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2월2일]트럼프-蔡英文 전화회담, 鳥籠경제학

베이징원인, 宣統帝 즉위, 먼로주의

2016년 12월 2일 도널드 트럼프가 차기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대만 차이잉원(蔡英文) 총통과 전화 회담했다

전화 회담 형식은 차이 총통이 먼저 전화를 걸어 오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트럼프 정권인수팀은 성명을 통해 차이 총통이 트럼프에 대선 승리를 축하했으며 두 사람이 미국과 대만 간 "긴밀한 경제와 정치, 안전보장 관계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성명은 트럼프도 차이 총통이 올해 초에 대선에서 승리한 것에 대해 뒤늦게지만 축하의 뜻을 전달했다고 전했다.

1979년 1월 미중 공식 수교와 대만 단교 이후 미국 대통령이나 당선인이 대만 총통과 전화를 포함한 어떤 식으로나 직접 대화한 것은 트럼프가 37년만에 처음이었다.

미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정상 간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는 정책을 오랫동안 견지했다.

때문에 트럼프와 차이 총통 간 전화회담은 미중 간 합의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깨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정권인수팀 발표 후 자신의 트위터에서 "차이 총통이 대선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오늘 내게 전화를 주었다. 정말 고맙다"고 이를 직접 확인했다.

이어 트럼프는 미국이 매년 수십 억 달러의 군사장비를 대만에 팔고 있는데 (대만 총통의)축하인사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라고 적었다.

한편 차이 총통도 2일 밤 공식 웹사이트에 성명을 올려 트럼프와 10분간 통화했다고 밝혔다.

1980년 = 천윈(陳雲)이 ‘새장 경제론(鳥籠經濟論)’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공표했다.

이 ‘조롱 경제론’은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가 있기 전까지 개혁 개방 정책의 지도원칙 구실을 했다.

'새장 경제론'은 고도로 중앙통제된 계획경제와 자본주의와오십보백보인 현재의 사회주의 시장 경제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천윈은 이날 5기 전인대 5차 회의 상하이(上海) 대표단의 토의에 참석, ‘시장조절과 계획지도’ 간의 관계를 ‘새와 새장’에 비유했다.

그는 경제를 운용함에 ‘새장’, 즉 계획지도가 필요한 이유는 ‘새’가 날아돌아오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으로 비유했다. 그는 계획 지도로 경제를 운용해야지 계획지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천윈은 또 새를 손안에 쥐고 있으면 새가 죽어버린다며 새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장조절은 계획이 허가한 안의 범위에서 운영하여야 하며 계획의 ‘거시적(宏觀)’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조롱경제론은’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처럼 천윈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천윈은 경제 특구 설치를 '새장 경제론'에 입각, 반대하였고 죽을 때까지 특구를 방문하지 않았다.

남순강화 이후 폐기되다시피 했던 강력한 정부 주도와 제한된 자유화로 요약되는 이 개념은 경제적 으로 낙후한 서부와 동북지방 개발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실천되면서 소리없이 부활하는 인상이다.

과거 대만에서 민진당 집권 시절 민진당 의원들은 야당인 국민당과 친민당이 연합하여 통과시킨 국민투표법은 ‘새장 국민투표법(鳥籠公投法)’이라고 비유하며 비난한 바 있다.

당시 야당인 국민당과 친민당은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이 국민투표법을 제안하자 국호와 독립 문제는 국민투표에 회부할 수 없고 국가 안위가 위협받을 때에 한하여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고 역제안하였다. 당시 국민당과 친민당이 의회의 다수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제한된 국민투표법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천수이볜은 중국이 대만을 겨냥한 미사일의존재를 들어 국민투표를 강행했으나 정작 유효 투표에 미달하여 국민투표가 성립되지못햇다. 천의 남순강화'식'반전패'였으나 대만 국민이 이에 호응하지않은 셈이다.

[320 대만선택] 국민투표 개표결과 2004/03/23 15:32

[시사용어] 陳水扁 2개항 국민투표(公投)의제

台입법원 국민투표법안 가결 2003/11/27 23:33

1929년= 완전한 형태의 베이징원인(北京原人) 두개골이 베이징 팡산(房山)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중국인 고고학자 페이원중(裵文中)이 이끄는 발굴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베이징원인의 유적지가 저우커우뎬에서 발견된 이후 그동안 완전치 못한 치아와 두개골 파편이 발굴했을 뿐이었는데 중국인 고고학자에 의해 완전한 형태의 두개골을 처음 발견한 것이다.

베이징원인(北京原人)

Peking man/Homoerectuspekinensis

베이징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출토된 원인단계(原人段階)의 화석인류. 인류학사상 일반적으로 중요한 화석표본이 발견되어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어 쉽게 승인되는 일은 적었으나, 베이징원인은 많은 학자들의 기대 속에서 발견된 드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1926년 중국 지질조사소 소장으로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던 스웨덴의 지질학자 J.G. 앤더슨은 저우커우뎬에서 인류의 것인 듯한 이(齒)를 발견했다고 발표하였다. 1927년 말부터 캐나다의 해부학자이며 베이징협화의학원(北京協和醫學院)교수였던 D.블랙이 록펠러재단의 원조로 발굴조사를 시작하였다. 그때 블랙은 앞서 발견된 큰 어금니의 주인을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라고 명명하였다.

1929년 말 중국 인류학자 페이원중(斐文中)이 두개골 제1호를 발견하였고, 그 뒤에 두개골 6점을 포함하여 약 40체분(體分)의 원인 골격과149개의 유리(遊離)된 이가 발굴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발굴조사가 어렵게 되자, 1941년 전화(戰火)를 피해 모든 표본을 미국으로 발송했으나 발송 다음날 미국과 일본 간에 태평양 전쟁이 선포되어, 즉 미국과 일본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이 발표된 뒤 그이후호혼란이 와중되는 가운데 표본 모두를 분실하고 현재는 그 모형만이 남아 있다.( ◆사진은 페이원중이 발견한 베이징원의 두개골 모형이다)

대전 뒤 다시 시작한 발굴작업에서는 두개골 조각과 이 몇 점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표본이 발견된 곳은 석회동굴 안의 퇴적물 속이었는데, 대부분이 두개골과 이였고 사지골(四肢骨)은 얼마 안 되었다. 두개골 용량(容量)은 900∼1200㎖이며, 안와상융기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상악절치(上顎切齒)의 설측면(舌側面)이 삽 모양으로 패어 있는 것은 몽골로이드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기 때문에 베이징원인을 몽골로이드 직계(直系)의 조상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목탄과 재가 발견되어 불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동아시아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석기도 같이 발견되어 다른 대표적 원인인 피테칸트로푸스(자바원인)보다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생존 연대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 약 50만∼20만 년 전으로 짐작된다.


1908년 =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가 되는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溥儀)가 황제에 즉위했다. 1906년 2월 7일 생으로 당시 나이 만 2세였다.

푸이는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의 아들로 자희태후(慈禧太后 : 西太后)에 의해 11월 13일 황궁으로 입궁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14일 광서제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광서제의 후사로 입적하여 황위를 잇도록 하였다.

푸이는 등극 후 연호를 선통(宣統)으로 하였으며 생부인 재풍이 섭접왕이 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의 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의회교서 형태로 먼로 선언을 발표하였다(1823). 이 먼로 선언은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지침이 되었고 '먼로 독트린'으로 불리었다.

19세기 초 라틴 아메리카에서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스페인은 유럽의 ‘신성동맹(神聖同盟)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이를 탄압하려 하였으며 신성동맹 가맹국들 역시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 개입하려 하였다.

먼로는 이러한 서구 열강이 서반구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선언을 발표 한 것이다.

신세계, 즉 아메리카주를 유럽과 구별하여 양자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세는 이미 미국 독립혁명 무렵부터 볼 수 있었다.

먼로 선언은 2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1821년 러시아가 북위 51도 이북의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지역을 러시아령으로 하는 포고를 발표했으나, 이에 대해서 미국 국무장관 J. Q. 애덤스는 신대륙은 더 이상 유럽의 식민대상(植民對象)으로는 되지 않는다고 하는 식민지주의의 부정을 표명하였다.

한편 영국은 1810년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유럽 열강, 특히 프랑스의 간섭을 우려하여 1823년에 외무장관 G. 캐닝을 통해서 간섭 반대의 영·미 공동선언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영국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미국의 단독선언이 된 것이다.

먼로 독트린은 앞서의 식민지주의의 부정을 반복함과 동시에 미국과 유럽의 상호 불간섭원칙을 표명하고, 라틴아메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어떤 간섭도 미국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로 간주할 것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먼로는 교서에서 “동맹국 각국이 자신들의 정치제도를 미주에 확장시키려는 행동이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남쪽 지역의 우리들의 형제국가들이 원조를 받지 않고도 자신들이 염원하는 정치제도를 충분하게 건립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없다.

따라서 우리들은 유럽 열강이 어떤 형태로든 간섭하는 것을 좌시할 수도 없고 듣고 넘길 수도 없으며 수수방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아메리카는 아메리카인의 아메리카이다'라는 슬로건을 제창했다.

먼로 독트린은 서구 열강의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여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독립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였다.

먼로주의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고립주의’이고 라틴 아메리카 입장에서는 ‘개입주의’이다.

1차 대전에 병력을 파견하고도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먼로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립주의로서의 먼로주의는 2차대전을 거치면서 완전히 폐기되었다.

그러나 ‘개입주의’로서의 먼로주의는 여전히 살아있다.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원조라는 명목으로 개입하여 이 지역을 미국의 ‘뒤뜰’로 만들었다.

민주당 케네디 행정부의 쿠바 피그스 만 침공(1961),공화당 닉슨 행정부의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과 공화당부시 행정부의 파나마 침공(1989) 등은 바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천명한 먼로주의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18/12/0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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