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11/26 23:49



[용어 설명] 현리전투

한국전에 참여한 중공군(항미원조 인민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지휘한 중공군이 동부전선의 한국군을 겨냥한 춘계 6차 대공세 과정에서 1951년 말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에 한국군 대병력을 궤멸시킨 전투.

1951년 5월16일에 시작하여 같은 달 5월22일에 종료.

펑더화이는 이 전투에 앞서 한국군 3군단의 선봉을 전선 깊숙이 끌어 들인 뒤 전선과 후방을 연결하는 보급로 요충지 오마치 고개를 기습 점령함으로서 한국군 대병력을 포위망에
빠뜨렸다.
전방에 포위된 1만9000명의 한국군은 붕괴되어 무질서한 후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병력의 40%만이 복귀하였고 무기는 모두 빼앗겼다.
이 전투의 패배로 한국군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이
해체되었고 작전 지휘권도 모두 미군 장성에게 부여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1994년 10월 탈북한 국군 포로 조창호 소위는 현리전투 후퇴 과정에서 포로가 됐다.
그는 현리전투에 앞서 중공군의 진지를 공격하여 점령하니 모두 텅 빈 상태여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는 증언을 남겻다.
이 증언은 적의 예봉을 끌어들이고 빠른 기동으로 보급로를 차단 포위한 것을 확인해주는 방증으로 연안 공방전 에서 구사했던 전략이었고 2차대전 당시 독소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썻던 전략이기도 하다.
현리전투는 한국전 당시 우리 국군이 당한 최대 참패다. 우리나라 전사상 정유재란 때의 칠천량 패전, 병자호란 때 쌍령전투 패배와 함께 3대 패전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1951년 5월16일 저녁 중공군은 대공세를 펴면서 인제, 현리, 오대산, 설악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3군단(3, 9사단)과 10군단 예하 국군 5, 7사단을 집중적으로
때렸다.
이들 4개 사단이 아무래도 미군보다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군 지휘부는 인제 오마치 고개에 병력을 투입하여 보급선과 유사시의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는 치명적 실수를 범한
것이다.
한국군의 대패주로 귀결된 현리전투는 오마치 고개를 확보하지 못 한 때문에 일어났다.
그 당시 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된 3군단의 2개 사단, 즉 3, 9사단에 대한 유일한 보급로가 이 오마치 고개를 지나고 있었다.
오마치 고개를 적이 차단하면 2만에 가까운 병력이 전방에서 고립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한국군 3군단의 유재흥 군단장은 9사단 29연대의 1개 예비대대를 이 고개에 배치했다. 그런데 미군 측은 앞서 전투지경선을 조정하면서 이 오마치 고개를 3군단이 아닌 미군
10군단의 7사단 관할로 변경시켜 버렸다.
유 군단장이 항의해도 앨몬드 10군단장은 막무가내였다. 앨몬드
군단장은 한 술 더 떠 오마치를 확보하고 있던 9사단 병력의 철수를 요구했다.
유재흥은 "무슨 소린가. 우리 군단의 생명선을 우리가 지키는데"하고 버텼다.
앨몬드는 자신의 전투관할지역에 다른 부대가 들어와 있는 것은 참을 수 없다면서 상급인 8군사령부에 항의, 9사단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무인지경이 된 이 요충지를 중공군이 기습 장악해버린 것이다. 중국 측 공간사에 따르면 '항미원조지원군 20군 60사단은 신속하게 적의 종심을 향해서 진격하여 17일 새벽
3시에 오마치 일대를 점령, 국군 3, 9사단의 철수로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중공군은 지도상으로는 23km이지만 실제 거리는 30km를 넘는 험준한 산중을 8시간만에 신속한 야간행군으로 돌파하여 오마치 고개를 점령한 것이다. 이 경이적 행군 속도가 유재흥
군단장의 계산을 흔들어버렸다.
하진부리에 위치하고 있던 제3군단 전술지휘소에서는 좌인접 군단인 미 제10군단에게 상황추이를 문의하였더니 "우리 군단 정면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라고 하면서 제7사단의 전선 붕괴 사실마저 은폐하는 것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제3군단장은 작전 판단상의 오류를 범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현리의 패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투사 현리전투에서 발췌)
유재흥은 1950년 낙동강 교두보 전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영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다. 현리전투의 우리군 지휘관으로서 패전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미군 측의
잘못된 상황 판단과 틀린 정보 제공 및 부당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 군의 참담한 패배를 안겼다.
이는 조선 시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국왕 선조와 중앙 조정의 잘못된 판단과 그릇된 전략 지시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함대가 칠천량 해전에서 단 번에 괴멸된 것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에서 승리, 일본 대함대의 서해 진출을 저지하였으나 이후 명나라가 파견한 진린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 함대에 의해 작전상 제약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리전투 패전 이후 우리 군의 상황과 유사하다. 1597년과 1951년의 상황은 너무도 비슷하다.
원균과 유재흥의 패전 이후 운명은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점이 다르면 다르다.
원균은 칠천량 패전 직후 아들 원사웅과 함께 배에서 내려 피신, 뭍으로 상륙한 것이 조정에서 파견한 종사관의 생환 뒤 조정에 보고한 기록에 나와 있으나 그 이후 행적은 묘연하다.
아들과 함께 쫓는 왜군에 참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종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왜군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장수복을 벗어 버렸기에 왜군도 그를 죽인 뒤에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햇던 것 같다.
원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권율, 이순신과 함께 무신 3명의 1등 공신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됐다.
선조는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으나 명나라도 인정한 이순신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원균은 비록 칠천량 패전으로 일본 수군이 대 병력을 싣고 서해를 따라 한양 인근에까지 올라 갈 수 있는 길을 터놓아 다시 한번 도성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를 전략적 위기 상황을
조성함으로써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으나 자신의 죽음과 패전을 감수하면서도 왕의 명령 따른 충성심을 기린 것이다.
선조의 이런 평가는 선조가 죽은 이후 원균이 패전과 조선 수군 괴멸이라는 오명 외에 시기, 고자질과 부패 등 일방적 주장의 오명을 모두 뒤집어 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순신 장군은 트라팔가 해전의 승장 넬슨 제독보다 더욱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지만 '성인'으로까지 미화하는 것은 지나치고 적확한 평가도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무장 중 무장이며 충성심과 효성 그리고 부하 아끼는 마음 등 우리나라 유교사회의 고매한 인격을 지녔음은 분명하나 수도승과 같은 탈속한 사람은 아니다.

반면 천하의 악인의 모든 것이 구비된 인물로 그려지는 원균은 패전과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장수로서 책임은 마땅히 비난받고 준엄한 평가가 내려져야 하지만 인격 모독적인 폄하 역시 지나치다.
유재흥은 박정희 정권 때 국방장관을 지냈는데 현리 패전이 전적으로 그의 과오가 아니며 그가 당초부터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지휘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 군이
정확하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공과가 적절하게 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중공군 측 승전의 지휘관 펑더화이는 현리전투에서 그가 국공내전 당시 연안 공방전을 지휘하면서 구사한 전략을 재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중재로 국민당과 공산당 양당은 1945년 10월10일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 간 '충칭교섭(重慶交涉)'을 기초로 내전을 피하기 위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발표하고 이 협정에 근거하여1946년 1월에 정전(停戰) 협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군 공격으로 같은 해 7월 이후에 다시 내전이 발발했다. 옌안공방전은 압도적 수적, 물적 우위를 바탕으로 국민당군이 공산군에 대해 공세를 가하던 내전 초기의 중요
전투이다.

종전 후 공산군이 장악했던 도시 지역에서 공산군을 몰아낸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당정군 중추 지휘부가 소재하는 옌안을 함락시키기 위해 서북(西北)지구에 34개 여단 25만명의 병력을 집결시켰다.

이 같은 국민당군의 전략에 대응하여 공산군은 적절한 시기에 옌안을 포기한 뒤 옌안 북부 산지 지역으로 지휘부를 옮겨 반격의 전기를 마련하고 자신의 근거지에 깊숙이 들어온 국민당군을
단계적으로 격멸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7년 3월13일 국민당군의 남부전선부대는 이촨(宜川), 뤄촨(洛川)방면으로부터 전면적 공격을 가했다.
공산군의 서북야전군은 원래 세운 계획대로 한동안 방어한 뒤 퇴각하면서 국민당군에 큰 손실을 입히는 한편 지휘부 중추의 이전을 성공적으로 엄호했다.

공산당의 주요기관은 3월18일 이전을 완료했고 하루 뒤인 3월19일 서북야전군의 주력이 옌안에서 철수했다.

옌안을 점령한 국민당군은 그러나 서북야전군의 지속적인 습격과 반복되는 공방전으로 피로가 누적되었으며 식량 및 연료 등 보급도 차질을 빚어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서북야전군은 국민당군이 극도로 약화된 기회를 틈타 우세한 병력을 집중시켜 국민당군을 각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공산당이‘옌안 보위전’으로 부르는 옌안공방전에서 공산군은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대단위로 운용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결국 내전 승리의 전기를 마련했다.
옌안공방전을 지휘한 공산군의 지휘관은 펑더화이(彭德懷)와 시중쉰(習仲勛)이었다. 시중쉰은 현재 총서기 겸 국가주석으로 중국 최고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의 부친이다.


2018/11/2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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