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2/16 22:50



[今天歷史-2월13일]김정남 암살, 청일전쟁 강화 교섭

1912년 2월13일 손문(孫文 : 쑨원)이 중화민국 임시 정부 참의원에서 임시 대총통을 사임하고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를 후임으로 추천했다.

1911년 10월10일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나자 손문이 이끌던 혁명세력은 1912년 1월 1일 난징(南京)에 임시정부를 수립한 뒤 손문을 임시 대총통에 추대하여 중화민국을 성립시켰다.

한편 청조는 북양군벌의 지도자 원세개를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하여 남북의 군사적 대결구도가 형성되었다. 손문은 열강세력의 간섭과 혁명파 내부의 분열 등으로 인해 혁명의 철저화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혁명세력은 청조 타도라는 목표에는 일치하였으나 중국의 미래 정치형태를 놓고 손문의 삼민주의와 5권 붆립에 의한 대통령 중심제와 유사한 총통제 하의 공화정 외에 입헌파, 연성자치파(聯省自治派), 평화회의파(和平會議派) 및 상인정부파(商人政府派) 주장 등이 백가쟁명하는 양상이엇다.

심지어 손문이 이끌던 중국 동맹회 내부에서도 숭자오런(宋敎仁)은 국무총리에 실권을 부여하는 일본식의 내각 책임제를 지향하는 입장으로 노선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세개 입장에서도 모든 성이 독립을 선언하는 혁명적 상황을 거스를 수 없는 처지였다.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다고 인식한 양측은 타협책으로 선통제(宣統帝) 퇴위와 함께 공화정을 수립하는 대신 대총통의 지위는 원세개가 차지하기로 한 것이며 손문의 사임과 원세개 추천은 이러한 합의에 따른 것이다.

손문과 원세개의 타협에 따라 만주족의 청조는 멸망하고 한족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중화민국이 성립되게 되었다.

1895년=청나라 정부는 이홍장(李鴻章)을 ‘수석전권대신(頭等全權大臣)’에 임명, 청일전쟁 강화협상을 벌이도록 했다.

청일전쟁(중국은 이를 '중일 갑오전쟁甲午戰爭'으로 부른다) 발발 후 청나라 군대는 평양, 황해, 뤼순(旅順), 동북(東北) 지역의 전투에서 연전연패 하였으며 이홍장 임명 하루 앞선 2월 12일에는 웨이하이(威海)의 북양해군이 항복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청나라 정부는 화친을 줄곧 주장해 온 이홍장에 강화협상의 전권을 부여한 것이다.

이홍장은 자신의 아들 이경방(李經方)과 미국인 고문 포츠담 등 10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일본을 방문, 3월 20일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와 협상을 시작했다, 30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으며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측은 휴전조약을 우선 체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일본 측이 응하지 않고 강화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협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이홍장이 숙소 근처에서 저격되어 부상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측은 구미열강의 비난이 두려워 이홍장의 요구대로 휴전조약을 먼저 체결하고 잇달아 11개조로 된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청나라는

① 조선이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② 랴오둥(遼東)반도,·펑후(澎湖)열도와 대만을 할양하며
③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④ 청나라 내의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 충칭(重慶), 사스(沙市)를 개시(開市)하며, 개시,개항지에서 일본인의 상공업활동을 승인하고
⑤ 청일 통상항해조약을 새로이 구미열강과 같은 조건으로 맺고, 일본의 치외법권, 편무적 협정관세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조인 직후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이른바 3국간섭이 시작되자, 일본은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였다. 강화조약의 비준서교환은 청나라 측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고 5월 8일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한반도 장악을 위한 주변 열강의 경쟁에서 중국이 탈락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나라 역사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은 베트남 여성과 인도네시아 여성 등 2 명에 의해 독극물로 암살됐다(2017년). 이들 2명의 여성 실행요원은 액체 독극물 VX를 김정남 안면에 문질렀고 김정남은 공항 의무실로 옮겨졌으나 곧바로 숨졌다..

김정남은 김정은과의 벌인 후계경쟁에서 밀려난 뒤 북한에서 출국, 중국의 보호 아래 가족과 함께 마카오에 거주하면서 말레이시아 등 외국을 넘나들며 생활해왔다.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은 김정남 암살에 북한 당국의 관여가 있엇다고 발표했으며 우리나라 국정원은 북한은 김정남 암살에 대해 '언제라도 실행할 수 있는 명령(standing order)를내린 상태였다고 말했다.

말레이시아와 북한은 김정남 암살사건으로 긴장 관계가 빚어졋다.

그러나 결국 말레이시아 정부는 자국민 보호 원칙에 따라 암살관여 혐의를 받는 주말레이시아 북한 대사관원과 고려항공 직원 등 2명을 북한 주재 말레이시아 대사관 외교관 및 가족 등 9명과 맞교환 하였다. 아울러 김정남의 시신도 같은 해 3월 30일 북한에 인도했다.

말레이시아는 평양 말레이시아 대사관을 폐쇄하고 베이징에서 북한 관련 외교업무를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이로써 김정남 암살의 전모는 암살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진 2명 여성 실행범의 바로 윗선에서 끊어져 미궁에 빠지게되었다.

한편 김정남의 장남 김한솔 등 김정남 가족은 서방국과 반북한 단체의 도움으로 마카오에서 빠져나와 서방 모처로 안전하게 피신했다.

2020/02/1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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