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17:59



[今天歷史-7월10일] 張學良 만주서 소련 축출

베트남 대만에 경제판사처 설치,외몽골 지역 소련 영향 아래 들어가, 미국 세계 최초 실용 통신 위성 발사, 한국전 1차 휴전회담, 남북 적십자 1차 회담
1929년 7월 10일 새벽 장쉐량(張學良)이 군대를 동원하여 제정 러시아가 개발, 소련에 의해 관할되고 있던 중국 동북 지역의 중동(中東)철로 전 구간을 장악했다.

동북 지역, 즉 만주지역의 군벌 장쉐량은 1928년 12월 29일 청천백일기를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 전역에 게양함으로써 난징(南京)의 국민정부에 투항했다.

[今天歷史-12월29일] 東三省 청천백일기 휘날리다

투항 뒤 국민정부로부터 동북변방 군사령장관에 임명되어 기존 자신의 세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게된 장쉐량은 이어 러시아의 제국주의 유산을 접수함으로써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회복하여 국민 정부 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하려 한 것이다.

장쉐량군은 소련 측 요원 200여 명을 체포한 뒤 철로 정-부국장 등 59명을 추방했다. 이와 함께 하얼빈의 소련 외교기구와 경제기구 일체를 폐쇄하였다.

장쉐량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소련은 7월 13일 난징 국민정부에 대해 일체의 탄압활동을 중지할 것과 즉시 회담 개최 등 3개항을 제의했다. 3일 시한의 이 최후통첩에 대해 국민정부는 16일 장쉐량이 취한 조치는 단지 치안확보를 위한 것이라며 소련의 제안을 거부했다.

소련은 다음 날인 17일 난징 국민정부와 단교를 선언하고 주중대사관과 교민대표를 철수시키는 한편 소련주재 중국 외교 관리들의 신속한 출국을 명령했다. 이와 함께 1924년 중소협정에서 중국에 부여한 일체권리를 정지한다고 발표했다.

제정 러시아를 타도하고 수립된 소련은 1919년 카라한 선언을 통해 중국에 대한 제국주의 이권을 포기하겠다고 겉으로는 네세웠으나 실제로는 '붉은 제국주의'국가였다.

중국의 이 조치로 청일전쟁 이래 증대일로를 걷던 만주지역에서의 일본의 영향력도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일본과 러시아를 승계한 소련은 중국에 대한 후발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순망치한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전쟁( 러일 전쟁 ) 까지 벌였던 제정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를 어느쪽도 독점할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 따라 만주 지역을 남북으로 세력 분할 하였고 이는 제정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수립된 소련도 승계하였다.

일본에게 장쉐량의 행동은 위기이자 기회엿다. 한반도의 독점적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자인 청나라와 러시아와 전쟁을 벌엿던 일본은 중국 스스로의 힘으로 한쪽을 축출하자 세력 균형이 무너짐 불안정 상황을 이용, 만주 지역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꿈꾸게 되엇다.

결국일본은 1931년 만주 사변과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바로 하루 전 국민정부의 중국과 만주 지역의 제국주의 유산을 회복하는 조약을 맺었으나 공산 중국이 수립된 다음해인 1950년 2월 이를 포기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만주에 대한 중국의 주권 회수라는 장쉐량의 꿈을 21년 만에 실현시킨 셈이다.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북한 방문, 중소 우호조약

1921년 = 몽골인민 혁명정부 성립. 이후 외몽골 지역은 중국의 통치권에서 벗어나 소련의 영향 하에 들어감.

1993년 = 베트남, 駐대만 대표기구인 ‘주 타이베이(台北) 경제판사처(辦事處)’ 정식으로 설치하고 업무를 개시.

1966년 = 중국 공산당 중앙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 해임, 후임에 타오주(陶鑄)임명. 이 인사는 문화대혁명의 본격화를 알리는 것이었음.

세계사 속의 오늘

노르웨이가 그린란드 합병을 선언했다 (1931).

미국의회가 농산물의 수급안정과 저개발국 무상원조를 위한 법률인 PL480을 가결했고(1954), 미국이 세계 최초의 실용 통신위성 '텔스타(Telstar) 1호'를 발사했다 (1962). 근지점 948㎞, 원지점 5636㎞, 주기 157.6분의 궤도에 진입한 이 인공위성의 무게는 77㎏이었다. 발사 다음날 미국∼유럽 사이의 전화 및 텔레비전 중계에 성공하여 우주통신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텔스타 1호를 이용하여 다중전화·사진전송·고속데이터전송·컴퓨터제어·일기도전송 등도 시도하였으나 4개월 뒤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고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해 5월 7일 2호가 발사되었는데, 원지점이 1만㎞로 끌어 올려져 이용가능시간과 범위가 증대되었다. 현재의 통신위성은 이런 종류의 이동형이 아닌 정지형이다.

프랑스 의회가 페탱 원수를 국가원수로 선출함으로써 제3공화정이 종식되었고(1940), 소련 비밀경찰의 최고 책임자 베리아가 직책을 박탈당하고 체포됐다(1953).

라프렌티 베리아(Lavrentii Pavlovich Beriya : 1899∼1953)

소련 정치가. 그루지야( 현 조지아) 출생. 스탈린 시대 대숙청 조직자 중의 한 사람으로 그는 동서 진영을 막론하고 비밀정보기관과 공포 정치의 상징이었다.

1917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1년 그루지야 공산당의 제1서기가 되었으며, 1934년 같은 그루지야 출신인 이오시프 V.스탈린의 후원으로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8년 말 내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뒤의 치안기관을 맡았다. 1941년 인민위원회 부의장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원수(元帥)로 임명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정치국원, 정치범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고, 군사기술, 특히 로켓과 원자폭탄 개발에 주력햇다. 또한 동유럽권 적화 과정에서 동구권 국가의 치안조직까지도 장악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G.M.말렌코프, V.M.몰로토프와 함께 집단 지도 체제를 실행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정한 자유화를 내세웠으나, 권력투쟁에패배하여 실각했다. 1953년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말에 총살되었다.< 그의 최후와 관련 이러한 정설 외에 그에게 조그마한 틈이라도 주면 당할 것이라는 공포심에서 다른 정치국원들이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힘을 합쳐 그를 목 졸라 죽였다는 '전설'도 있다.


바하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1973), 한국-일본-홍콩간 해저 광케이블이 개통됐다(1990).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의약분업의 원외처방이 처음으로 시행됐고(2000), 영국 런던 대영 박물관에 한국 전시실이 마련됐다(1997).

해방 후 최초로 전문학교 및 대학교 입학시험이 실시됐다(1946).

제 1차 한국전 휴전회담 개성에서 열렸다(1951).

국회 정.부의장 선거에서 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조봉암과 윤치영을 각각 선출했고(1952),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인혁당 사건의 피고인 21명에 대한 공판을 열어 7명에 사형을 선고했다(1974).

2020/07/11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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