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0 05:20



[今歷단상-8월4일] 적과 동침은 해도 무능과는 손도...

2차대전 종전 후 공동의 적인 파시즘 세력 일소되자 전후 질서의 헤게모니를 놓고 손을 잡았던 반파시즘 세력이 분열했다.

한쪽은 사회주의 세력으로 일단 단일대오였으나 그에 반대되는 세력은 자본주의 세력과 전통주의 세력 등으로 반사회주의에는 일치했으나 일사불란하지 않고 복잡했다.

2차대전의 참혹한 전쟁을 겪은 뒤라 양 진영은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유라시아 동쪽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 교섭이 이루어졌다.

전통세력인 국민당이 압도적 군사력을 보유했고 따라서 갑이었다. 공산당도 이를 인정, 공산당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이 국민당의 지도자가 있는 충칭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1945년 10월10일 이루어진 합의는 3개월 뒤 사실상 깨어졌고 합의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내전에 돌입했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발칸 반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진행됐다.

반파시즘 이란 점 외에는 적대적인 양측의 협상 시점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이었다.

유고 왕국의 군사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와 공산 게릴라 조직의 수장 요시프 브로즈 티토였다.

미하일로비츠가 거느린 군사 조직 체트니크는 티토의 파르티잔 군사 조직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고 왕국의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전투를 벌여왔으나 나치 독일군이 공동의 적이 되자 협력을 모색한 것이다. 그렇지만 회담은 결렬됐다.

회담 후 회담장 밖으로 나선 미하일로비치의 얼굴 표정은 밝았으나 티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티토가 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 4월 뒤 갑을 관계는 바뀌었다. 티토의 파르티잔 군대가 조직이 와해된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 게릴라 조직을 반란군으로 규정, 소탕 작전에 나선 것이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을 당한 미국은 태평양 전선에서 고전하며 중국 국부군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제2전선을 구축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했으나 무능한 국부군은 그 바람을 철저하게 무산시켰다. 혹을 떼려다 혹을 더 붙인 셈이 되었다.

1944년 옌안 공산군 본거지를 방문한 미군 시찰단은 무능 부패한 국부군과 전혀 다른 공산군을 보고 희망을 발견했다.

1940년 펑더화이가 중국 대륙 후방 지역에서 전개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이)라 명명된 게릴라전은 결국 일본군에 격퇴되기는 하였으나 일본군 대규모 병력을 묶어두는 제2전선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었기 때문이었다.

티토와 미하일로비치 회담 결렬 뒤 따로따로 나치 독일군과 맞선 체트니크 게릴라와 파르티잔 게릴라는 전과에서 전혀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나치 독일군의 대병력의 발을 묶어 제2전선 기능을 확실하게 수행한 반면 미하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 게릴라는 무력했다.

체트니크 게릴라는 주민의 협력과 지원에 크게 의존하여 그들의 공세 뒤 주민은 하나같이 가혹하고 철저한 나치군의 보복을 받았다.

그러나 티토군은 주민의 지원을 구하지 않고 자체 보급을 구축하여 주민의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었다.

영국 처칠은 '악마와도 협상하겠다'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였다. 영국은 티토 지원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주민의 협력과 지원이 봉쇄된 데다 영국의 지원마저도 사라져 체트니크 게릴라 조직은 급속히 약화했다.

설상가상으로 1944년 독소전선에서 전세가 소련에 유리하게 반전되면서 폭망 수준이 되어버렸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 중재에 나선 미국은 갑의 편이 아니었다. 갑인 장제스의 국부군은 개전 시점에서 실기했다. 미국은 갑을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을에 기울어진 행동이었다.

개전 시점이 늦춰진 사이 만주의 공산군이 소련으로부터 풍부한 군사물자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결국 국공내전은 공산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국과 영국은 국부군이 크게 밀리게 되자 정신이 버쩍 든 듯 빠진 독에 물을 붓듯 국부군을 나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승패가 결정되자 2차대전 기간 동맹국이던 중화민국과 '매정한 작별'을 선언했다.

1950년 1월 초 영국은 공산 중국 즉 중화인민공화국을 국가 승인하고 미국 트루먼 행정부는 영국을 바짝 뒤따랐다.

'애치슨라인'을 그어 대만섬으로 쫓겨난 중화민국을 미국 방위선 밖으로 내팽개쳤다.

유고 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 잔존부대는 초반에 무너졌고 쫓겨다니던 미하일 로비치는 1946년에 측근과 함께 체포됐다. 연합국 측이 한 조치는 단지 미하일로비치의 구명이었다.

티토는 단호하고 즉각적으로 미하일로비치와 측근 모두를 처형했다.

유능한 적과는 때로는 동침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능한 옛동지는 매정하게 손조차 뿌리친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2019/08/0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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