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1 04:03



[今天歷史-11월28일] cn 국명 첫 웹사이트 등록, 柳宗元

북한군-중공군 북진 한국군-미군에 대대적 반격 개시, 중국 ADB 정식 가입신청, 인민공사 정책 수정, 코민테른 삼민주의 해석 결의안
1990년 11월 28일 첸톈바이(錢天白)가 중국을 대표하여 처음으로 cn을 국명으로 한 주소를 등록시키고 서버를 국외에 설치하였다.

첸톈바이는 무시(無錫)인으로 1963년 평균 92점이라는 탁월한 성적으로 칭화(凊華)대학 무선전신과에 입학,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인물이다.

그는 아시아 태평양 지구 Internet 협회 중국측 부주석, 국무원 정보화공작영도 소조의 정보화 안전공작 전문요원으로 일했으며 중국 인터넷 네트워크 정보중심 공작위원회 부주임 등으로 활약하다 1998년 5월 8일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1987년 9월 20일 첸톈바이(錢天白)는 국제 인터넷망을 통해 당시 서독의 칼수루에 대학에 중국 최초의 전자메일을 발송했다.

그 글은 이제와 보면 자못 의미 심장하다. ‘만리장성을 뚫고 넘어 세계로 나간다(穿越長城 走向世界)’ 였다.

중국인터넷정보센터(CNNIC)가 2018년 8월 20일 발표한 '제42차 중국 인터넷 발전상황 통계보고'를 인용해 중국 인터넷 이용자가 2018년 6월30일 현재 8억166만명에 달했으며 인터넷
보급률이 57.7%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이중 휴대전화를 통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이 7억8800만명으로 전체의 98.3%를 차지했다.
농촌 지역의 인터넷 이용자는 2억1100만명으로 전체의 26.3%를 기록했다. 도시 지역의 사용자 경우 5억9100만명으로 73.7%를 점유했다.
인터넷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5억6900만명으로 2017년 연말보다 7.1% 늘어났다. 전체 대비 비율은 71%였다.
휴대전화 지불결제 기능 사용자는 5억6600만명이며 6개월 사이에 7.4%나 증가했다.
한편 인터넷 미사용자는 5억8800만명으로 이중 농촌 인구가 62.2%에 달했다.

중국에선 2016년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가 '독신자의 날'인 11월11일 광군제(光棍節) 때 펼친 온라인 쇼핑 이벤트에서 178억 달러(약 20조8082억원)의 천문학적인 매출을
기록했다.
이는 미국에서 같은 해 11월 하순 추수감사절에서 사이버 먼데이까지 닷새간 이어진 온라인 쇼핑 기간의 매출액보다 두 배 이상 많았다.


1990년 남상(濫觴)이 큰 바다를 이룬 것이다.

1950년 = 후퇴하던 북한군과 한반도 북반부에 대거 진입한 중국군 등 20만 명이 국군과 미군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1985년 = 중국이 정식으로 아시아개발은행(ADB) 가입신청을 했다.

1958년 = 인민공사(人民公社)의 전면 실시에 따른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해 정책적 제한 내용을 담은 ‘인민공사에 관한 약간 문제의 결의(關于人民公社若干問題的決議)’가 우창(武昌)에서 개최된 중국 공산당 8기 6중전회에서 통과되었다.

공산화 이후 농업 집단화에 성공한 중국은 1958년 중반 무렵부터 종래의 농업생산 협동조합을 합병시키고, 공업, 농업 ,상업, 학교, 민병의 각 조직을 포함하며, 그때까지 향(鄕)정부가 가지고 있던 행정기능도 아울러 가지는, 인구 수 만 명에 이르는 하나의 커다란 코뮌(自治體)을 만들기 시작했다.

마오쩌둥 (毛澤東)이 ‘인민공사는 훌륭하다’라고 한 마디 하자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전국에서 99%의 농가가 참가하는 인민공사화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입의 일률적 평등 분배, 주택, 의류 등 생활 자료 등마저도 인민공사의 소유로 귀속시키는 이른바 공산풍(共産風)이 만연하자 이에 대해 일정한 제약을 가한 것이다.

이 결의는 노동에 따른 분배와 생활자료는 항구적으로 개인 소유로 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12월 10일까지 계속된 8기 6중전회는 또 마오쩌둥이 차기 국가주석 선출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에 동의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는 1959년 류샤오치(劉少奇)가 국가주석 겸 국가 국방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어 마오의 후계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23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의
의장단이 ‘중국 민족해방과 국민당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공산주의 민주혁명의 관점에서 손문(孫文 : 쑨원)과 국민당의 강령인 삼민주의(三民主義)를 해석한 것으로 북방군벌과 그 배후의 제국주의 군벌에 대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통일전선인 제1차 국공합작(1924~1927)을 성사시키는 이론적 배경이 되었다.

이 결의안은 삼민주의 중 민족주의는 “국내의 광범한 농민, 노동자, 지식인 및 상공업자 등 각 계층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 제국주의 및 그 졸개들을 반대하여 중국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민당에 중국 영내의 각 민족을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대우한다는 원칙을 천명할 것을 촉구했다.

민권주의는 “결코 외국 제국주의 혹은 그 주구(군벌)인사들과 조직을 돕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민생주의와 관련하여서는 “외국 소유의 공장, 기업, 은행, 철로와 수로 등 교통수단은 모두 국유화하여야 하며 토지를 토지를 경작하는 노동자에게 분배하여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대토지 소유자 및 중소토지소유자가 존재하는 제도를 소멸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819년 =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이 사망했다. 유종원은 773년생으로 향년 46세였다. 현재 산시(山西)성 윈청(運城)인 하동(河東)해현(解縣) 출신이다. 그는 동시대를 살았던 한유(韓愈)와 함께 고문(古文)운동을 전개하였다. 유종원과 한유는 동시대에도 문명으로 쌍벽을 이루었고 중국 문학사상의 위치에서도 동등한 위치를 누리고 있다.

유종원는 21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감찰어사로 있으면서 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이른바 영정혁신(永貞革新)으로 불리는 정치개혁 운동에 전개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유종원은 영주(永州)(현재 湖南성 零陵현 일대)의 사마(司馬)로 밀려나가고 이 곳에서 10년 동안을 보낸 뒤 다시 보다 더 먼 지역인 유주(柳州)의 자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4년을 보낸 뒤 819년 11월 28일 사망했다.

중국의 인민일보는 ‘역사상의 오늘(歷史上的今天)’에서 유종원을 유물주의와 무신론적 관점에서 번진(藩鎭)의 분열할거를 반대하고 국가의 집중통일을 주장한 정치사상가의 면모를 부각시켰다. 또한 십수 년 간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에 저술한 많은 시문에서 그는 당시 사회의 하층 계급의 고통과 어려운 사정을 폭로하며 진보적인 정치사상과 철학을 드러냈다고 강조했다.

그 대표적 예로 든 글이 ‘포사자설(捕蛇者說)’이다. 이 글은 치명적인 독사를 잡으러 다니는 사람의 입을 통해 가혹한 세금이 일반 민중에게 주는 고통을 실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이 글은 물리면 사람이 죽지만 불치병을 치료하는 영약의 재료로 쓰일 수 있는 독사를 잡아오면 세금을 면제해준다고 선포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글 속의 뱀 잡는 이는 독사를 잡으려다 조부와 부친이 모두 뱀에 물려 죽었고 자신도 2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뱀을 잡으려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이 뱀 잡는 사람은 “마을에서는 세금을 내지 못해 핍박을 받아 죽는 사람이 더 많다. 뱀을 잡기위해서는 단지 1년에 두 차례씩 만 목숨을 걸어야 하지만 세금을 내지 못하면 매일매일 죽음의 위협에 떨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유종원은 “옛 말에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흉포하다고 말하였는데 어찌 알았으랴. 가혹한 세금이 독사보다도 더 해를 준다는 사실을”이라고 말하며 글을 맺는다.

유종원은 이 기간 중 수많은 우화, 전기, 서신 그리고 묘지명을 섰으며 산수화에도 능해 ‘영주팔기(永州八記)’라는 뛰어난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유종원은 일생동안 400여 편에 달하는 글과 시를 남겼다.





2018/11/28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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