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6/17 08:05



[今歷단상-4월13일]以心傳心 吳越,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장제스가 국공내전 패배로 대륙을 잃고 '상담(嘗膽)'의 장소로 하이난다오와 대만을 놓고 고심할 때 저우언라이가 핫라인을 통해 하이난다오를 추천했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가 하노이 북미회담 결력 직후 문재인과 자신의 관계를 표현한 "믿거나 말거나"를 연상케 하는 '전설'이지만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개연성이 적지 않다.

장제스 고향이 저장성 펑화이고 저우언라이의 원적은 저장성 샤오싱이다.

두 사람은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정치노선이 갈라졌으나 1차 국공합작 때에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장제스가 교장 겸 정치부 주임으로 저우언라이가 정치부 부주임으로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2차 국공합작 시기에는 저우언라이가 충칭에 머무르면서 국공 간 교섭을 도맡았다.

그런 사이였기에 건곤일척의 사생결단식 전쟁 중에도 핫라인을 유지했던 것 같다.

저우언라이는 하이난다오는 인심이 몹시 사나우니 대만이 낫겠다고 대만을 추천하였는데 장제스의 선택도 대만이었다.

저우언라이와 장제스의 계산은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장제스가 저우언라이가 적이기는 하였으나 대만을 추천하는 것을 두고 장의 철저한 파멸을 노린 꾐수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 때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패권을 놓고 싸웠지만 다케다군이 소금 부족으로 곤란을 겪을 때 우에스기가 소금을 보내주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미중화해를 연 헨리 키신저는 저우언라이에 대해 '적‘이기는 하지만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장제스 역시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장제스는 1975년 4월5일 대륙수복의 비원을 안고 대만섬에서 와석종신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8일 베이징에서 역시 와석종신했다. 그 역시 문화대혁명으로 망가진 공산 중국의 미래를 우려하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 이상이 흘렀지만 대만의 중화민국과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불편한 공존을 지속하고 있다.

장제스와 저우언라이의 1949년 '이심전심 설계'가 사실이라면 양안의 후계자들은 부처님 손바닥을 여전히 넘지 못하는 '손오공들'이다.

그들이 비록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고 여의봉을 쥐고 세계를 흔들어대고 있지만 말이다. <盲瞰圖子>

2019/04/13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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