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5/28 00:22



[今天歷史-5월21일] 상하이 증시 주가 전면 자유화

왕안석, 美 태평양 비키니섬서 수소폭탄 실험, 라지브 간디 암살, 수하르토 사임, 카터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해임

1992년 5월21일 상하이(上海) 증권거래소가 주식 가격을 전면 자유화했다. 이로써 상하이 증권시장은 명실상부한 자본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가격 자유화 조치는 하루 전에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상하이의 개인투자자들은 이날 상하이의 3대 증권회사인 ‘신은(申銀)’, ‘만국(萬國)’, ‘해통(海通)’으로 몰려들어 주변 교통이 마비되었으며 해통증권의 경우에는 철제 난간이 밀려든 고객으로 인해 무너지기까지 했다.

이날 내국인을 대상으로 한 상하이 증권교역지수는 5456을 기록했고 거래액도 5억여위안이며 이중 주식 거래액은 3억6000만 위안이다. 모두가 그간의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1086년 = 중국 역사상 ‘개혁’의 상징적 인물인 왕안석(王安石)이 사망했다. 1021년생으로 향년 65세였다.

37세이던 송(宋) 가우(嘉祐) 3년(1058) 개혁을 주장하는 만언서(萬言書)를 올린 왕안석은 1069년 참지정사(參知政事)를 거쳐 다음해인 1070년 재상이 되었다.

왕안석은 신종(神宗)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변법(變法)을 단행, 신법(新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보수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1074년 사퇴했다. 1075년에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1076년에 다시 물러났다.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왕안석의 개혁 목표는 대상인과 대지주의 횡포를 막아 중소의 농민과 상인을 보호하여 세수를 늘리고, 관료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는데 있었다.

그의 개혁 정책 중 핵심은 청묘법, 균수법과 보갑법이다.

균수법은 정부가 지방의 물자를 사들여 다른 지방에 팔아 이익을 얻음으로써 물자 유통을 원활히 하고 물건 값의 조절과 안정을 꾀하고자 한 정책이다.

청묘법은 농민에게 낮은 이자로 농사에 필요한 자금을 빌려주어 지주의 비싼 이잣돈을 얻어 쓰는 일이 없도록 한 정책으로 필요한 재원은 상평창에서 충당하였다.

이 정책은 대지주와 대상인 등 기득권 세력의 이익과 충돌되는 것으로 지배계층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했다.

보갑법은 10집을 1보로, 5보를 대보로, 10대보를 도보로 편성하여 장정을 징집, 훈련하여 민병으로 삼아 평화 시에는 치안 임무를 수행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관군을 돕게 한 정책이다.

이밖에 시역법은 자본이 적은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대상인이 이익을 독차지 하는 것을 막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한 정책이다.

모역법은 역이 면제되어 온 관리 사원으로부터 돈을 받아 실업자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어 역의 형평을 기하고자 한 정책이다.

보마법은 백성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군마로 쓰도록 한 정책이다.

왕안석의 개혁 정책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집요한 반대자는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이었다.

편년체 역사서로서는 최고의 역사서를 펴내어 중국 역사학에 사마천에 버금가는 기여를 한 사마광은 왕안석을 축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정책을 폐지, 원래대로 돌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개혁과 보수가 각각 뛰어난 인물들에 의해 지도되었으나 이러한 갈등이 송나라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왕안석과 사마광의 사후(왕안석보다 2살 많은 사마광은 같은 해에 죽었다)에도 신법당과 구법당의 당쟁은 격화하는 가운데 송나라는 결국 북방 이민족에 쫓겨 회하(淮河) 이북을 내주고 남송으로 쪼그라들었다. 당시 송 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 평가된다.

세계사 속 오늘

미국이 태평양상 비키니섬에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1956).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가 마드라스에서 유세활동 중 폭탄 테러로 암살당했고(1991),

32년간 인도네시아를 통치해온 수하르토 대통령이 연일 계속된 반정부 시위 압력에 굴복, 사임하고 부통령 하비비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1998).

미국의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가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를 타고, 뉴욕~파리 간의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했다(1927).

5월20일 출발했으며 소요시간은 33시간 30분이었다. 그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군계획에 반대한 주한미군 참모장 존 싱글러브 소장을 해임했다(1977).

이는 26년 전인 1951년 4월11일 만주폭격론을 주장, 한국전 확대를 주장한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유엔군 사령관 겸 일본 점령군 최고 사령관, 미 태평양 총사령관)를 트루먼 대통령이 해임한 것과 마찬가지의 문민통제 원칙에 따른 군통수권 행사였다.

당시 민주당 트루먼 행정부는 소련과 3차대전 발발을 우려 다시 또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다. 1950년 10월 38선 돌파와 한만 국경선으로 진격한 것이 공산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가져왔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역시 민주당의 카터 대통령은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 되었기에 싱글러브 소장의 공공연한 주한미군 철수 반대는 군통수권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1951년 해임된 맥아더는 1948년 대선에 앞서 공화당 후보로 거론 됐던 공화당의 사람이엇으며 1977년 해임된 싱글러브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는 카터와 대결하던 공화당의 포드 전 대통령의 입장과 동일했다.

군사 전략적 판단 차이 외에도 양당의 첨예한 정책 차이도 해임의배경이 된 것이다.

트루먼과 카터가 상반된 측면은 핵사용 문제였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핵사용 불사 입장 해임 근거로 삼았는데 반해 카터는 주한미군 철수 반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핵카드를 내놓았다.

카터는 싱글러브 해임 8일 뒤인 1977년 5월29일 북한이 침공하면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로부터 만 22년 뒤인 1979년 5월29일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철회했다.

2020/05/21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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