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5/20 11:59



[今歷단상-5월14일]中 퍼스트레이디 외교 장칭 트라우마

공산 중국에서 이른바 '퍼스트 레이디 외교'가 시도된 때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196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동반한 왕광메이는 류사오치가 여섯 번째로 얻은 부인으로 당시 40대 초반이었고 이른바 '중국 버전의 재클린 쇼크'를 일으켰다.

왕광메이는 인민복 차림의 남편과 달리 중국 여성의 전통적 복장인 치파오를 입었다. 여기에 목걸이를 목에 둘렀다.

이런 '귀부인 드레스 코드'는 소련보다 더 거칠고 공포스러운 '신생 공산중국'의 이미지를 부드럽게하는 외교 효과를 주었다.

'왕광메이 신드롬'은 여배우 출신 마오쩌둥 당주석 부인 장칭의 여성으로서 질투심을 강렬하게 자극하였다.

장칭은 문화대혁명 초기 군중집회에 끌려나온 왕광메이의 목에 물병 등 잡동사니로 목걸이를 만들어 쒸워 모욕을 가했다.

왕광메이의 '귀부인 코스플레'에 대한 장칭의 뼈속에 새겨 놓았던 분노와 증오가 폭발한 보복이다.

장칭은 마오의 네 번째 부인으로 왕과 동병상련 처지였으나 나이가 7세나 많고(왕광메이 1921년생 장칭은 1914년생) 학력도 낮았다.

일찌감치 장칭이 연극단에 들어가 영화배우가 된 반면 왕광메이는 베이징 소재 푸런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물리학 석사가 됐다.

장칭은 풀뿌리 공산당원인 반면 왕광메이는 공산당과 동반자적 관계에서 출발하여 뒤늦게 공산당원이 된 '강남 좌파' 출신이었다.

왕광메이는 마오가 '공산당의 뛰어난 자산'이라고 말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력도 출중했다.

인도네시아 방문시 '붉은 재클린' 스타일의 파천황 외교를 펼쳤는가 하면 남편이 문화대혁명 초기 홍위병 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몰릴 때 적위대를 조직하여 마오의 직접 개입이 있기 전까지는 홍위병 세력을 제압하였다.

장칭은 마오의 탈권 뒤 '왕광메이 반대면 무조건 옳다'로 일관했다.

항상 대중 집회에서는 인민복 차림이엇으며 미소마저도 '남자 잭 니콜슨'이라 불릴만한 '킬러 스마일'을 연출했다.

장칭의 이러한 '왕광메이 트라우마'는 장이 실각한 뒤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의 '제1부인 외교'는 장쩌민이 1993년 3월 8기 전인대 1차 회의에서 총서기로서 국가주석을 겸임한 후 다시 시작되었으나 후진타오 부인에 이르기까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아마도 적극화하지 않은 데는 자의반 타의반 영향 탓이었으리라.

시진핑 집권 뒤 외교상품 가치가 풍부한 펑리위안의 퍼스트 레이디 외교가 다소 활발해지기는 했으나 '왕광메이'에는 한참 못미친다.

중국 선전매체가 제1부인 외교를 '로키'로 가져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펑리위안이 가수 출신의 연예인 전력인데다 공교롭게도 장칭과 마찬가지로 산동성에서 태어난 사실이 치명적 악재가 된 듯 하다.

어쨌든 '왕광메이 이전에 왕광메이 같은 주석 부인은 없었고 왕광메이 이후에도 왕광메이 같은 퍼스트 레이디 외교는 없다'라는 탄식과 '장칭 트라우마가 중난하이 하늘 위를 배회하고 있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재클린이 백악관을 떠난지 5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넘사벽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육영수 여사가 강렬하게 뿌려놓고 간 '사임당 모드'가 부처님 손바닥이 된 것처럼 말이다.
<盲瞰圖子>

2019/05/15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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