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2/18 11:45



[今天歷史-1월14일]여류혁명가 秋瑾 여성해방 잡지 창간

[오늘의 단상-1월14일] 中國의 잔 다르크

저우언라이 "중국 지식분자는 노동자이다"

1907년 1월 14일중국여보(中國女報)가 상하이에서 창간되었다.
이 잡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은 중국 청나라 말기 시인이자 격정적인 여류 혁명가로 유명한 추근(秋瑾. 사진)이다.

잡지는 통속적이며 쉬운 문체로 여성 해방을 고취하고 부녀자들에게 사회로 나아가 독립적 존재가 될 것을 역설하였다.

추근은 창간사에서 다음과 같이 여성의 자립, 여성의 해방을 호소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식이 없고 의지가 부족하여, 자립하지 못하고 한 곳을 세워주면 다른 곳에서 쓰러지고 마는 것이 우리 여성 세계의 폐단이다....우리나라 여성을 생기발랄하고 용맹한 정신을 가진 인간으로 만들고, 진취적인 기상을 가지게 하여 하루라도 빨리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다."

'중국여보'는 2번밖에 출간되지 못했지만 중국에서 그 당시 이러한 잡지가 발행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추근은 열렬한 애국심과 이를 실천에 옮기다가 참혹하게 순절하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유관순 열사와 프랑스 잔 다르크를 떠올리게 한다.

추근은 1875년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소관료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선경(璿卿), 호는 경웅(競雄) 또는 감호여협(鑒湖女俠)이다. 남자처럼 경서와 시를 익혔고 무예도 수련했다.

왕조 시대의 여성이 학문을 익히고 시를 배우는 것은 드물지 않았다. 추근은 그러나 무술도 익혔다는 점에서 이채로우며 양자 모두에서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면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추근의 조부와 부친 모두 관료 출신으로 보수색이 짙은 부유한 가정에서 풍유롭고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교양이 있는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아 11세에 시를 짓고 두보, 신가헌의 시집을 늘 가지고 다녔다.

또한 당시 무술의 고수였던 외삼촌으로부터 권법, 봉술, 검술 외에 승마술도 익히면서 성장하였다.

부모의 명으로 1896년 21살 때에 대부호 집안의 아들인 4세 연하의 왕정균(王廷鈞)과 결혼했으나 남편은 주색잡기와 도박에 함몰한 장래에 대한 어떠한 뜻도 없는 한량이어서 결혼생활은 남편에 손찌검을 당하는 등 대단히 불행하였다.

추근은 슬하의 어린 아들과 딸 남매를 가족에 맡긴 채 1904년 패물을 팔아 자금을 마련한 뒤 남자로 가장하고 일본에 유학했다.

일본에서 교육,공예와 간호학 등을 배우며 중국 유학생 사회에서 여성지도자로서 우뚝 섰다.

1905년 겨울 방학에 귀국하여 손문이 영도한 중국 동맹회(浙江主盟人)에 참가하였고 저장성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그뒤 각지를 돌아다니며 혁명 무장 봉기를 꾀하다 체포되었다.

청나라 관리는 가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는 추근에게 마지막으로 붓과 종이를 주고 알고 있는 모든 혁명 관련 사항을 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추근은 붓을 들어 7자 큰 글씨로 절명사(絶命詞)를 쓰고 붓을 던졌다.

秋雨秋風愁煞人

가을비 가을바람에 수심으로 죽는구나

결국 이 절명사를 던진 다음날인 1907년 7월 15일(음력 ) 새벽 처형되었다. 향년 32세로 불꽃 같은 삶이었다.

우국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많은 시를 남겼다. 다음은 1905년 황해 해상에서 지은 시이다.

<황해를 건너는 배안에서
러일전쟁 지도를 보고 있는데
일본 사람이 시를 부탁하기에>

만리파도 바람따라 가고오는데
동해(동중국해)의 혈혈단신 이 몸은 봄을 위해 우레를 품었노라

나라가 찢긴 전쟁 지도에 얼굴은 일그러지고
어찌 이 강산을 잿더미로 만들랴

술을 들이켜도 우국의 눈물 막을 길 없으니
조국의 건아들아 무기를 들고 난국을 헤쳐나가자

수십 만 목숨을 버려야 한다 해도
반드시 이 나라를 건져내리라

<黃海舟中日人索句幷見日俄戰爭地圖>

萬里乘風去復來 只身東海挾春雷

忍看圖畵移顔色 肯使江山付劫灰

濁酒不銷憂國淚 救時應仗出群才

拼將十萬頭顱血 須把乾坤力挽回

이 시는 1905년 봄 고국에 왔다가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인 친구가 시 한 수 짓기를 청하여 지은 작품이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중국 동북부를 일본이 쟁탈한 지도를 보고 비분강개한 심사를 시로 나타낸 것이다.

※ 번역은 기세춘 신영복의 『중국역대시가선집집 4』(돌베개, 서울, 1994년)을 참고하였다.

추근은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수형으로 처형됐는데 처형 전날 쓴 글의 글씨체가 전혀 흔들림이 없어 끔찍한 형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가 최후 청조 관리에게 한 요구에서는 담대하면서도 여성성을 버리지 않앗음을 알 수 잇다.

그는 형 집행에 앞서 웃옷을 어깨가 드러나도록 벗기지말고 참수된 목을 효수하지는 말아달라고 요구하였는데 지인들에게 글을 쓸 기회를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이두 가지 요청은 수용했다고 한다.

최근 중국 장편 드라마 '신해혁명'의 첫 장면은 혁명 4년 전에 이루어진 추근의 처형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신해혁명의 무수한 선구자 중에서 바로 추근을 대표적 상징으로 본 것이다.

참형 장면은 리얼하게 보여주지 않고 형장의 추근 모습을 보여준 뒤 다음 장면에 핏자국이 사선으로 지나가는 모습으로 처리했다.

한세기 전 청조 관리가 이 대담한 여류 반역자를 가장 끔찍한 형으로 처형하면서도 나름 예우를 갖추었던 것처럼 100여년 뒤 중국 드라마 감독은 여류 혁명가의 불꽃같은 짧은 인생을 극적으로 압축한 장면을 관객에 드러내면서도 그가 죽음의 직전과 직후에도 피하고자 했던 바를 지켜주는 연출을 했다.

추근의 딸은 미국으로 건너가 비행기 조종술을 익혀 중국 최초의 여객기 조종사가 되어 '동양의 여기장'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어머니의 모험적이며 대담한 선구자적 기질을 물려받아 이를 실천한 셈이다.

1956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베이징에서 지식분자 문제에 관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보고를 통해 중국의 지식분자 대부분은 “이미 노동자 계급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선언했다.

2000년 장쩌민(江澤民)의 ‘ 3개 대표론
’의 이론적 맹아는 이미 1950년 대에 싹이 터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중국공산당의 계급 개념을 확대, 변화한 시대 상황에 조응하려는 실용적인 접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공산혁명의 동반자였지만 노동계급에 동화하기 어렵던 지식인을 노동자 계급에 포함시켜 새로운 중국 건설의 동력으로 활용하려고 시도했다.

장쩌민은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노동자 계급 밖으로 추방됐던 지식인은 물론 개혁과 개방 추진으로 형성된 기업가을 노동자 계급과 함께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한다"란 개념 아래 포함시킴으로써 개혁개방 이후의 지도 노선인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계급적 토대를 구축하려는 시도를 했다.


2019/01/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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