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2/18 11:45



[今天歷史-1월29일]4개 현대화 노선, 鄧 일국양제 언급

1963년 1월 29일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상하이(上海)과학기슬공작회의에 참석, 연설을 통해 중국의 4개 현대화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이 사회주의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농업현대화 ▲공업현대화 ▲국방 현대화 ▲과학기술 현대화라는 4가지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4 가지 목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현대화라고 강조했다.

저우언라이는 1년 11개월 뒤인 1964년 12월 21일 개막한 제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그 다음해 1965년 1월 4일까지 계속)에서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을 대표하여 이를 제기하고 전인대가 채택함으로써 이를 당정의 노선으로 확립시켰다.

[今天歷史-12월21일] 저우언라이 4개 현대화 목표 제시

저우언라이의 4개 현대화목표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중국의 경제에 초래한 재앙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제안된 것이었다.
대약진운동은 마오의 주도로 1958년부터 1960년 초까지 노동력 집중을 통해 철강 산업 등을 발전시켜 경제성장을 이룩하자는 대중 경제 부흥 운동을 말한다.
대약진운동은 인민공사 설치와 함께 수레의 두 바퀴 처럼 함께 추구됐으며 마오의 낭만적인 혁 명주의가 표현된 정책이었다.

'대약진'이라는 용어는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에서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고 주장하고 내부적 으로 ' 7년 안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슬로건 을 내세운데서 비롯됐다.

이에따라 공업생산의 지표를 높였는데 그 결과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엿다. 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잘못된 정책의 과도한 추구라는 구조적 모순에서 발생한 농업생산량의 부족에 설상가상으로 연이은 자연재해와 구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등의 외부적 모순이 겹치면서 수천만 명이 굶어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러한 악재 속에서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과다하게 성장시킨 중화학공업은 처음 설정한 경제지표에 턱 없이 못 미치는 성장결과를 보이면서 대약진운동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그 결과 마오는 국가주석의 자리에서 사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저우언라이와 류샤오치(劉少奇)가 주도한 이 실용주의 노선은 1966년 마오와 그의 추종자들의 의해 시작한 문화대혁명에 의해 1차 좌절되었다. 홍(紅)과 전(專)의 대립에서 홍이 일단 승리한 것이다.

문혁 말기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의 최대 무력적 기반이었던 린뱌오 세력의 쿠데타 미수 사건 후 군부를 정돈하기 위한 마오의 정치 권력적 판단에 따라 등용한 덩샤오핑(鄧小平)을 중용하여 4개 현대화 노선을 재점화하려 하였으나 1976년 1월 8일 저우가 병사하고 잇달아 덩샤오핑이 실각하면서 2번째의 좌절을 맞았다.

하지만 마오가 사망(1976년 9월9일)한 후 다시 복권된 덩샤오핑이 1978년 12월 11기3중전회에서 집권하면서 4개 현대화노선은 불꽃을 다시 지피게 되었다. 1978년 이래 중국 지도부의 노선은 곡절은 있었으나 ‘주전종홍(主專從紅)’의 기조를 견지하였다.

결국 1963년의 저우언라이가 처음 제시하고 덩샤오핑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으며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가 발전적으로 승계한 4개 현대화 노선은 중국이미국과 어깨를 겨루는 G2 국가로 성장하는 길잡이 구실을 하였다.

2012년 11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 제5세대 최고 지도자가 된 시진핑(習近平)도 집권 1기에서는 이런 노선 기조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과 장쩌민 집권 시절 박제화하였던 마오의 평등사상을 되살리려 부단히 노력하는 한편으로 과학발전관을 강조 했었다. 후자는 저우가 1963년 4개현대화 중 과학의 현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한 것과 맥을 통하고 있다. 따라서 후진타오에 이르러 과거 대립하던 홍과 전의 노선의 화해(和諧 : 허셰), 즉 조화 시도가 모색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허셰’사회 ‘허셰’를 먹다<和諧社會吃河蟹>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의 권력 승계 직전 벌어진 보시라이(薄熙來) 사태는 홍과 전의 또 한 번의 충돌이었으나 역시 이번에도 전의 승리였다.

시진핑의 슬로건은 '중국의 꿈(中國夢)'인데 이는 '홍'과 '전'의 허셰의 바탕 위에 중국의 도약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보시라이 사태에도 불구 일단 후진타오가 추구한 홍과 전의 변증법에서의 합(合)을 지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2017년 19대에서 시진핑의 권력이 마오쩌둥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해져 1인 집중화 경향을 보임으로써 덩의 노선에서 질적 변화를 꾀하려는 조짐을 강력하게 내보였다.

2018년 3월 전인대에서 이를 노골화하였으나 이어 터진 미국과의 무역전쟁으로 이는 출범과 동시에 '아르마다'와 ' 쿠빌라이 몽골 기병'을 좌절시틴 '태풍'에직면한 것이 아니냐는 전망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

물론 '시황디'를 자부하고 있는 시진핑 은 중국이 '퍼스트'가 아니고 '세컨드'이기 때문에 자국을 굴복 시킬 기세로 무역 전쟁을 벌이는 도널드 트럼프를 '펠리페 2세' 또는 ' 쿠빌라이 칸'으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2위국 스파르타는 1위국 아테네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국을 꺾지 못햇고 나치 독일도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햇다. 소련은 미국과의 대결에서자멸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경우와는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빌 클린턴이베트남 전 패배의 망령에서 벗어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를 패배시킨 '사막의 폭풍전'의 영웅 '아버지 부시'와의 대선전에서 들고 나온 슬로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였다.이 것으로 클린턴은 부시를 걲꾸러 뜰렸다.

덩샤오핑은클린턴보다 십수년 앞서 이 슬로건을 묷시적으로 내세워 '죽은 마오의 천하'를 타도했다.

'산 중달'은 '죽은 공명의 촉한'을 무너뜨렷다. 그러나 이제 '죽은 덩이 산 진핑을 흔들고 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다'.

1979년 = 덩샤오핑(鄧小平) 중국 국무원 부총리가 29일부터 미국 방문을 시작했다.

그는 30일 워싱턴에서 “어떤 방식으로 대만문제를 해결할지는 중국의 내정문제”라고 강조하고 “‘대만을 해방한다’는 표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으며 대만이 조국에 회귀하게 되면 대만의 현실과 현행제도를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대만에 앞서 홍콩에서 구현되는 '일국양제(一國兩制)'란 개념이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1981년 8월 26일 정리된 형태로 공개적 으로 표명하였는데 처음 시사 한 때와 마찬가지로 대만에 초점이 맞추어 졌다.

[今天歷史-8월26일] 일국양제, 경제특구, 陳毅



2019/01/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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