영향으로 본부를 도쿄에서 상하이(上海)로 옮겨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이라 개칭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국민당의 창당은 바로 이때다

국민당은 민족주의적 국민정당이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조직 면에서 소련 공산당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1924년에 소련의 영향 아래 있던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1921년 창당한 중국 공산당과 1차 국공합작을 하였던 국민당은 1927년 공산당과 합작을 폐기하고 다음해인 1928년에는 북벌을 통해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수도 베이징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발호하던 군벌을 제압하고 국가 통일을 이룩했다.

국민당은 1949년 국공내전 패배로 대만으로 쫓겨갈 때까지 중국의 집권당이었다.

국민당은 대만에 있으면서도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대륙 철수 이전의 구조를 유지해왔으나 1988년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사망한 이후 국민당의 대만화 개혁이 이루어져 대만의 정당으로 축소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1988년 이후부터는 국민당은 중국 국민당이 아닌 대만 국민당이라고 불러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대만 철수 이후 줄곧 대만지역의 집권당이었던 국민당은 2000년 대만 독립을 추구하는 민진당에게 총통 선거에서 패배, 2008년까지 야당으로 지내야 햇다. 2008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 다시 집권당이 되었고 2012년 총통 선거에서도 승리, 집권당의위치를 유지했다.

그러나 2016년 1월 치러진 총통 선거와 총선에서 민진당에게 참패 정권을 내놓아야 했다.

국민당은 삼민주의를 정치 강령으로 삼고 있으며 입법, 행정, 사법권 외에 고시(考試)권과 감찰(監察)권을 추가하여 5권 분립 정치체제를 지향한다.

삼민주의와 5권 분립은 국민당이 북벌을 통해 불완전한 중국 통일을 이룩한 1928년 이후 1949년 공산 정권이 수립 될 때까지 중국 대륙을 통치한 국민당 을 집권당으로 한 정부인 중화민국의 이이념과 정치채제의 기본 틀이기도 햇다.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쫓겨온 이후에도 삼민주의와 5권 분립은 대만 지역을 지배한 중화민국의 국가 정치 이념과 정치 체제의 틀로 존속되었으며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의 1기 집권 기간( 2000년 ~ 2008년) 시기에도 변화하지 않았고 2016년 2기 집권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바뀌지 않고 있다.

1945년 = 유엔 헌장이 50개국의 서명으로 발효되었다. 이 서명국 중에는 국민당의 중국, 즉 중화민국도 포함되었다.

1898년 = 마오쩌둥(毛澤東)이 발동한 문화대혁명의 최대 피해자인 류샤오치(
劉少奇)가 태어났다. 그는 끝내 1인자에 오르지 못한 실패한 2인자이자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불행한 정치가이다. 그러나 그는 마오와의 노선 투쟁에서 생전에는 완패했으나 사후에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완승을 한 성공한 이데올로그다.

그는 이 같은 이유로 인해 덩샤오핑(鄧小平)을 제외하면, 마오와 저우언라이(周恩來) 다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의 옛 지도자이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핍박 와중에서 71회 생일을 12일 앞둔 1968년 11월 12일 사망했다.

중국 공산당은 현재 그를 ‘걸출한 혁명가, 정치가와 이론가, 그리고 중국 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영도자의 한 사람’으로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후난(湖南)성 닝샹(寧鄕) 출신에 창사(長沙)제1사범을 나온 그는 마오쩌둥과 동향에다 동창이다.

1920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였으며 1921년 모스크바 동방(東方)공산주의 노동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공산당에 가입했다.

류샤오치는 지하공작의 전문가였다.

그는 허베이(河北), 상하이(上海)와 동북(東北) 지방에서 지하 활동을 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도 일본군의 후방에서 유격활동을 지휘했다.

1941년 국민당 군이 공산당의 신사군(新四軍)을 공격하는 환남(皖南)사건으로 신사군이 와해되자 신사군의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어 천이(陳毅)와 함께 신사군을 재건했다.

또한 그는 이론가였다.

1939년부터 1941년 사이에 ‘공산당의 수양에 관해 논함(論共産黨的修養)’이라는 유명한 강연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의 독자의 이론체계 수립에 기여하였다.

마오쩌둥 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맞게 창조, 발전시킨 것이라는 마오. 사상에 대한 개념 규정 역시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1959년 제2기 전인대 1차회의에서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으며 1960년대 초기 중국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 많은 연구와 조사를 통해 훗날 덩샤오핑이 발전시킨 개혁 조치로 경제를 회복시켰다.

그는 1963년부터 1966년 사이 인도네시아, 버마, 캄보디아, 북베트남, 북한, 파키스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등을 우호방문, 중국을 외교적 고립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950년 = 공산 중국의 유슈취안(伍修權) 대표가 유엔 안보리에 출석, 미국의 대만 및 한국전 개입을 비난하였다. 당시는 국공내전에서 패배, 대만으로 쫓겨 간 국민정부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어 11월 28일 두 번째로 유엔 안보리에 출석한 우슈취안은 역시 미국의 군사행동을 비난했는데 중국의 영토에 대한 위협에 비난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는 미국이 대만을 침략하고 동북(東北) 국경지역에서 미 공군 전투기가 기총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우는 인민해방군의 북한군 지원이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강조했으며 ‘대만지위 미정론(未定論)'을 반박하고 대만은 중국의 분할할 수 없는 일부분이라는 주장을 폈다.

우슈취안은 공산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유엔 안보리에 다음과 같은 3개항을 제출했다.

1) 유엔 안보리는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력침략과 북한에 대한 무장간섭의 죄상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제재를 가하여야 한다.

2) 유엔 안보리는 미국이 대만에서 무장역량을 철수하도록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여 태평양과 아시아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여야 한다.

3) 유엔 안보리는 미국 및 기타 외국 군대가 모두 한반도(조선반도)로부터 철수하고 한반도의 내정을 한국인민 스스로 평화적으로 처리하도록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세계사 속의 오늘

최후의 필리핀 주둔 미군이 수비크만에서 철수했다(1992).

베트남 전 패배 후 필리핀 수비크만 철수를 통해 동남아를 완전히 떠났던 미군은 20년만 에다시 돌아 오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11월 16일 호주 캔버라에서 2012년 중반까지 200명~250명의 해병을 6개월 단위로 호주 북북 다위 기지 등에 배치하여 호주군과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오바마는 최종적으로 호주에 주둔할 미군의 수는 2500명이라고 덧붙였다.

다윈 기지는 1942년 필리핀에서 일본군에게 패퇴한 뒤 잠수정을 이용 이곳으로 탈출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가 “나는 돌아간다(I shall return)."이라고 말했던 곳이다.

다윈 기지는 바로 동남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2018/11/24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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