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4/24 02:59



[今天歷史-2월2일]威海衛 점령, 스탈린그라드 독일 백기

도태 생산설비분야 발표, 친지웨이 전 국방부장 사망

1895년 2월 2일 = 청일전쟁(중국에서는 1894년 발발한 이 전쟁을 발발한 해 간지에 맞추어 갑오전쟁으로 부른다) 기간 중 일본군에 의해 산둥(山東)성 웨이하이웨이(威海衛)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웨이하이웨이는 옌타이(烟台)와 청산(成山)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전략적으로 뤼순(旅順)을마주보며 뤼순과 함께 보하이(渤海)만의 입구를 통제하는 곳으이다. 웨이하이웽이와 뤼순은 이홍장(李鴻章)이 심혈을 기울려 육성한 북양해군(北洋海軍)의 양대 기지였다.

웨이하이웨이는 북양해군의 기지 중의 전함이 정박하는 곳이었고 뤼순은 선박수리를 하는 곳이었다

이홍장은 북양해군의 제독인 정여창에게 육로를 통해 웨이하이웨이 배후로 침입한 일본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지시, 일본군은 소수 병력이 지키는 웨이하이웨의 양안(兩岸) 포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이홍장은 전쟁이 패하더라도 자신의 무력기반인 북양함대를 보존하기 위해서였으나 북양해군은 일본군의 지상과 해상의 연합 공격으로 불과 8일 뒤인 2월 10일 궤멸되고 말았으며 청일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를 확정지었다.

1999년 = 중국 국가경제무역위원회가 도태시킬 생산설비, 기술, 그리고 상품 목록을 발표했다.

이 목록에 포함된 항목은 석탄,야금, 유색, 석유화공, 경공업, 방직, 기계, 건자재, 건축, 전력 등 10개 산업 114 항목이었다.

기준은 네 가지로 법률과 법규에 의해 금지된 생산기술 및 제품, 생산방식이 낙후되어 있어 생산품의 질이 저열한 것, 환경오염을 심각하게 야기하는 것, 그리고 원자재와 에너지 소모가 아주 높은 것 등이었다.

1997년 = 전 국방부장 친지웨이(秦基偉)가 베이징(北京)에서 사망했다. 항일 전쟁기간 덩샤오핑(鄧小平)이 정치위원으로 있던 8로군 129사에서 유격지대 사령원으로 활동한 그는 덩샤오핑의 핵심 군부인맥으로 분류되었으며 정치적 격변기마다 그의 움직임이 주목거리였다.

국무위원과 중앙군사위원,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친지웨이가 사망한 17일 뒤인 2월 19일 그의 평생 보스 덩샤오핑이세상을 떠낝다. 삼국지에서 유비에 앞서 관우와 장비가세상을 떠난 것처럼 또 마오쩌둥이 사망하던 그해 마오에 앞서 저우언라이와 주더가타계한 것을 연상시킨다.

세계사 속의 오늘

<2차대전의 한 분수령이 된 소련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의 백기 투항 항복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1943). 독일군의 투항 의사는 이틀 전인 1월 31일에 소련군에 전달됐다.

1942년 7월 17일 독일군이 소련군의 돈강 방어선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된 지 160일만의 일이었다. 양측에서 200만 명이 이상의 병력이 투입된 이 전투에서 독일군이 궤멸적 타격을 입는 바람에 이후 동부전선에서 독일은 수세적 입장이 되었다. 전투의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1942년 여름 A.히틀러는 독소전선에서 남부에 주력하여 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카프카스의 곡창·유전지대에, 다른 하나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시켰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 강 하류 공업도시로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서 군사 심리적으로도 상징성이 컸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빼앗음으로써 소련에 중대한 군사적, 심리적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런 만큼 소련군의 저항도 치열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은 뒤 8월 23일 돈강 방어선을 돌파한 뒤 스탈린그라드 시를 직접 공격하게 되었다.

독일군의 선봉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9월 13일 스탈린그라드 시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700여 차례의 전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를 완전 장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11월 들어서면서 양군의 양상이 전환되기 시작했다. 공세적이던 독일군이 막대한 피해로 공세가 둔화된 반면, 소련군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독일군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지휘부는 반격을 결정했고 11월 19일 새벽을 기해 스탈린그라드 시가지에 진입해 있던 독일군 주력을 포위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11월 22일 밤 소련군은 돈강 도하에 성공했고 다음날인 23일 카라치에서 각기 다른 방향에서 반격을 개시한 소련군이 조우함으로써 스탈린그라드 포위망을 완성시켰다. 이 결과 독일의 제6군 20여 만 명이 포위망에 갇혀 버리게 되었다.

소련군이 이처럼 독일군의 주력을 의외로 손쉽게 포위할 수 있었던 것은 스탈린그라드와 후방 독일군과의 보급로 방어를 담당한 것이 독일군이 아니라 루마니아 군이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6군단장 프리드리히 폰 파울루스 대장은 제6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기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모든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괴링이 주도한 공수보급(空輸補給)은 요구의 1/7에도 미치지 못했고 F.E. 만슈타인 원수의 포위돌파작전도 실패했다.

소련군은 1943년 1월 10일 50문의 대포를 동원 포격을 가하며 독일군에 대한 대대적 공격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궤멸상태에 빠진 독일군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독일군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탄약마저 소진되는 상황에 처하자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항복허가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1월 30일 그를 원수로 승진시키고 117명의 장교들에게 1계급 특진을 시키며 격려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가 자결하기를 기대했지만 파울루스는 다음날 항복을 결심하고 이를 소련군에 전달한 뒤 2월 2일 에 정식으로 소련군에 백기투항했다.

스탈린그라드 시공방전 초기 공격하던 주력 독일 제6군 26만 명을 주축으로 하여 총병력은 루마니아 군 등을 포함, 공격하던 측의 총병력이 모두 33만명에 이르렀다.

독일군이 소련군에 역포위 당했을 때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갇힌 독일 제6군의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항복당시 9만 1,000명으로 줄어 있었는데 이들 포로 중에는 24명의 장성과 2,500명의 장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포로가 된 이들도 대부분 전사한 동료들을 뒤따랐다. 전염병과 혹한, 그리고 영양실조 때문이었다. 항복 독일군 9 만 명 중 종전 후 독일로 귀환한 사람은 단지 6,000명에 불과했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1월까지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의 전사상자의 수는 150만 명이었는데 이는 독소전선에 투입된 독일군 총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자이다.

히틀러의 퇴각거부 지시를 수용한 파울루스는 히틀러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퇴각을 감행한 아프리카 전선의 롬멜과 비교된다.

파울루스는 참담한 패배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하 병력을 전멸시킨 반면 롬멜은 비록 패배는 피할 수 없었지만 수하 병력 대다수가 전후에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 올 수 있게 하였다.


2019/02/02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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