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7 17:38



[今天歷史-12월4일]홍콩 중문으로 재판, 의용군 행진곡

북양 군벌 지도자 우페이푸 사망

1995년 12월 4일 홍콩의 고등법원이 처음으로 중문(中文)으로 재산분규안 심판을 진행했다.

소송당사자 쌍방은 모두 영어를 알지 못하였으며 또 변호사를 고용하지 않은 채 모든 증거서류를 중문으로 제출하였다. 고등법원 논의를 거쳐 중문으로 심리를 진행하기로 하였다.

이는 홍콩 법원이 설치된 이래 처음으로 중문으로 진행한 재판이었다. 그동안 홍콩 법정에서는 줄곧 영문으로 재판을 진행해왔으나 주권 반환을 앞두고 먼저 중문이'복권'된 셈이 다.

홍콩기본법(中華人民共和國香港特別行政區基本法)은 홍콩특구의 행정기관, 입법기관과 사법기관은 중문 외에 영문을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 1997년 7월 1일 중국으로 의 주권 반환 이후에도 영문 역시 정식 어문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1966년= 베이징(北京)의 홍위병들이 펑전(彭眞), 톈한(田漢), 완리(萬里) 등을 체포했다. 펑전과 완리는 덩샤오핑(鄧小平) 의측근으로 덩의 집권 후 전인대 상무위원장을 역임했다. 톈한은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을 작사한 인물이다.

항일전 당시 홍군의 군가였던 ‘의용군 행진곡’은 공산정권 수립 직전 국가로 채택되었으나 톈한이 문화 대혁명 와중에서 비판받으면서 사실상 국가의 지위를 상실했다.

이 곡은 원래 1935년 일본의 동북 3성 침략을 소재로 한 영화 ‘풍운남녀(風雲兒女)’의 주제가로 가사는 공산당원이었던 톈한이 그리고 곡 역시 공산당원인 니에얼(聶耳)이 붙였다.

4인방이 축출된 이후 화궈펑(華國鋒) 집권 기간 가사를 바꾸는 문제가 논의 되었으나 덩샤오핑이 집권하면서 결국 원래 가사를 회복한 채 국가로 재 지정 되었다.

1982년 12월 4일 3,000명의 전인대 대표들이 거수로 ‘의용군 행진곡(義勇軍進行曲)’을 국가로 재 지정하였다.
1935년 당시 톈한이 국민당에 의해 체포된 뒤 그가완성하지 못한 줄거리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완성했던 샤옌(夏衍)은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국가 재지정 거수 표결에서 “나는 두 손을 들어 찬성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이 곡 가사의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일어서라 ! 적의 노예를 원치않는 이들아 !

우리들의 피와 시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쌓아가자 ......
.......
.......

일어서라! 일어서라! 일어서라!

......
......

우리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한다!

적의 포화를 뚫고 전진한다!

전진! 전진! 진!

(起來 ! 不愿敵奴隸的人們!

把我們的血肉, 築成我們新的長城 ......

.......
......

起來! 起來 ! 起來 !
.......
.......

我們萬衆一心, 冒着敵人的炮火前進 !

前進 ! 前進 ! 進 ! ”

의용군행진곡

1939년 = 북양군벌 중 베이징 과 주변 일원을 지역적 기반으로 한 직예파((直隸派)의 지도자인 우페이푸(吳佩孚)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향년 66세였다.

우페이푸(吳佩孚) : 1872∼1939

중국 정치가. 자는 자옥(子玉) . 산둥(山東)성 출생. 바오딩 무비학당(保定武備學堂)을 졸업한뒤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직계 부하인 차오쿤(曹錕)밑에서 직예파로서 지위를 키워 나갔다.

1920년 직로예순열부사(直魯豫巡閱副使)가 되어 안직전쟁(安直戰爭)에서 대승하여 안후이(安徽)파 돤치루이(段祺瑞)를 몰아냈다. 1921년에는 양호순열사(兩湖巡閱使)로서 후베이독군(湖北督軍) 왕잔위안(王占元)을 내쫓았다. 1922년 제1차 봉직전쟁(奉直戰爭)에서는 봉천파(奉天派) 장쭤린(張作霖)을 격파하여 푸젠(福建)·쓰촨(四川)을 세력 하에 두는 등 차오쿤을 도와 패권을 확립하였으며 그 해 선거에서 차오쿤을 대총통이 되게 했다.

1923년 차오쿤 대총통 밑에서 직로예순열사(直魯豫巡閱使)가 되었으나, 이듬해 제2차 봉직전쟁에서 펑위샹(馮玉祥)에게 참패했다. 직예파는 몰락하고 그는 후난(湖南)으로 물러나 재기를 꾀하였다.

그러나 1926, 27년 국민혁명군에게 후난·후베이(湖北)의 기반을 침범 당하고 쓰촨으로 도피했다. 1932년에는 장쉐량(張學良)의 권유로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중일전쟁(中日戰爭) 뒤 일본 괴뢰임시정부의 수정위원장(綬靖委員長)이 되었으나 협력하지 않았다.


2018/12/04 06:59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