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1 04:03



[今天歷史-11월25일] 胡耀邦 방일, 毛岸英 巴金 孫傳芳

1983년 11월 25일 중일 양국정부는 후야오방(胡耀邦) 총서기의 일본 방문을 계기로 중일 관계 3원칙을 4원칙으로 확대하였다.

이 4원칙은 평화우호(和平友好), 평등호리(平等互利), 상호신뢰(相互信賴)와 장기안정(長期穩定)이었다. 이와 함께 양국은 ‘중일우호21세기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이같은 합의는 우쉐첸(吳學謙) 중국 외교부장과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郞) 일본 외상과의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아베 신타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총리의 부친이다.

양국 외무장관 회담 후 치화이위안(齊懷遠) 외교부 신문사장은 합의가 이루어지게 된 경과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82년 일본을 방문한 자오쯔양(趙紫陽) 총리는 일본에 중일 관계 3원칙을 제의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일본 총리는 11월 24일 후야오방 총서기와의 회담에서 자오쯔양이 제안했던 3개 원칙에 ‘상호신뢰’라는 원칙을 추가하자고 제의했고 후 총서기는 이에 동의했다.

이같은 양국 수뇌의 의견일치를 바탕으로 외무장관이 회
담을 갖고 4원칙을 합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중일우호 21세기 위원회’ 역시 나카소네가 제의, 후가 이에 동의함으로써 발족하게 되었다."

1950년 =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이 미군기의 폭격으로 한국전선에서 사망했다. 1922년생으로 28세였다. 그의 모친이 29세 때 국민당군에 의해 처형으로 생을 마감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불행한 죽음이 모자유전인 셈이다.

마오를 부친으로 둔 안잉의 짧은 생애는 파란만장하다는 표현, 그자체이다.

8살 때 모친 양카이후이(楊開慧)와 함께 감옥에 들어간 그는 모친이 처형된 후 감옥에서 풀려난다.

안잉과 안칭(岸靑), 안룽(岸龍) 등 3형제는 공산당 지하당 조직에 의해 상하이(上海)로 옮겨졌으나 지하당 조직이 와해되면서 이들 3형제는 상하이 거리를 떠돌게 되었다. 이리저리 떠도는 도중에 막냇동생 안룽은 실종되고 만다.
그는 끝내 찾지 못했다.

두 형제는 상하이에서 신문팔이, 폐품수집, 담배꽁초 줍기, 그리고 인력거 밀기 등을 하며 살아나갔다.

마오안잉은 부친을 닮아서인지 어려서부터 학구열이 높았다. 소학교용 사전을 사기 위해 3개월 동안 아침밥을 굶고 돈을 모아 끝내 그 책을 사고야 말았다.

1936년 공산당 지하당은 이들 형제를 찾아내 안잉을 소련으로 유학을 보냈다. 소련에서 군사학교를 나온 안잉은 독소전쟁 발발 후 소련 탱크 부대의 당대표가 되었으며 중위 계급을 부여받았다.

소련군을 따라 폴란드 등 동구 국가들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46년 그가 귀국할 때 스탈린은 그를 접견하고 독소 전쟁 당시 그의 공에 대한 상으로 권총을 주었다고 한다.

귀국 뒤 마오쩌둥은 중국 농촌을 이해해야 한다며 그를 농촌으로 보냈다. 국공내전 때에는 지휘부의 진주에 앞서 지뢰 제거 등의 임무에 종사했으며 베이징(北京)에도 지도부의 입성에 앞서 선발대와 함께 들어갔다.


1949년 4월 부친 마오쩌둥과 기념사진을 찍은 마오안
잉. 여자아이는 마오가 장칭과(江淸)과의 사이에서 낳은
리너(李訥)이다.



마오쩌둥이 아오안잉과 샹산(香山)의 쌍청별서(雙淸
別墅)에서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49년에 찍은
사진이다


한국전쟁 발발 후 안잉은 참전을 희망했으며 마오는 그를 총사령관인 펑더화이(彭德懷)에게 맡겼다. 펑더화이 밑에서 번역과 참모 역할을 수행하던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하여 한국전에 개입한지 불과 한달여 만의 일이다.우리 츳은 중공군의 압록강 도하 시점을 10월 19일로 잡고 있으나 중국 측은 10월 25일을 참전일로 기리고 잇다.

그의 유해는 중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사망한 지점 인근에 묻혔다. 북한은 그가 묻힌 평안남도 회창(檜倉)을 중국지원군 열사능으로 조성했으며 이곳은 현재 북중간 전통적 우호관계를 환기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마오안잉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방북 중 군사위부주석 郭伯雄, 毛岸英 묘 참배 2010/10/25 12:05

마오안잉이 만일 한국전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중국에서도 후계 세습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마오안잉 자체가 능력이 출중했으며 마오 역시 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당, 정, 군의 핵심 분야에서 경력을 쌓게 했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 마오안칭은 조금 모자란 편이었기 때문에 마오는 마오안잉 사망 후 권력을 세습하려는 생각을 일찌감치 거두었다고 한다.

중화권 국가에서는 장제스(蔣介石)와 리콴유(李光耀)가 공산권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을 부자세습했다.

1904년 = 중국의 소설가, 번역가 바진(巴金, ~2005.사진)이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태어났다.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이 본적인 바진의 본명은 리야오탕(李堯棠)이다.

필명 ‘바진(巴金)’을 두고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이며 작가인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 1814-1876)과 러시아의 생물학자이며 무정부주의 이론가인 크로포트킨(Pyotr A. Kropotkin, 1842~1921)의 중국어 표기인 巴枯寧과 克魯泡特金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따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 하나다.

다른 한 설명은 그의 파리 유학 시절 크로포트킨이 죽은 곳에서 자살한 동료 유학생 바언보(巴恩波)를 기리기 위해 바언보와 크로포트킨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1920년 청두 외국어학교에 입학, ‘균사(均社)’를 조직하고 ‘평민의 소리(平民之聲)’를 편집했다. 1923년 이후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서 공부를 했으며 1926년 베이징(北京)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였으나 병으로 단념하였다. 이때 루쉰(魯迅)의 작품을 읽고 문학에 눈을 떴다.

1927년 1년 동안 파리에 유학, 무정부주의자와 교류를 가졌다. 이 기간에 첫 작품인 중편 ‘멸망’을 집필하였는데, 무정부주의자인 청년의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 이 작품으로 인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귀국 후 생가(生家)를 모델로 한 ‘가(家, 1931)’를 발표하였는데, 새 시대의 물결 속에서 붕괴해가는 봉건적 대가(大家)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작품으로서 봉건적 질곡 하에 있던 당시의 청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36년 11월 루쉰, 궈모뤄(郭沫若) 등 21명과 함께 ‘문예계 언론 자유선언’을 발표하였으며 항일전쟁 폭발 후 상하이에서 ‘구망일보(救亡日報)’의 편집위원, 중화전국문예계 항적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며 홍콩, 광저우(廣州), 한커우(漢口), 귀이린(桂林), 쿤밍(昆明), 충칭(重慶) 등지를 전전했다.

이 기간 중, '봄(1938)' , '가을(1940)'에 이어서 '격류 3부작‘이라 이름붙인 대 장편을 완성하였다. 1945년에는 고부간의 갈등과 그 사이에서 번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한야(寒夜)'를 썼다.

공산정권 수립 후에 1,2,3기 전인대 대표를 지냈으며 중국문련 부주석, 중국 작가협회 부주석, 주석, 상하이 문련 주석. 작가협회 상하이 분회 주석, 국제펜클럽 주석 등을 역임했다.

1982년 4월 이탈리아 단테 국제상을 수상했으며 1983년 5월 프랑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작품집으로는 '멸망'에서 ‘한야’에 이르는 전 작품을 정리한 전 14권의 '바진문집(1958∼62)'이 있다.

1935년 = 북양(北洋)군벌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쑨촨팡(孫傳芳)이 은거하고 있던 톈진(天津)에서 암살당했다.

쑨촨팡을 암살한 사람은 전 산둥(山東) 군무방판(軍務幇判)이었던 스충빈(施從濱)의 딸 스젠차오(施劍翹)였다.

1925년 쑨촨팡은 세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산둥 독판(督辦) 장쭝창(張宗昌)의 지시로 그에 대항하던 스충빈을 포로로 잡아, 목을 베여 역전에 효시하였다. 당시 20세였던 스젠차오를 복수를 결심하고 10년 동안 기회를 노리던 끝에 쑨촨팡을 암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장제스(蔣介石)의 북벌군에 패배, 톈진(天津)에 은거하고 있던 쑨은 이날 청수원(淸修院)의 종교 행사에 참석하였다. 스젠차오는 그의 뒤쪽에 앉아 있다 먼저 한발을 쑨의 등을 향해 쏘아 쓰러뜨린 후 다시 뒷머리와 등에 각각 한발씩 두발을 쏘아 그를 절명케했다.

현장에서 일단 도망친 스젠차오는 경찰에 자수하였고 유기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펑위상(馮玉祥)과 리례(李烈) 등의 구명운동으로 국민정부는 그녀를 특사 석방하였다.

참고자료 :

쑨촨팡([孫傳芳) : 1885~1935

청말 국민정부 초기의 군인으로 직예(直隷 : 즈리)파의 군벌이다.

산둥(山東)성 출생.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후베이(湖北) 독군(督軍)인 왕잔위안(王占元)의 부하가 되었다. 1921년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 세력에 가담, 후난(湖南) ·푸젠(福建]) 공략하고 1923년 푸젠 군무독리(福建 軍務督理)가 되었으며, 1924년에는 항저우(杭州)로 들어갔다. 1925년에는 장쑤 독판(江蘇督辦)인 양소우팅(楊守霆)을 내몰고, 이어 난징(南京)으로 들어가 펑톈(奉天 : 봉천)파를 중국 남동부에서 일소한 뒤, 우페이푸에게서도 자립화를 꾀하였다. 1926년에는 상하이(上海) 수중에 넣어 남동 5성의 자치를 표방하고 혁명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그 해 가을에 북벌군에게 패하여 장쭤린(張作霖)의 안국군(安國軍)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난징에 육박하였으나 재차 패하여 1928년 다롄(大連)으로 피신, 은거하다가 1935년 톈진(天津)에서 암살되었다.

북벌전쟁(北伐戰爭 : Northern Expedition)

1926~28년 중국 국민혁명군이 장제스의 지도 아래 제국주의·봉건세력의 대변자인 북양군벌 타도를 목표로 출병하여 벌인 전쟁.

1924년 1월 국민당은 조직을 개편하여 공산당원을 개인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시키는 제1차 국공합작을 실시했다. 그 해 광저우(廣州)에서 황푸(黃埔) 군관학교가 창설되었고, 1925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이 성립되었다. 2차례의 동정(東征)을 거쳐 양광(兩廣 : 광둥(廣東)·광시(廣西))을 통일하고 혁명 근거지를 공고히 한 후, 국민정부는 북벌을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7월 광저우에서 출발하여 국민혁명군 제4·7·8군은 7월 중순 창사(長沙)를 점령했다. 8월 하순 후베이(湖北)성 셴닝(咸寧)의 팅쓰차오(汀泗橋)·허성차오(賀勝橋) 전투에서 북양군벌 직예파의 우두머리 우페이푸의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이어서우성관(武勝關)을 점령했다. 10월 중순에는 우창(武昌)을 점령하여 우페이푸의 잔병이 후베이 성 서쪽과 허난 (河南)성 경내로 패주함으로써 후베이·후난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26년 9월 국민혁명군 제2·3·6군은 '장쑤(江蘇)·저장(浙江)·푸젠(福建)·장시(江西)·안후이(安徽) 5개 성 연합군 총사령'이라고 자처하는 쑨촨팡 부대에 공격을 가하여 북벌전쟁의주요전장이 후베이·후난 지역에서 장시 지역으로 바뀌었다. 11월 북벌군은 제4·7군 일부의 도움을 받아 주장(九江)·난창(南昌)을 공격·점령하고 장시의 쑨촨팡 주력부대를 격파했다.

이어 1927년 3월 안칭(安慶)·우후(蕪湖)·난징을 공격·점령했다. 그와 동시에 푸젠·저장으로 진격한 북벌군은 12월에 푸젠과 저장의 일부를 차례로 점령했다. 한편 이해 3월 중순에는 상하이 부근까지 접근했으며, 3월 하순에는 상하이·우시(無錫)·쑹후(淞湖)·난징을 차지했다.

이로써 국민혁명군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의 대부분의 성을 진압하여 북벌전쟁 전체를 결정지었다.

이런 와중에 1927년 1월 국민당의 좌파가 우한(武漢)에 정부를 세우자, 그해 4월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노동자 중심의 공산 세력을 일소하고 '청당'(淸黨)을 표명하며 국민정부를 난징으로 옮길 것을 선언하여 난징·우한 정부가 대치국면을 형성했다.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은 깨졌다. 8월 국민혁명군은 룽탄(龍潭)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난징 정부의 기초를 확고히 하면서 승세를 타고 계속 북진했다. 9월에는 난징·우한 정부가 다시 통합되었으며 계속되는 북벌은 파죽지세였다. 1928년 말 펑톈(봉천)파의 우두머리 장쉐량(張學良) 등이 국민정부에 항복을 타전해옴으로써 북벌은 완성되었고, 전국은 통일을 이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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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25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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