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1/19 08:16



[今天歷史-1월10일] 화이하이 전투 종료

국공 첫 정협회의 개최

[오늘의 단상-1월10일]때를 기다린다

1949년 1월 10일 국공내전의 3대 전투 중 하나인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가 끝을 맺었다.

'화이하이'는 쉬저우(徐州)를 중심으로 한 장쑤, 산둥, 안후이, 허난 성 접경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이다

중국 내전 3대 전투는 화이하이 전투 외에 랴오선 전투(遼瀋 轉役) 핑진(平津)전투 가 있다.

화이하이 전투는 3대 전투 중 공산군 희생과 국민당군의 손실이 가장 컸던 전투로서, 내전 정국에 미친 정치적인 영향력도
가장 심대했다.

66일 동안 진행된 전투에서 공산당의 전사상자는 13만3000명이었고 국민당의 1개 전략 집단군 55만 5,000명이 와해되었다. 이중에는 장제스의 5대 주력군인 제5군과 제18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랴오선 전투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시킨 카운터 펀치였다면 화이하이 전투는 결정타였고 핑진전투는 피니시 블로였다. 이후 전투는 끝내기에 비유할 수 있겠다.

1948년 9월 12일부터 시작, 이해 11월 2일 막을 내린 랴오선 전투에서 패배, 동북지방을 공산군에 넘겨준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이 전투에 패배함으로써 양쯔강(揚子江) 중하류 이북 일대 광대한 지역을 잃게 되었으며 국민당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인 난징(南京)과 상하이(上海)가 직접적인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한편 화이하이 전투와 함께 진행된 핑진전투 역시 화이하이 전투 종결 3주 뒤인 1월 31일 베이징(당시 이를 베이핑)의 국민당 군이 함복함으로써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화이하이 전투는 1946년 내전 발발 이후 수세에 몰렸던 공산군이 린뱌오(林彪)의 지휘 아래 벌인 랴오선 전투의 승리를 통해 동북지역, 즉 만주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 간 군사적 균형이 양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모두 공산당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랴오선 전투가 끝난 직후인 1948년 11월 6일부터 시작한 이 전투의 초점은 쉬저우였다. 쉬저우에 총사령부(剿總) 둔 국민당의 류즈(劉峙) 군단 60만명은 쉬저우 부근에서 공산당 화동(華東) 야전군의 남하를 저지하여 중원(中原) 야전군과 연결되는 것을 막는다는 목표를 세웠다.

장제스는 공산군에 비해 압도적인 수적 우위의 대규모 병력을 보유하였음에도 이를 분산, 상대방 근거지로 깊숙이 진입시킴으로써 각개격파 당한 동북지방의 실패를 교훈 삼아 류즈에게 쉬저우로 병력을 집중할 것을 지시하고 황웨이(黃維) 군단을 쉬저우 쪽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이와 같은 국민당군의 병력 집중 움직임에 마오쩌둥(毛澤東)은 선제적으로 화동, 중원 야전군 및 지방 부대를 모두 동원한 총병력 60만명으로 합동 작전을 펼쳐 쉬저우에서 류즈 군단을 섬멸하도록 명령했다.

동북지방 즉 만주의 중심 도시 선양(瀋陽)을 점령, 랴오선 전투를 끝낸 뒤 4일 후에 시작한 화이하이 전투는 3단계로 나뉘어 전개됐다.

제1단계(1948년 11월 6일-11월 22일)

: 국민당의 황보타오(黃伯韜) 병단이 섬멸되어 쑤(宿) 현이 공산군에 함락됐다. 이로 인해 쉬저우의 류즈 군단은 포위되고 병력은 분할 상태에 빠졌다.

제2단계 (1948년 11월 23일 - 12월 15일)

: 국민당 황웨이 병단이 섬멸되고 사령관 황웨이가 포로가 되었다. 두위밍(杜聿明) 집단군이 포위됐다.

제3단계(1948년 12월 16일 - 1949년 1월 10일)

: 국민당의 두위밍 군단이 섬멸되고 두위밍이 포로가 되었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산군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중원 야전군 사령원 류보청(劉伯承), 부사령원 천이(陳毅), 정치위원 덩샤오핑(鄧小平). 화동 야전군 사령원 대리 겸 정치위원 대리 쑤위(粟裕), 부정치위원 탄전린(譚震林).

덩샤오핑은 이들 양 군단 지도부로 구성된 총선전위원회의 서기로 있으면서 전선의 일체 사무를 관장했다.

린뱌오가 자신을 랴오선 전투의 승리를 이끈 지휘관으로 자부했다면 덩샤오핑은 화이하이 전투 승리의 '총설계자로 린뱌오에게 군사 면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한편 화둥야전군의 전신은 신사군이다. 신사군은 2차 국공합작으로 국부군과 함께 일본 침략군과 대항하던 1941년 1월6일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국부군의 기습포위 공격으로 일시 와해됐는데 8년 4일만에 보복한 셈이다.

환난사변으로 불리는 신사군의 붕괴 후 이의 재건에 나선 인물이 천이와 류샤오치이다.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쟁패로 압축할 수 있는 국공내전은 전국 시대 월나라 구천과 오나라 부차의 오월쟁패 그리고 공동의 적인 진나라를 대항하여 협력했다. 진 멸망후 패권을 두고 사생 결단의 싸움을 벌였던 초한 쟁패와 닮았다.

국공내전이 오월쟁패, 초한쟁패와 다른 점은 장과 마오의 죽음( 장제스 1975년 사망, 마오쩌둥 1976년 사망) 42년 뒤에도 여전히 최종 피어리어드는 찍히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1946년 =2차대전 종결이후 첫 정치협상회의가 충칭(重慶)에서 개최되었다.

중국 내의 모든 정치 세력이 참가한 정치협상회의는 1945년 10월 10일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쌍십협정(雙十協定)’에 따른 것이다.

국민당 대표 8명, 공산당 대표 7명, 청년당 대표 5인, 민주동맹 대표 9인. 기타 사회 지도급 인사 9인 등 모두 38명이 참석하였다.

회의는 정부개조, 평화건국강령안, 헌법초안 등의 사항을 논의했다.

정협회의는 국민당이 독재통치 및 내전정책을 중단하는 것이 인민민주주의에 의한 평화건국 방침에 유리하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월 31일 회의가 폐막된 당일 국민당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며 정협회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정협의 결의를 부정한 이 같은 소란에 대해 장제스(蔣介石)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묵시적 동의였다.

결국 공산당의 통일전선전술 승리로 귀결한 이 정협회의로 중국은 내전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됐다.

공산당은 정치적 약세를 반국민당 세력을 결집하는 통일전선전술로 돌파하여 국민당을 코너로 몰았고 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수적, 질적 우위의 국민당군 병력을 자신의 근거지로 끌어들여 전력 분산과 함께 지리한 소모전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수립한 '4행 전유격 전술 교리'의 확대 적용한 것이다.

마오가 징강산 시절 수립한 4행 유격전술 교리는 다음과 같다.


적이 진격하면 우리는 후퇴한다 敵進我退

적이 진지를 구축하면 우리는 교란한다 敵據我擾

적이 피로에 지치면 우리는 공격한다 敵疲我打

적이 퇴각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敵退我追


3년에 걸친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한 것과 관련, 마오의 탁월한 군사전략에다 국민당군 지도부의 부패와 무능, 정치적 고립을 자초한 최고 지도자 장제스의 정치적 선택 실패와 토지개혁 에 대한 주저와 중국에서 여전히 제국주의적 경향을 버리지 못한 외세와의 분명한 거리두기를 보이지 못함으로써 시대의 흐름에 역류한 것이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2차대전 발발 7개월 전인 1939년 2월 나치독일의 지원을 받고 3년간의 내전에서 승리(1936년 7월 18일 그해 3월 총선 승리로 성립한 좌파 인민전선 정부에 대해 아프리카 식민지 주둔 사령관 프랑코장군이 군사정변을 선언하면서 시작)한 프랑코의 파시스트 체제가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에도 체제를 유지하다가 공산화 위협을 받지 않은 채 민주화한 사실에서 보듯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 패배가 역사적 필연이라는 다수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소수 목소리도 있다.

시안사변으로 프랑코의 스페인과는 달리 공산군 토벌을 완수하지 못한 점, 이로 인해 1차 국공합작 기간 (1924년 ~ 1927년) 국민당 지도부에까지 침투한 공산당 오열분자를 발본색원하지 못해 국공내전 초기 이들의 공작으로 결정적 전략 실패와 오판 유도에 빠져버린 점 등이 내부 요인으로 지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맹 외세에 대한 대응에도 국공 쟁패의 최고 지도자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상반되었는데 이것을 초한쟁패에 있어 항우와 유방의 상반된 기질이 그러했듯이 양자의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장제스는 미소 얄타 협정의 밀약에 따른 미국의 압박에 밀려 외몽골의 독립과 만주지역에서 제정 러시아 이권을 소련에 넘겨주었는데 이는 장에게 청나라 말기 외세에 영토를 할양한 이홍장의 모습이 덧칠되는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반면 마오쩌둥은 국공내전 말기 양쯔강을 경계로 공산당과 국민당이 분할 공존하는 안을 희망한 소련의 구상을 단호하게 거부햇다.

이런 자세는 국공내전 승리 이후 소련으로부터 만주의 제국주의적 이권을 되찾는 과정에서도 견지됐다. 마오에게는 외세를 배격한 이미지가 중국 인민 사이에 확실하게 각인되었고 이는 마오와 마오가 이끄는 공산당의 국공내전 승리를 굳히는 배경이 되었다.

그리고 외부 요인으로는 중국 공산정권에 대한 착시에 빠진 미국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의 국민당 정부에 대한 발목 잡기와 황금알 거위의 배를 가르는 식인 성급한 중국시장 개방 등이 거론되고 있다.

트루먼 행정부는 국공합작 중재에 나서면서 국공내전 발발을 지연시켰으며 이는 공산군이 만주 지역에서 소련의 지원 아래 군사력을 강화할 기회를 주었다는 지적이다.

또한 미국의 중국시장 전면 개방으로 중국의 초기 발달 단계에 있던 산업이 급속도로 몰락하고 이는 토지 개혁의 미실시와 함게 중국 인민의 민심을 국민당으로부터 떠나게 하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중국 대륙이 공산화할 처지에 놓이자 막대한 군비 지원과 물적 지원을 쏟아 부었으나 이는 독의 밑을 뚫어 놓고 허겁지겁 물붓기를 하는 식이었다.

독에 물이 절반 이상 빠지자 미국은 '중국백서(白鼠)'를 통해 국민당의 패배와 중국 공산화는 역사적 필연이라는 자기 합리화에 나섯다.

소련은 국공내전 발발 직전 만주 지역에서 공산당군에 최신 무기를 과감하게 지원, 적기투자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소련으로서도 이는 만주에 대한 제국주의적 이권을 토해 내야 하는 부메랑 투자였다.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북한 방문, 중소 우호조약

미국은 2차대전 종전 후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 세력과 3번의 열전을 치루었다. 미국은 중국, 한국 그리고 베트남에서 동맹세력을 불신하고 적절한 군사 지원를 적기에 하지 않고 상황이 악화되어서야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똑같은 과오를 반복했다.

이로 인해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완전 실패했고 한국에서는 가까스로 현상 유지할 수 있었다.

동일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정반대로 달랐던 데는 대처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과 베트남에서는 반공산 세력에 의한 토지개혁이 없었으나 한국에서는 한국전쟁 이전에 반공 친미적인 이승만 정부의 주도로 토지 개혁이 실시됐다.

아울러 한국에서는 한국전 이전에 중국과 베트남과는 달리 여순 반란사건을 계기로 군 지도부에 침투한 공산세력을 철저하게 들어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과 베트남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앞서 서구 제국세력의 침탈과 식민지배를 받았으나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았을뿐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지 않아 서방 해양세력인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엷었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 주요 일지는 다음과 같다.
1927. 4. 12. = 국민정부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size=3>4.12 상하이 쿠데타타. 이로써 1924년 1월 성립한 size=3>1차 국공합작이 와해되기에 이른다.

1927. 8. 1. = 중국 공산당 난창(南昌)
폭동. 이를 계기로 size=3>홍군 창설로 이어져 중국 공산당은 군대의 틀을 지닌 자체적인 군사적 역량을 갖춤.

1930. 6. 11. = size=3>리리싼 노선에 따라 중국공산당 전국 무장폭동 결의. 이후 홍군이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주요 근거지로 후퇴.
1930. 12. 9. = 장제스 국민정부 주쥬석 size=3>초공(剿共) 군사회의 소집. '초공'은 '공산 비적 토벌'이라는 뜻이다.

5차에 걸친 초공 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1차 (1930.12~1931.1) = 11개 사단 10만 동원 ;

2차(1931.5.~6) = 13개 사단 20만 동원, 200문 중포
와 100대의 항공기 참가 ;

3차((1931.7.~10.) = 장제스가 총사령관으로 총지휘, 30만 병력 동원, 천밍수(陳銘樞 : 천청陳誠), 허잉친(何應欽), 주샤오량(朱紹良) 등이 참가 ;

4차(1932.6.~1933.6) = 후베이(湖北) 주변 소비에트에 이어 장시 소비에트로 진격, 50만 동원, 천청이 지휘 ;

5차(1933.·10.~1934. 10) = 100만 병력과 200대의 비행기 동원, 장시, 푸젠(福建), 안후이(安徽), 허난(河南), 후베이(湖北) 등의 공산당 근거지에 대한 총공격.
1934. 10. 10. = 중국공산당 홍군 size=3>장정(長征) 출발.

1935. 1. 15. = 쭌이(遵義)회의 서 마오쩌둥의 군사 지배권 확립.

1935. 10. 19. = 홍군 주력 장정 완료

1936. 10. = 홍군 제2 방면군 홍군 주력에 합류

1936. 12. 12.= 시안사변(西安事變) 발발 장제스 연금. 이를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 간 항일전 기치 아래 2차 국공합작 합의가 이루어짐.

1937. 9. 23. = 제2차 국공합작 공식 성립. 이에 따라 홍군의 주력군은 이해 7월27일 홍군의 국민정부 국민혁명군으로 편제를 받아들인다는 원칙 천명에 의거, 국민혁명군 8로군으로 명칭을 바꿈.

1937. 10. 22. =국민당 군사위원회 남부 8개성 13개 지구서 유격활동 중인 홍군을 신사군으로 재편

1941. 1. 6. = 국민당군에 의해 공산당의 신사군이 포위 공격을 받아 심각한 타격을 받은 환난사변(皖南事變)’ 발발

1946. 7. = 국부군과 공산군 간 충돌이 본격화함.

1946. 11. 9. = 저우언라이 등 중공 대표단 난징서 연안으로 철수 2차 국공합작 공식적 와해. 이후 국공 내전 본격적으로 전개.

1948. 9. 12. = 랴오선 전투(遼瀋 轉役) 개시

1948. 11. 2. = 선양 공산군에 함락됨으로써 랴오선 전투 종료

1948. 11. 6. =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개시

1948. 12. 5. = 핑진 전투(平津戰役) 개시

1949. 1. 10. = 화이하이 전투 공산군 승리로 종료

1949. 1. 31. = 베이핑 수비 국부군 항복으로 핑진 전투 종료

1949. 4. 21. = 양쯔강 도하 전투(渡河戰役).

1949. 12. 27. = 국부군 대륙 내 최후 주요군 공산군에 섬멸. 이로써 대륙 내 국부군이 소멸됐다.

1950. 3. 28. = 중국 대륙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국부군 병력이 시캉(西康)성-현재 쓰촨(四川)성 서부와 시짱(西藏) 자치구(티베트) 동부를 관할했다-시창(西昌)에서 철수.


2019/01/1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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