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5/20 11:59



[今歷단상-5월10일] 최고 지도자의 건강과 참수 의지

중국의 1966년과 1989년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달랐고 다르기도 하지만 같았다.

1966년 마오쩌둥과 1989년 덩샤오핑은 모두 정치적 위기에 직면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다'가 사태의 핵심이었다.

1966년 마오의 경제노선은 코마 상태에 빠진지 이미 오래였다.

1989년 덩은 인플레로 인한 부익부빈익빈 현상 자체와 이를 대처하기 위한 지도부의 극심한 대립으로 좌우 모두로부터 강하게 압박당하고 있는 처지였다.

2인자에게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오의 "계급투쟁은 확고하게 견지되어야 한다"는 호소는 2인자 류사오치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고 그의 집무실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1989년 덩 체제의 2인자 자오쯔양 총서기는 외국으로부터 대거 수입을 해서라도 국내 물가를 잡자는 자세였고 3인자 리펑 총리는 사회주의를 포기하자는 것이냐며 으르렁댔다.

둘은 촌보도 양보할 자세가 아니어서 최종 결정권자로서 덩의 입지는 시시각각 좁아졌다.

그러나 마오도 덩도 위기를 헤쳐 나갔고 이후 둘 다 죽을 때까지 이전보다 절대적인 최고 지위를 누렸다.

다른 점은 기본적으로 1966년의 마오가 좌편향이었다면 1989년의 덩은 우편향이었다.

청년 세력은 마오에 열광적으로 호응, 100만 홍위병이 천안문 광장을 메웠다.

반면 1989년 천안문 광장의 젊은이들은 '죽은 후야오방'을 내세우며 '산 덩샤오핑'을 쫓아내려는 기세였다.

그러나 이처럼 같으면서도 다른 마오와 덩이 지도권 강화라는 기회로 만든 공통의 동력은 그들의 육체적 건강과 좌고우면 없는 '참수 의지'와 단호한 실행이었다.

마오는 양쯔강을 도하하는 퍼포먼스를 연출 고희를 넘은 그가 여전히 건강하며 수십년더 살 것 같은 착각적 확신을 지지자와 반대자 모두 갖게 했다.

1989년 천안문 유혈 진압 직후 TV에 얼굴을 드러낸 83세의 덩샤오핑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인민해방군을 격려, 자신이 유혈 진압의 최종 결정권자임을 확인시켜줌으로써 혼미한 상황을 단번에 정리했다.

마오는 자신의 지지세력이 크게 밀릴 때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지침을 내렸고 잠깐 뜸을 들인 뒤 류사오치의 팔다리, 입과 눈 그리고 귀를 한 번에 참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것으로 '게임오버'였다.

덩은 천안문 유혈진압 직전 진압에 반대한 자오쯔양과 후치리를 축출했다. 역시 이 참수로 혼란은 정리됐다.

모선과 정책이 정반대라도 방법은 이처럼 똑같을 수 있는 것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2019/05/10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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