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2/11 04:03



[今天歷史-12월5일] 平津전투 개시, 유엔군 평양 철수

[今天歷史-12월5일] 平津전투 개시, 유엔군 평양 철수

1948년 12월 5일 1948년 가을 중국 동북 지방에서 벌어진 랴오선 전투(遼瀋戰疫 : 1948. 9. 12.~ 1948. 11. 2.)전투를 승리로 이끈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1947년 10월 홍군의 명칭을 인민해방군으로 밖꿈)은 루안()현에서 장자커우(張家口)에 이르는 화베이(華北) 지구 북부의 1,200리 전선에서 국민당 군에 총공세를 가함으로써 이른바 핑진(平津)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평진’은 이 전투의 핵심 도시인 베이핑(北平)과 톈진(天津)을 지칭한다. 베이핑은 현재의 베이징으로 국민정부가 1929년 7월 6일 난징(南京)을 수도로 정하면서 베이징을 베이핑으로 개명했다.

핑진전투는 랴오선전투, 화이하이(淮海)전투( 1948. 11. 6. ~ 1949. 1. 10.)와 더불어 중국 국공 내전의 3대 전투로 불리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은 이 3대 전투에서 승리한 뒤 양쯔강(揚子江)도하 작전( 1949.4.21. ~ 1949. 4. 23.)에서 승리함으로써 대륙을 석권할 수 있었다.

핑진 전투 직전 중국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은 린뱌오(林彪)가 지휘하는 동북 야전군과 화베이 야전군 등 100만 명이었고 이 지역에서 대적한 국민당군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규모가 62만 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국공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 군에 압도적으로 기울어졌던 쌍방의 군사력이 공산군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총공세에 앞서 중국 인민해방군은 비밀리에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톈진(天津), 탕구(塘沽), 루타이(蘆台), 탕산(唐山)의 국민당군을 포위하였다.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을 베이핑, 톈진, 탕산, 신바오안(新保安), 탕구 등 5개 거점으로 분리, 포위하는 데 성공하고 각개 격파전략으로 나갔다.

12월 22일 신바오안이 함락되고 24일에는 장자커우가 떨어졌다. 해를 넘긴 1949년 1월 14일 톈진을 총공격하여 29시간의 격전 끝에 13만의 국민당 수비군을 섬멸하고 수비군 총사령관 천장제(陳長捷)를 생포했다.

고립된 25만 명의 베이핑 수비대는 해방군과의 교섭 끝에 1949년 1월 31일 국민당 화베이 총사령관 푸줘이(傅作義)의 인솔 하에 항복했다. 이로써 핑진전투가 끝났으며 해상으로 철수에 성공한 탕구 수비대 5만 명을 제외한 국민당군 52만 명은 해방군에 편입되었다.

<盲瞰圖子 주> 상대방 전력을 둘로 분할, 가기 포위혀 분리한 뒤 차례로 집중 공격하여 각개 격파하는 인민해방군의 이러한 전술은 2년 뒤 한국전에서 다시 한번 구사된다.

당시 중공군은 낭림산맥을 타고 비밀리에 한반도 북부 깊숙이 들어와, 동과 서 양 방면으로 나뉘어 , 상호 긴밀한 군사적 연계없이각기 북진해 온 동서 양 방면의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을 각각 포위한 뒤 전력을단계적으로 집중 총공세를 펼쳤다.

서쪽의 미국 주력은 1950년 12월 5일 평양에서 철수하고 그 다음해인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다시 공산군에 내주어야 했다(1.4 후퇴).

한편 동부의 미 제10군단과 한국군 제1군단 등 10만 명의 병력은 장진호까지 진출한 미 해병 1 사단이 장진호 전투에서중공군 10만 명에 막대한 인적 피해를 안겨 일단 포위 공격하는 예봉을 꺾은 가운데 1950년 12월 15일부터 그해 12월 24일 까지 흥남에서 피난민 10만 명과 함게 선박 편으로 부산으로 철수해야했다.
미군은 피난민을 대거 수송하여 전쟁의명분을 세웠고 병력과 장비를 큰 손실없이 철수시키기는 하였으나 38선 이북지역은 물론 잠시나마 수도 서울까지 공산군에게 다시내주기까지한 사실에비추어 보면 군사 저냑상으로는 참담한 패전임을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전략은 1951년 5월 말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도 다시 한 번 구사됏다. 중공군은 국군과 미군 사이를 파고 들어 국군의 보금로를차단, 북진 전진한 국군을 포위하여 괴멸적 패배를 안겼다. 이로 인해 국군은 군사 작전 지휘궈을 미국에 넘겨주지 않을 수없었고 휴전회담이 2년 이상 길어지는 단초를 제공했다.

1950년 12월 5일 = 국군과 미군이 평양을 북한군과 중국 공산군(중공군)에 내어주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까지 내주었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보급선이 길어져 전력이취약해졌다고 한단한 1.4 후퇴 3주뒤인 1월 25일부터 반격을 개시했다. 같은 해 2월 10일 인천과 김포를 탈환하였고 3월 24일에는 미군이 서부 전선에서 다시 38선을 돌파하였다(우리 국군은 동해안 지역에서 다음 날인 25일 38선을 돌파함). 38선 재돌파와 동시에 맥아더는 한국전을 중국까지확대할 것을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트루먼 행정부는 맥아더 해임으로 이 주장을 극적으로 배척햇다. 이를 계기로 한국전은 한반도 중부에서 전선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인명과 물자의 블랙홀 역할을 하는 고비용 소모전과 지리한 휴전 협상 국면으로 돌입햇다.

2018/12/0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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