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1 01:05



[今天歷史-7월22일] 미군시찰단 延安방문

사우디 중국과 수교, 후난성 자치 선언, 체코 주둔 소련군 일시 철수, 소련 제로옵션 제의, 키신저 교차 승인 제의, 경제기획원 신설, 신군부 정부 투자기관 임직원 강제 해직, 박인수 무죄 판시

1944년 7월22일 대령을 단장으로 한 미군 시찰단이 주중 미군총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홍군 최고지도부가 위치한 옌안(延安)을 방문했다. 8월7일에는 2차 시찰단이 비행기 편으로 옌안에 왔다.

이들의 시찰 목적은 전선 후방 지역에서 8로군(八路軍)과 신4군(新四軍)의 작전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양상쿤(楊尙昆, 1907~1998, 1992년 한중수교 당시 국가 주석 역임)의 영접을 받은 이들은 마오쩌둥(毛澤東),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을 만났으며 펑더화이(彭德懷)와 천이(陳毅) 등으로부터 8로군과 신4군의 전투 활약상황을 브리핑 받았다.

이들 시찰단은 옌안 외에 진찰기(晋察冀)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허베이성 일대), 진수(晋綏) 지구(현재 산시<山西>성과 네이멍구 일대) 등 홍군의 항일 근거지 등을 시찰했다.

이들은 시찰을 마치고 미국 정부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중국공산당과 그 무장역량을 중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미군 시찰단을 맞아 옌안에서 발행되던 해방일보(解放日報)는 ‘우방 미국 군사사절단 환영’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시찰단이 미국에게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저항운동에 대한 호의적 평가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주중미군 총사령부의 군사시찰단 파견은 미국의 대중정책 전환 움직임과 연계된 것이었다.

태평양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미국은 중국에서 제2전선 역량 강화를 위해 모든 중국 군대의 통합을 희망했다.

헨리 월레스(Henry Wallace) 미국 부통령은 1944년 6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개선하여 항일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7월 초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국민당과 공산당 군대를 포함한 전 중국군 지휘자로 스틸웰(Joseph Warren
장군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이 한국전 초기 한국군의 작전권을 요구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협정을 통해 맥아더에게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렇게 절박한 상황은 아니어서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의 이 제안은 필연적으로 공산당이 참여한 중국의 연합정부 창설 제안으로 이어졌다. 공산당은 일련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배경 하에서 미군 시찰단의 옌안 방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루스벨트는 결국 장제스와 심한 불화를 보였던 스틸웰을 소환하고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 공산당을 포함한 연합정부를 제안한 가우스(Gauss) 대사도 이해 11월30일 스틸웰의 소환을 주장했던 패트릭 헐리(Patrick Hurley)로 교체했다.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의 대중정책 전환 시도가 좌절된 셈이다.

미국의 대중정책 전환은 유럽에서 처칠이 추구한 유고정책을 본 뜬 것이다. 유고에서는 나치 침공 후 왕정 세력의 게릴라와 티토가 이끄는 공산 세력 게릴라가 별도로 활동했다.

처칠은 티토의 게릴라가 적 후방에서 제2전선을 구축하는데 더욱 효과적인 역할을 하자 그들이 공산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적극 지원했다.

이 결과 2차대전 기간 티토의 게릴라는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티토의 게릴라 세력은 종전 후 벌어진 유고내전에서 미하일로비치가 이끄는 왕정 세력을 격파하고 자체적으로 유고를 공산화하였다.

1940년 8월20일부터 그해 12월5일까지 8로군 부총사령관 펑더화이가 지휘한 백단대전(百團大戰)은 미국에게 영국이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 공산게릴라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했던 것처럼 미국에게 마오쩌둥 홍군의 전략적 가치를 괄목상대하게 만들었다.

스틸웰 등 중국 주둔 미국 지휘부는 국민당 군대의 만연한 부패와 이에 따른 군사적 무능과 비효율에 불만을 품고 처칠이 유고에서 취했던 것처럼 공산게릴라 세력을 적극 지원, 대일 제2전선을 구축하자는 입장을 취했다.

[今天歷史-8월20일] 百團大戰, 중국동맹회 성립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로 미국 민주당 행정부는 2차대전 기간 중국의 유고화를 시도하지 못했으나 이러한 기조는 루스벨트 사후 트루먼 행정부에 이어져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는 것을 방치하고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애치슨라인 발표 등 중국의 유고화를 부단히 추구했다. 이런 중국의 유고화 전략을 무산시킨 것은 한국전(6.25 사변) 발발이었으며 이 전략은 1971년 공화당 닉슨 행정부의 키신저가 부활시킬 때까지 동면해야했다.

1990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뒤에도 대만과 외교관계를 유지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중국과 수교 했다.

이에 따라 대만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단교했다. 이로써 아시아에서 대만과 수교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게 됐다. 한국 역시 2년 뒤인 1992년 중국과 수교를 한다.

1920년 = 상(湘 : 후난 · 湖南성의 다른 이름)군 총사령(총사령관) 탄옌카이(譚延闓 · 담연개) 후난성 자치 선언.

1916년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베이징 정부와 남쪽 쑨원의 혁명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베이징 정부의 패권을 놓고 북양군벌에 뿌리를 둔 군벌들이 각축을 벌여오다 탄엔카이의 자치를 계기로 각 성의 자치운동이 잇달아 전개되었다.

이로써 지역군벌이 해당 지역을 독립왕국처럼 통치하는 다분열 군벌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세계사 속 오늘

체코슬로바키아 주둔 소련군이 철수했다(1968).

두브체크 등 체코 공산당의 개혁파가 당의 지도권을 장악하고 언론자유 등 일련의 개혁을 진행하자 무력시위를 위해 진주했던 소련군이 철수한 것이다.

하지만 이 철군은 이해 8월20일 소련을 주축으로 한 20만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입을 위한 일시적 철군에 불과했다.

2차대전 발발 직전 영국과 나치 독일의 뮌헨협정으로 주권을 상실한 쓰라린 과거를 갖고 있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동구국가에 비해 친소적인 경향이 강하고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지지도 높았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탈(脫)스탈린화가 점차적으로 진행되었다.

민주, 자유화운동이 지식층 중심으로 시작된 가운데 중앙집권적인 관료체제의 위기가 사회적 위기로 연결되었다.

특히 작가, 지식인들의 불만, 슬로바키아 지방의 자치권 제한은 체제의 폐쇄성을 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함께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도 거의 한계점에 이르고 있었다.

1967년에 들어서 6월 작가동맹대회, 10월 학생데모와 경찰의 충돌 등 반체제 운동이 본격화하였으며 이해 12월 당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제1서기 노보트니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두브체크를 중심으로 한 개혁연맹 세력과 정면으로 대결하기에 이르렀다.

1968년 1월 총회에서 노보트니가 물러나고 두브체크가 당 제1서기를 맡게 됨으로써 개혁세력이 승리했다. 이어 3월 노보트니가 대통령직까지 내놓게 되자 개혁파는 정권의 중추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두브체크는 우선 출판물에 대한 검열을 해제했고 그 결과 다양한 주장이 자유롭게 발표되었다. 또한 각종 정당과 단체가 부활하고 국회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4월에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를 내세워 사회제도 및 정치제도 전반에 걸친 민주화를 위한 당의 행동강령을 채택하였다.

구체적으로 ① 재판의 독립 ② 공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③ 사전검열제의 폐지 ④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⑤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보장 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⑦ 경찰정치의 폐지 ⑧ 경제계획의 추진 ⑨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 의한 연방제로의 이행 ⑩ 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 주요 골자였다.

6월에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자유파 지식인들이 '2천어 선언'을 발표하면서 자유화운동은 지식인 계층을 넘어선 민중 전체의 움직임으로 확산하였고 민족주의적 표현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었다.

이 같은 혁신적인 개혁운동에 소련과 당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경계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런 배경 하에서 7월에는 소련군을 포함한 바르샤바조약 기구군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진주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으나 일단 철군한 것이다.

소련은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부와 가진 협상이 결렬하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제 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로 규정하고 마침내 불법적인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이해 8월20일 밤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 5개국 군대 20만명이 체코슬로바키아에 침입하여 두브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소련으로 연행해 갔다. '프라하의 봄'이 끝난 것이다.

이로써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건설투쟁은 좌절하고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합리화하는 한편 동유럽에서 개혁확대를 억제하기 위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른바 '제한주권론'이다.

소련 공산당 이데올로기 담당 정치국원 수슬로프가 입안한 것으로 알려진 이 독트린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1969년 2차례 중소 국경충돌과 1971년 미중접근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군사행동을 둘러싸고 국제적인 항의가 거세지자 곧바로 친소정권을 수립하려던 당초 계획을 철회하고 두브체크를 프라하로 복귀시키고 그와 교섭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결국 1969년 4월 두브체크가 물러나고 후사크가 후임 당 제1서기에 선출됨으로써 소련의 의도대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후 개혁파를 따른 50만명의 당원이 제명 또는 숙청됐다.

이 사건은 그 뒤 동유럽 자유화에 크게 기여한 한편으로 소련이 ‘제한주권론’에 의거, 당시 사회주의국가들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두브체크의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노선은 소련 고르바초프 개혁의 한 모델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를 몰고 왔다.

미국 브레턴우즈서 연합국 경제회의가 개막했고(1946), 소련 무인 우주탐사선 비너스 8호가 금성에 착륙했다(1972).

소련이 미국에 유럽과 아시아의 중단거리 미사일을 완전 철거하는 ‘제로 옵션’을 제안(1987)했고 싱가포르에서는 말레이인과 화교 간에 대규모 충돌이 발생, 5명이 사망하고 192명이 부상했다(1964).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헨리 키신저 미 국무장관이 한반도 문제 해결 위한 4자회담과 남북교차 승인, 유엔 동시가입 등을 제의했다(1976).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가 만세보에 연재를 시작했고(1906), 각종 기념행사에 양력 시행을 결정했다(1908).

조선총독부가 전시학도 동원체제 확립 요강을 시달했다(1943).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됐고(1946), 전남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1950).

서울지법이 한국판 `카사노바' 박인수에게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며 무죄로 판시했다(1955).

국가재건최고회의가 경제재건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경제기획원을 신설했으며(1961), 신군부 정권이 127개 정부투자기관 임직원 1819명의 강제해직을 발표했다(1980).

2020/07/22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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