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5/19 23:32



[今天歷史-3월14일] 반분열법,重慶직할시, 마르크스

중국 베트남과 남사군도에서 충돌

2005년 3월 14일 중국 전인대가 ‘반분열국가법(反分裂國家法)’을 통과시켰다.

중국이 법을 제정한 직접적 계기는 대만의 집권 민진당이 날로 독립 행보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법은 대만이 독립을 선언할 때 무력으로 이를 저지하는 데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전인대 反분열법 채택 폐막 2005/03/14 12:00

[05 전인대] 反분열법 초안 反獨관련 3개조 2005/03/08 23:58

대만의 독립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의 기능을 가진 이 법은 실제에 있어서는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과 티베트인, 위구르인 등 소수민족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대만을 의식하여 제안한 '1국2체제(一國兩制)가 대만보다 홍콩에서 먼저 구현되었던 것처럼 '반분열법'도 그 입법의 1차적 과녁에서 비껴나 있었다.

2008년 국민당이 정권을 탈환하면서 '반분열법'은 대만에 관한 한 동면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2016년 1월 대만 대선-총선에서 대만독립을 여전히 강령으로 유지하고 있는 민진당이 승리, 집권 함으로써 '반분열법'이 다시 주목을 끌기 시작햇다.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 정부는 2016년 5월 출범하였는데 의회마저 과반수를 장악, 천수이볜(陳水扁) 정권 시절보다 더 유리한 정치적 환경을 맞고 있어 중국 정부를 긴장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이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가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1979년 중미 정식 수교 이후 어느 대통령(대통령 당선자 포함)도 금기시하였던 대만 총통과의 전화회담을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가져 중국 지도부를 더욱 바짝 긴장시켰다.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뒤 '타이완 카드'를 일단 테이블 밑으로 내려 놓았지만 중국의 불안감은 날로 커져가는 상황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2017년 3월 중국 전인대에서는 민진당 정권의 독립 추진 움직임을 더욱 강력하게 견제하기 위해 국가통일법을 제정하는 논의에 들어갔다. 이 법의 취지는 대만독립을 반대하는 것 뿐만 아니라 통일 과정과 절차를 명기하는데 있다.

'하나의 중국' 이슈는 더 큰 지역 현안인 북핵 사태와 남중국해 문제로 인해 수면 아래로 내려갔으나 미국과 중국 그리고 대만 3자 간에 '물밑 활발한 오리 발가퀴질'은 계속되고 있다.

중국이 2018년 2월9일 미국 하원이 미국과 대만 고위 인사의 교류 금지를 해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견문발검(見蚊拔劍)식 반발을 일으킨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중국 지도부 인사들의 거주지 중난하이(中南海)의 확성기 역할을 하는 환구시보의 인터넷판 환구망은 하원의 해금 법안 통과 5일 뒤인 2월 14일 상원 통과와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전제로 '단교 가능성 운운'하는 초강경 협박 발언을 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서명이 이루어지자 단교와 관련해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1997년 = 중국 8기 전인대 제5차회의의 결의에 의해 쓰촨(四川)성의 충칭(重慶)시가 베이징(北京), 상하이(上海), 텐진(天津)에 이은 중국의 4번째 직할시가 되었다.

충칭직할시의 창설 당시 관할 구역은 기존의 충칭시 외에 완셴(萬縣)시, 푸링(涪陵)시, 첸장지구(黔江地區)로 21개 구와 현으로 구성되었다.

2005년에는 장강 싼샤댐구(三峽庫區), 우링산구(武陵山區), 다바산구(大巴山區) 등이 추가로 편입되어 43개 구와 현으로 확대됐다.

직할시의 전체 면적은 8.2만㎢로 남한 면적(9.07만㎢)의 89%에 해당하며 전체 인구는 3002만명에 달한다(2005년 현재).

1988년 =난사(南沙)사군도(南沙群島)에서 중국과 베트남군 충돌.

중국 해군의 함정이 1988년 3월 13일 난사군도의 주장(九章) 산호초 근처에서 조사활동을 실시하고 츠과(赤瓜) 산호초에 상륙하여 관측소를 설치했다.

14일 오전 6시 베트남 해군의 2척의 운반선과 1척의 상륙함이 치과 산호초 해역에 나타나 43명의 무장 병력을 동원, 치과 산호초에 상륙하려했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베트남군은 산호초로부터 물러가라는 중국 해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상륙을 시도하려 하였으며 츠과 산호초에 상륙해 있던 중국 해군에 대해 총격을 먼저 가했다.

이와 동시에 베트남 해군은 산호초에 상륙한 중국 해군 병력은 물론, 부근에 정박중인 해군 함정에 대해 총격과 포격을 일제히 가하기 시작했다.

중국 해군은 이에 응전, 양측간의 교전이 벌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베트남 해군의 운반선 1척이 침몰하고 다른 운반선 1척과 상륙함이 큰 손실을 입었다.

베트남 해군 함정들은 퇴각했으며 중국 해군은 추격을 하지 않았다.

중국 외교부는 당일 베트남이 중국의 영해인 남사군도에 침입했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주중 베트남 대사관에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앞서 베트남이 공산 통일이 이루어지기 한해 전인 1974년 1월에는 중국과 남부 베트남 간에 시사(西沙) 군도에서 군사충돌이 벌어져 남베트남군이 패배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칼 마르크스가 타계했다(1883). 1818년생으로 향년 65세였다.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독일 과학적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창시자. 라인란트팔츠주(州) 트리어 출생.1 835년 트리어의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본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옮겼다.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고 헤겔 철학을 접하게 되어 급진적 성향을 가진 헤겔 좌파에 가담하였다.

1841년 대학 과정을 마치면서‘데모크리토스의 자연철학과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라는 졸업논문을 발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842년 10월 쾰른으로 이주하여 급진적 신문인‘라인신문(Rheinische Zeitung)’의 주필로 취임, 혁명적 민주주의 입장에서 프로이센의 절대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관념론적 견지에서 벗어나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고, 혁명적인 민주주의자에서 과학적 공산주의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1843년 3월 ‘라인신문’이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되자 10월 파리로 이주하여 A.루게와 함께‘독불연감(獨佛年鑑)’을 발간, 이 잡지에 ‘헤겔의 법철학 비판’, ‘유대인 문제’ 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844년 9월 파리에서 F.엥겔스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때부터 그들의 평생을 두고 이어지는 공동투쟁이 시작되었다.

1845년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도 추방된 마르크스는 2월 브뤼셀로 이주하였으며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당시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청년 헤겔파의 거두인 B.바우어를 비판하여 ‘신성가족’을 저술하였으며,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프랑스의 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 등 19세기 학문적 성과의 3대 유산을 계승·발전시켜 과학적 사회주의의 세계관, 즉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를 밝힌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하였다.

1847년 브뤼셀에서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자인 P.J.프루동의‘빈곤의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의 빈곤’을 발표하였다.

이해 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비밀 선전단체인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하였으며, 1847년 11월 런던에서 개최된 이 동맹의 제2차대회에 참가하여 대회의 위임을 받고 공산당 선언을 작성, 1848년 2월 발표했다.

‘만국(萬國)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구호가 담겨져 있는 이 문헌은 과학적 공산주의의 첫 강령적 문헌이다.

1848년 베를린에서 ‘3월혁명’이 일어나자 쾰른으로 돌아가 노동계급의 의사를 대변하는 유일한 신문인 ‘새라인신문(Neue Rheinische Zeitung)’을 창간, 그 주필을 지냈다.

그러나 혁명이 실패하자 마르크스는 재판에 회부되었다가 파리로 망명했으며, 1849년 6월 13일 시위 후 프랑스 정부에 의해 추방당하여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1849년 말 공산주의자동맹은 런던에서 활동을 재개했으나 1850년 가을에 분열하여 마르크스파는 중앙위원회에서는 다수를 차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소수파로 전락하고, 결국 ‘쾰른 공산당재판’으로 조직은 궤멸하였다.

그는 이에 한동안 조직적 활동을 떠나, 미국에서 발행되는 재미독일인 상대의 진보주의 신문에 시사·정치·경제평론을 기고하며, 경제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48∼49년의 혁명의 경험을 정리하여 ‘1848년에서 50년까지 프랑스의 계급투쟁(1850)’,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을 집필하였다.

두 작품은 유물사관으로 역사적 사건을 분석한 최초의 시도로 평가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상호관계,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의 태도 문제를 밝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형태론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의 런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며, 엥겔스의 끊임없는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마르크스는 몇해 동안 그의 대표적 저작 중 하나인 ‘자본론(Das Kapital)’을 집필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859년 여러 해에 걸친 정치경제학 연구의 최초의 수확인 ‘정치경제학비판’ 제1분책을 완성하였다.

‘자본론’ 제1권은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되었으며 1872년 제2판이 출판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잉여가치 법칙이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법칙이라는 것을 밝혔는데 잉여가치 법칙의 발견과 그 본질 및 자본주의 발전에서 역할을 밝힌 것은 후세에 그 오류를 지적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공적으로 꼽히고 있다.

18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걸쳐 노동운동이 다시 강화되자 마르크스는 노동자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기 위하여 1864년 9월 28일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 아래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힘썼다.

오언주의·프루동주의·바쿠닌주의·라살레주의 등 각종 유파의 사회주의자와 영국의 트레드유니언주의·차티즘·급진공화주의 등 사회주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유형의 노동운동 단체까지 망라된 세계적 노동조직을 위해, 창립 선언·규약을 기초하고 그 주도권을 잡았다.

1871년 마르크스는 ‘프랑스 계급투쟁’에서 파리코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형태의 하나라는 것을 밝혔다.

1875년 ‘고타강령’을 발표하여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역사적 필연성을 강조하여 노동자의 계급투쟁 의식에 ‘필승의 신념’을 고취시킴으로써 그 결과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병존하는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빈궁 속에서 학구적 정열을 불태워, 건강을 해치면서도‘자본론’체제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883년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동지였던 엥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폐종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하이게이트 묘지에 안치되었다.


2019/03/14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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