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9/15 14:29



[今歷단상-6월4일]토사구팽 수성설계 터미네이터식 퇴장

1989년 5월과 1991년 8월 중국과 소련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의 최대 위기 순간에 아주 대단히 비슷한 응전을 취했다.

중국은 수도 일원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 학생 시위대가 장악한 천안문 광장의 질서를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소련은 체제의 근본적 전환이라는 개혁 드라이브를 단호하게 저지하겠다며 휴가 중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연금했다.

그리고 야나예프 부통령, 야조프 국방장관 그리고 고르비의 대학동창이자 절친인 두마( 연방국회)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고르비의 축출을 선언하고 수도 모스크바의 질서 유지를 위해 군대를 동원한다고 밝혔다.

소련 버전의 '테르미도르 반동'이었다. .

중국에서는 6월4일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군에 의해 천안문 광장이 유혈 접수됐다. 그 30년 뒤인 오늘 현재까지 중국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군부 중심의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났고 소련 체제는 4개월 뒤 붕괴됐다.

'동풍이 서풍을 제압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 단초는 수도에 진입한 군의 대응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계엄령 다음날인 5월21일 베이징으로 진입하려다 시위대의 인간띠에 막혔으나 6월4일 밤 총격을 가하며 천안문 광장에 들이닥쳤고 탱크와 장갑차로 저항하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렸다.

소련 군대는 탱크 위에 올라선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했다.

연금되어 유고 상태에 빠진 연방 대통령 고르비를 대신한 옐친이 반쿠데타의 중심으로 우뚝 선 순간이었다.

그 순간 공산독재 체제의 운명은 결정됐다. 옐친은 훨씬 앞서 공산당을 탈당했다.

중국 공산독재 체재는 피바다를 이룬 가운데 살아났고 소련 공산 독재 체재는 총성 한번 울리지도 못하고 불가역적 붕괴의 나락으로 급행했다. 태산명동 서일필처럼 허망하게.

중국에서도 민주화 시위대는 용감하고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옐친과 같은 '태풍의 핵'은 없었다.

인민해방군의 탱크도 그 앞을 막아선 청년에 물러섰으나 그 청년은 무명 인사였다.

1989년 중국 산당도 심각하게 분열됐고 1991년 소련 공산당도 반쪽이 났었다.

중국 경우 계엄령 표결에서 중국공산당 상무위는 3대2로 갈렸다. 공산당의 양대 축인 조직 부문과 선전 부문도 둘로 나뉘었고 군도 양분됐다.

소련에서도 연방 부통령과 국방장관 그리고 연방의회 두마 의장이 반고르비 진영에 가담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독재 체제가 지금까지 도리어 강화 유지된 것은 건곤일척의 위기를 극복하고 상황을 장악한 뒤 인민의 우려와 반감을 선택적으로 흡수하는 조치를 발 빠르게 취했기 때문이다.

유혈 진압의 최종 결정권자 덩샤오핑은 6월 하순 13기 4중전회에서 유혈진압과 관련된 총리 리펑과 공안 부문 최고 담당자 차오스를 배제하고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상하이 시당 서기 장쩌민을 총서기로 낙점했다.

같은 해 11월 5중전회에서 덩은 공산 중국의 최고 실권자 직위인 군사위 주석직을 내놓고 이를 장쩌민에게 물려주었다.

'굴러온 돌'에게 앙앙불락하며 반전의 의지를 불태우던 리펑과 차오스 등 경쟁자의 추격 의지를 꺽게 했다.

1992년 14대에서는 양상쿤과 양바이빙 등 이른바 양가장으로 불리던 군권의 실세로부터 군권을 박탈했다.

공산 중국 버전의 소련 8월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한 사전 선제조치였다.

1995년 4월에는 베이징 서기 천시퉁을 숙청했다.

이로써 토사구팽이 완결했다.

다시 2년 후 1997년 2월 덩샤오핑 자신이 죽었다.

이는 영화 터미네이터 2편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분한 원조 터미네이터가 업그레이드된 후발 터미네이터를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불가역적 종말을 맡게 한 뒤 자신이 그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 장면을 연상시킨다.

덩샤오핑 사망 수개월 뒤인 1997년 8월 말 15대에서 차오스는 자진 실각했다.

이로 인해 천안문 유혈진압 핵심 책임자들은 덩 자신을 포함 권력 정상에서 단계적으로 배제되어 포스트 천안문 사태 중국공산당은 수성(守成) 단계 순조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소련에서 고르비는 연금에서 풀려나 모스크바로 복귀한 직후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공개 발언함으로서 옐친과 싸움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스스로 자초했다.

결국 이 같은 고르비의 순간의 실언이 소련 공산체제의 사느냐 죽느냐 승부에서 '엄지 다운'쪽으로 불가역적 매조지하고 말았다.

1999년 12월31일 옐친은 러시아 대통령직을 건강상 이유로 사임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임명하였다.

푸틴 체제는 20년째 러시아에서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 이는 덩샤오핑 버전의 러시아 수성으로 볼 수 있겠다.

30년간 지속하는 공산 중국의 '1989년 6월 체제'와 20년째 지속되는 '러시아의 차르 체제 '는 모두 흔들리는 조짐이다.

양쪽 모두 정치개혁을 등한시 해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으로부터 '시저 버전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기에 그 위기 상황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2019/06/05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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