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0 20:54



[今天歷史-1월28일] 판첸 라마 사망, 1차상하이 사변

1989년 1월 28일= 티베트 불교의 2인자 판첸 라마 10세가 사망했다. 1938년 2월 3일 생으로 향년 51세였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으로 믿어져 오고 있으며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전생활불(轉生活佛)로 여겨지고 있는 달라이 라마에 버금가는 추앙을 받아왔다.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 불교의 법왕이라면 판첸 라마는 부법왕에 해당된다.

판첸 라마는 티베트 라마 불교 제2대 종파의 수장의 명칭으로 ‘지용을 겸비한 대학자’라는 뜻이다.

판첸 라마는 역대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티베트 중앙정부와 반목하기도 했다.

판첸 라마 10세는 3세 때 제 9대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선정되었으며 1949년 6월 3일 당시 국민정부에 의해 10대 판첸 라마로 인정되었다.

판첸 라마 10세는 1959년 3월 10일 티베트 무장 독립 봉기 이후 달라이 라마 14세가 인도로 망명한 뒤에도 중국에 남아 중국 정부에 비교적 협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1959년 4월 전인대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에 선출되어 베이징(北京)에 사실상 억류되었던 그는 중국의 티베트 문화 파괴활동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는 7만자 상서를 제출, 마오쩌둥(毛澤東)의 심기를 거슬렸다.

결국 문화대혁명 기간 9년 동안 연금되었던 그는 1979년 정협 부주석으로 복권되었으며 1980년에는 다시 전인대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89년 1월 판첸 라마는 티베트에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독립 봉기 30주년을 앞두고 티베트인들을 무마시키려는 중앙정부의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판첸 라마는 중앙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과거 공산당의 잘못을 용서하자고 말하면서도 공산당이 아닌 달라이 라마를 찬양하고 신앙과 문화를 보호하고 유지할 것을 역설했다.

판첸 라마 10세는 티베트 중남부 도시인 시카체 시에서 판첸라마 5세와 9세까지의 제사를 주재하던 중이던 1월 28일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죽음을 예감한 판첸 라마 10세는 목욕을 한 뒤 옷을 갈아입고 결가부좌를 하고 입적했다.

판첸 라마의 돌연한 사망은 티베트의 긴장을 고조시켰으며 이 해 3월 5일 독립봉기 30주년을 맞아 대규모 시위사태를 불러일으켰다.

[今天歷史-3월5일] 89년 티베트인 독립항쟁 발발

티베트의 중국 당국은 이들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였으며 이틀 뒤인 3월7일 티베트 인들은 저항을 포기했다.

당시 티베트 서기가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후진타오(胡錦濤)였다.

판첸 라마의 갑작스런 죽음과 티베트인들의 봉기, 그리고 유혈진압으로 이어진 이 패턴은 이해 4월 15일의 후야오방(胡耀邦)의 돌연한 죽음과 민주화 시위, 그리고 6 · 4 유혈진압으로 확대 반복되었다.

[今天歷史-11월 29일] 중국 판첸라마 11세 선임

1932년 1월 28일 야음을 틈타 일본 해군 육전대(해병대)가 상하이(上海)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국민정부의 국민혁명군 제19로군을 공격함으로써 1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은 이를 ‘1 · 28 상하이 사변’으로 부르고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1차 상하이 사변'으로 불린다. 중일전쟁으로 확대된 1937년 8월 9일의 상하이 사변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今天歷史-8월9일] 소련군 만주 일본군 공격, 2차 상하이사변 발생

당시 공격을 지휘한 일본 해군 육전대 사령관 시오자와(?澤)는 “작전 개시 후 4시간이면 상황은 종료된다”고 호언했으나 차이팅제(蔡廷?)와 장광나이(蔣光?)가 이끄는 19로군은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공격하던 일본군은 장갑차 3량을 탈취당했는가 하면 1개 연대가 반격한 중국군에 의해 포위되어 전멸당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공격 개시 1주일 만에 시오자와는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일본은 3개 사단의 육군을 추가 파병하였다.

19로군은 2월 20일 일본군 9사단장(植田謙吉)이 지휘하는 총공세도 격퇴했으나 결국 3월 중순에는 일본군의 거센 공격에 밀려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로군의 영웅적 투쟁으로 중국 전역에서 항일의지가 고취되었으며 쑹칭링(宋慶齡) 등이 상하이 시민을 대표하여 전선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상하이 공격은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공작에 쏠린 내외의 관심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溥儀)를 끌어들여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려는 공작을 진행시키고 있던 상황이었다.

상하이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3월 1일에 만주국 건국선언이 발표됐고, 3월 9일에는 푸의가 만주국 행정수반직인 집정(執政)에 취임했다.

1차 상하이 사변은 결국 5월 5일 정전협정으로 마무리 되었다. 공산군 토벌을 위해 일본과의 전면적 대결을 회피하고자 했던 장제스(蔣介石)가 상하이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중재를 받아들여 정전협정이 성립된 것이다.

이 정전협정은 19로군과 전체 중국 인민에게는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광둥(廣東) 출신 장교가 주축인 19로군은 이후 푸젠(福建) 인민혁명정부에 참가하는 등 반장(反蔣)활동을 전개하다 장제스의 직계 부대에 의해 괴멸되었다.

1934년 1월 7로군으로 개편되었고 주둔지도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허난(河南)성으로 옮겨져 사실상 해체되었다.

원래 정전협정은 4월 29일 체결될 예정이었으나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 홍구) 공원의거로 늦춰졌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본 천황(일왕)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맞아 홍커우 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기념행사를 하던 중 윤봉길 의사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일본군 사령관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가 즉사했고 해군 중장 노무라 기티사부로(野村吉三郞)는 한쪽 눈을 실명했으며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이 시게미쓰는 훗날 외상으로 미국의 미주리 호 함상에서 태평양 전쟁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한 때 악화되었던 중국 거류 한국인과 중국인들 간의 감정이 호전되었다. 아울러 한국의 임시정부는 이후 중국 정부의 지원을 꾸준히 받게 된다.

장제스는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 의사가 능히 하니 장하다”고 격찬하였다.

[今天歷史-7월2일] 萬寶山 사건 발생



2019/01/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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