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5/28 00:22



[今天歷史-5월23일]중·티베트 조약 체결, 鄧 군감축 제시

中 영도간부 자녀와 배우자 상업활동 금지, 노무현 투신, 김일성 소련 방문, 염석산 사망, 인도네시아 공산당 창당. 힘러 자살, 남북한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합의, 한국 대학생 미국 문화원 점거, 탈북 소년 장길수 친척 한국에 송환

1951년 5월23일 중국과 티베트 간에 협정이 베이징(北京)에서 조인되었다. 중국 측 전권대표는 인민정부 부주석 주더(朱德), 리지선(李濟深), 정무원 부총리 천윈(陳雲)이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인민해방군은 1950년 10월 티베트에 진주하였으며 티베트 정부에 대해 베이징에 전권대표를 파견하여 협상에 임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티베트의 2인자 판첸 라마(판첸 알드니 )10세가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자고 적극 주장하고 최고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14세도 중국이 내세웠던‘티베트 해방’이라는 용어를 수용하기로 하면서 판첸 라마를 단장으로 한 전권대표를 베이징에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협정 체결로 1911년 신해혁명 이래 유지되어 왔던 티베트의 독립 상태가 종식됐다.

협정 체결 나흘 뒤인 1951년 5월27일 중국 정부의 티베트 해방이 선언됐다.

협정의 제목은‘중앙인민정부와 티베트 지방정부의 티베트 평화해방에 관한 협의(中央人民政府與西藏地方政府關于和平解放西藏辦法協議)’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짱(西藏 : 티베트) 민족은 중국 국경 내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민족 중 하나로 ‘조국 대가정(祖國大家庭)’의 한 개 구성부분이다;

-시짱 인민의 종교는 보장받는다 ;

-시짱으로부터 제국주의 세력을 구축하고 시장 인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가정으로 들어 와야 한다;

-시짱 지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인민해방군의 시짱 진주에 협조하여 국방을 공고히 하여야 한다;

-중앙 인민정부의 통일적 영도 아래 시짱은 민족구역 자치를 실행한다;

-시짱 민족 내부의 단결을 실현하고 시짱의 실제 정황에 의거하여 시짱의 농목공상업과 문화교육사업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을 개선한다;

-시짱 지구의 일체 대외교섭은 중앙정부가 통일적으로 처리한다;

-중앙 인민정부는 시짱에 군사위원회 군구사령부를 설치한다.

협정 조인 나흘 뒤인 1951년 5월27일 티베트 해방이 선언됐고 1951년 12월1일 협정에 따라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진주했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인 조치였고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군사점령은 1950년 10월16일 사실상 실질적으로 완료됐다.

티베트 일지< 20세기 이후>

1904년 8월3일 = 티베트 불교 최대 종파의 수장이며 티베트의 제1인자인 달라이 라마 13세 영국군이 침공하자 몽골을 거쳐 중국 청나라로 망명.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티베트를 완충국으로 하려 하였고 티베트 달라이 라마 13세는 무력해진 청나라를 대신하여 러시아를 끌어드리려 한데서 비롯한 갈등이 침공의 발발 원인이었다.

영국 침공으로 이해 9월7일 영국과(영국 인도정청) 티베트 사이에 영국과 티베트 간 교역 시장 설치와 외국에 영토 불양도 등 티베트를 영국의 세력 범위로 하고 영국군 주둔을 허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라싸조약이 체결됐다.

현재 티베트 망명정부는 라싸조약 체결을 근거로 티베트가 독립 국가였다고 주장한다.

1906년 4월27일 = 청나라 정부 베이징 조약에서 라싸조약 인정하한 외에 개방 지역에서 영국의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군대 추가 주둔 허용. 영국은 티베트 영토 점유하지 않으며 정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며 청의 종주권 인정.

1907년 = 라싸조약 폐기
1910년 2월12일 = 달라이 라마 13세 종주권 강화를 위해 1909년 티베트에 진입한 청나라 군대가 수도라싸를 점령하자 인도로 망명

1911년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군대 철수하고 인도에서 귀국한 달라이 라마 13세 티베트 독립 선언.

1914년 3월 = 중화민국과 영국 인도정청 간에 인도와 티베트의 경계선을 정한 시믈라 협정 체결. 경계선을 인도정청 외무장관의 이름을 따서 '맥마흔 라인'으로 부른다.

1940년 2월 22일 = 달라이 라마 14세 5살 나이로 즉위

1949년 8월10일 = 티베트 불교 두 번째 종파의 수장이며 티베트 불교 2인자 판첸 라마 10세 즉위식. 즉위식에는 당시 국민정부의 멍짱(蒙藏)위원회 위원장과 칭하이성 주석이 참석했다.

1950년 8월24일 = 중국 인민해방군 즉 공산 중국군 티베트 진입

1950년 10월11일 = 인민해방군 티베트 본격 장악 시작하여 5일만인 같은 달 10월16일에 티베트 전역 군사점령 완료.

1951년 5월23일= 중화인민공화국과 티베트 간에 협정 체결로 1911년 이래 유지되어 왔던 티베트의 독립 상태 종식.

1951년 5월27일 = 중국 정부 티베트 해방 선언

1954년 4월 29일 = 중국과 인도가 ‘티베트(씨장西藏지구와 인도 간 통상 및 교통에 관한 주민 협정을 체결.

첫 머리에 평화5원칙이 삽입됐다. 원칙은 상호 영토주권 존중, 상호 불가침, 상호 내정 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이다.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 지침으로 견지되는 이 원칙을 저우언라이(周恩來) 5원칙'이라고도 부른다.

1956년 4월22일 = 중국 달라이 라마를 티베트 자치위원회 위원장에 임명.

1959년 3월10일 = 티베트 중국에 대해 무장 독립항쟁 봉기. 이달 22일 인민해방군 라싸 점령 무력 진압

1959년 4월 = 1일 달라이라마 14세 1만여명 추종자와 함께 인도 망명. 2인자 판첸 라마 10세는 중국 전인대 상무위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이후 베이징에서 머무르면서 사실상 억류 생활

1962년 10월20일 = 중국 인도 침공. 국경문제가 원인 배경이었다면 근인 배경은 인도에 망명한 달라이 라마의 망명 정부수립이다.

1964년 4월3일 = 달라이 라마 14세 유엔본부 소재 뉴욕에 티베트 연락사무소 설치

1965년 = 중국 티베트를 자치구의 하나로 편입시키고 시짱 자치구로 명명

1970년 = 판첸 라마 홍위병들에 의한 티베트 문화 파괴활동에 항의하는 7만자 상서 제출하여 마오쩌둥의 심기를 건드려 이후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됨

1979년 = 판첸 라마 연금 상태에서 놓여나 정협 부주석에 선출 복권됨

1980년 = 전인대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

1989년 1월 = 판첸 라마 베이징 억류 30년 만에 티베트에 귀환했으나 1월 28일 갑작스레 입적

1989년 3월 = 5일 라싸서 독립 무장항쟁 봉기 30주년을 닷새 앞두고 대규모 독립 시위. 중국 7일 계엄령 실시하여 진압시킴.

당시 시짱 서기는 후에 총서기가 되는 후진타오이고 총서기는 자오쯔양이었으며 계엄령 선포를 발표한 총리는 리펑이었다.

1989년 12월 = 망명 달라이 라마 14세 노벨평화상 수상

1990년 7월20일 = 장쩌민 총서기 시짱 자치구 시찰. 경제 발전 지원 약속과 '분리주의자' 겨냥하며 사회 안정 강조.

1994년 8월2일 = 중국 각성과 국무원에서 선발한 389명 교사 시짱에 파견
1995년 5월 = 달라이 라마 14세 11대 판첸 라마 지명. 달라이 라마 지명 판첸 라마 중국 정부에 의해 억류됨.

1995년 11월29일 = 중국 정부 11대 판첸 라마 지명.

2001년 3월11일 = 달라이 라마 14세 대만 방문. 당시 대만 총통은 대만 독립을 강령으로 한 민진당 천수이볜.

2011년 8월9일 = 티베트 망명정부의 선출 초대 총리 롭상 상가이 취임.

달라이 라마 14세가 자신이 죽은 뒤 판첸 라마의 경우처럼 중국이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할 것을 우려 망명정부의 총리를 인도를 포함한 전 세계 망명 티베트인들을 유권자로 하여 선거로 선출토록 하고 선출 총리에게 정치권력을 인계,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기로 함에 따라 티베트 역사상 처음으로 선출 총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종파 수장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등은 사망한 뒤 후계자는 티베트 내의 환생자로 판단되는 아이를 찾아내 지명되는데 중국은 판첸 라마 후임 지명에서 이 전통을 이용한 것이다.

총리 선출 선거는 전 세계 망명 티베트인 유권자 8만34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고 결선투표를 거쳐 이해 4월27일에 발표됐다.

2016년 4월27일 = 롭상 상가이 총리 재선 성공.

1985년 = 중공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되었다.

인민해방군의 병력 감축과 구조개혁을 다룬 회의는 6월6일까지 계속되었으며 군사위 주석 덩샤오핑(鄧小平)은 6월4일 연설에서 100만명의 해방군 병력 감축을 제시했다.

덩샤오핑은 연설에서 중국은 기존의 국제정세 판단과 대외정책 목표 등 2개의 중요한 입장에 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덩은 그 하나는 전쟁과 평화 문제와 관련하여 전쟁의 위험이 긴박하다는 종래의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대외정책과 관련하여 소련 패권주의를 겨냥해 모든 국력을 결집하는‘일조선(一條線) 전략’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중국 당 중앙과 국무원은 영도간부의 자녀와 배우자가 상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정을 발표했다.

단(團)급 이상의 영도간부의 자녀들은 국영, 집체, 중외합작 기업가 노동자 자녀의 취업을 해결하고 노동서비스업 외에 일체의 상업 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했다.

2002년 = 중국 공안에 체포된 탈북 장길수군 친척 5명이 한국으로 송환됐다.

1960= 중국 국민정부 시절 산시(山西)성 군벌로 총통부 자정(資政 :고문)으로 있던 염석산(閻錫山 : 옌시산)이 사망했다. 1883년생으로 향년 78세였다.

산시성 우타이(五臺)현 출생으로 1902년 산시 무비학당(武備學堂)에 입학했으며 190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과에 유학하여 졸업했다. 1905년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였으며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이후 산시 도독이 되었으며 국민정부 시기, 이른바 ‘산시 왕국’을 구축했다.

1917~27, 1932~37년에는 ‘산시 먼로주의’를 주장하였다. 풍속개혁과 광공업 진흥에 힘썼으나 토지 문제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반동적 정책을 취하였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의 ‘4·12 쿠데타’ 이후 국민당 제3집단군 총사령관, 육해공군 부총사령관과 산시성 정부주석을 지냈다.

1930년 풍옥상(馮玉祥 :펑위샹) 등이 장제스에 반대하는 군사행동을 일으켰을 때 풍옥상 측에 가담했다가 실패한 뒤 다롄(大連)으로 도피했다.

1931년 타이위안에 복귀했으며 다음해 타이위안의 수정(綏靖)주임에 임명되어 1935년 공산군을 공격하였다. 국민당 제2전구 사령장관이 된 그는 ‘희생구국동맹회(犧牲救國同盟會)’ 라는 항일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그는 1939년부터 반공노선을 분명히 하고 공산군과 전투를 벌이는 한편으로 일본군과도 은밀하게 연계를 가졌다.

국공내전 기간 국민당 측에 가담하였으며 1949년 봄 인민해방군이 그의 거점 타이위안(太原)을 함락시키자 난징(南京), 광저우(廣州) 등지로 피신했으며 1949년 6월 국민정부 행정원장 겸 국방부장에 취임했다가 이해 12월 대만으로 옮겨왔다.

타이위안 전투는 국공내전 기간 중 가장 격렬한 전투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희생구국동맹회의 지도자 량화즈(梁化之)는 염석산의 요청으로 타이위안에 머물러 있던 수천 명의 일본군을 앞세운 채 공산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량화즈는 공산군이 1949년 4월 시내로 진입하자 공산군 포로가 가득 찬 감옥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세계사 속 오늘

인도네시아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산당이 창당되었다(1920).

독일 비밀경찰의 최고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 연합군에 체포되어 구금 중 자살했고(1945),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2차대전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전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했다(1960).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화마을 부엉바위에서 투신자살했다(2009). 1946년생으로 향년 63세.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대통령에 재임했다. 북한 국가주석 김일성이 대표를 이끌고 소련을 방문했다(1982).

대학생 73명이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과 관련,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서울 미문화원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1985).

5차 남북 경협추진위가 북한에 대한 쌀 지원과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 관련 합의를 했다(2003).

2020/05/23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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