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17:59



[今天歷史-7월23일] 中共, 인사에 3개 대표론 강조

중국공산당 창당 대회 개막, 중국 농구 선수 미국 망명,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시, 그리스 군사정권 붕괴, 인도네시아 수카르노푸트리 대통령 취임, 왕건 고려 건국

2002년 7월2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새로 제정한 ‘당정 영도간부 선발임용 공작조례’에 의거하여 당간부를 선발할 것을 촉구하는 통지를 각성, 자치구, 직할시의 당위원회, 각 군구 당위, 중앙 각부의 당위원회, 중앙 국가기관 각부, 위원회의 당조(黨組) 혹은 당위, 군위 각총부, 각군 병종 당위 각 인민단체 당위원회에 발송했다.

조례는 1995년 제정해 당시까지 적용하던 ‘잠정조례’를 수정한 것이다. 통지에서 중공당 중앙은 신설 조례가 장쩌민(江澤民)의 ‘3개 대표 중요사상( 3개 대표론
)’을 체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3개 대표 중요사상'에는 기업인에게도 당의 문호를 열어주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는 것으로 발표 당시 분석됐다.

통지는 간부를 임용함에 있어 민주집중제(논의 과정에서 갖가지 의견을 제출할 수 있으나 결정이 이루어지면 이를 반드시 따를 것을 요구하는 공산당의 의사결정 원칙)의 원칙을 준수하고 개인 판단에 따를 것이 아니라 인사(조직)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직능(職能)작용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민중의 알권리(知情權), 참여권, 선택권과 감독권 등 민주감독제도가 충실히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국공산당 1차 전국대표대회(1대)가 1921년 7월23일 오후 8시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 왕즈루(望志路)에 있는, 대표의 한 사람인 리한쥔(李漢俊)의 형 리수청(李書城)의 집에서 개최됐다.

중국공산당은 현재 7월1일을 창당 기념일로 기리고 있으나 실제 창당대회가 개막된 일시에 대해서는 7월20일설, 7월23일설 등 이론이 분분하다.

7월23일 개막설은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언급한 것이다. 한편 7월20일설은 국민당 기록에 나와 있는 창당 개최일이다.

실제 일자와는 관계없이 1차 당 대회가 개최된 1921년을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해로 보는 것이 그간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대륙의 딸'의 작가 장룽(張戎)과 존 핼리데이 부부가 2005년 펴낸 ‘마오쩌둥-알려지지 않은 이야기’(한국에서는 2006년 까치사가 번역 출간)에서 중국공산당은 알려진 것보다 1년 전인 1920년 8월 상하이에서 8명에 의해 창당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1921년 7월의 1대는 창당 후 가진 첫 당 대회였다는 것이다.

창당을 1대가 개최된 때로 늦춘 것은 1대에서 마오쩌둥이 참석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각주에서 코민테른 기관지와 1대를 조직한 모스크바 특사 중 한 사람에 의해 1920년 8월 창당이 확인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주장은 국민당의 창당 경과를 살펴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국민당은 1912년 쑹자오런에 의해 창당되어 1913년 2월 총선에서 압도적 다수당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쑹자오런이 총통 위안스카이의 자객에 의해 암살되고 뒤이어 위한스카이에 의해 국민당도 해산됐다.

쑨원이 비밀조직 중화혁명당을 만든데 이어 대중정당 국민당을 창당한 해는 1919년이었다. 국민당의 첫 전당대회, 즉 1대가 열린 때는 1924년 1월이었다.

국민당은 1대가 열린 1924년이 아니라 1919년을 창당한 해로 기리고 있다.

다시 말해 공산당도 국민당의 경우에서 보듯 창당과 1대가 따로 열렸을 가능성이 높으나 정치적 고려에 의해 1대가 개최된 그달의 첫째 날을 실제 개최 일자와 관계없이 창당일로 기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7월23일설에 근거하여 인민일보가 기록한 내용의 중요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인민일보는 1대 참석자 명단을 언급함에 있어 마오쩌둥을 맨앞에 내세우고 있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은 마오쩌둥(毛澤東), 둥비우(董必武), 천탄추(陳潭秋), 허수헝(何叔衡), 왕진메이(王燼美), 덩언밍(鄧恩銘), 리한쥔(李漢俊), 리다(李達), 류런징(劉仁靜), 장궈타오(張國燾), 천궁보(陳公博), 저우포하이(周佛海) 등 12명이었으며 50여 명의 당원을 대표했다. 코민테른 대표 마링(중국명 馬林)과 니콜라예프(중국명 尼可洛夫 :그리고리 보이틴스키) 2명이 참석했다.

(차이나워처 주 : 당시 중국 산당의 전체 당원은 57명이었으며 실제 참석한 당 대표는 13명이었다. 인민일보는 천두슈의 대리인으로 참석한 바오후이쩡包惠僧을 참석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는 천두슈가 사망하기 전 서구 민주주의로 사상 전향한 때문으로 보인다. 공산 정권 수립 때까지 마오와 함께 공산당에 있은 둥비우를 마오 다음으로 적고 국민당으로 전향한 장궈타오와 일본에 협력한 천궁보 등은 맨 뒤쪽으로 돌렸다. 리다도 마오와 둥과 함께 공산당원으로서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지켜보았으나 그는 공산혁명 활동에 주력하기 보다는 학자의 길을 걸었다. 공산 중국 수립 뒤인 1950년대 말 마오쩌둥과 이론논쟁을 벌여 문화대혁명 초기 핍박을 받아 사망했다)

회의에서 먼저 마링이 보고를 통해 제3 인터내셔널( 코민테른 )의 사명과 중국공산당의 임무를 말하고,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공작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요구했다. 이어 당강령 제정, 실제 공작계획, 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등의 일정에 관해 논의했다.

7월27일부터 29일까지 연 3일에 걸쳐 당의 강령에 대해 토론했다. 7월30일 회의 개최 사실이 발각된 것을 알고 대표들은 그날 밤 회의장소를 옮기기로 하였다.

마침 리다의 부인이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인이어서 다음날 상하이에서 비교적 가까운 자싱의 난후(南湖)로 가서 회의를 속개하기로 결정했다.

7월31일 난후에서 배를 띄어 놓고 1대의 마지막 회의를 개최하였다…….”

[今天歷史-7월 일] 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

1982년 =중국 농구대표단 여자선수 후나(胡娜)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미국 망명을 신청했다.

1954년 = 영국 여객기 1대 하이난(海南)도 부근에서 중국 정찰기의 공격을 받고 격추됨. 18명의 승객 중 9명이 구조됨.

세계사 속 오늘

1942년 7월23일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 스탈린그라드(현 볼고그라드)로 진공을 명령했다. 이는 세계 3대 동계전투로 꼽히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서막이었다.

참고로 3대 동계전투 중에는 한국전 당시인 1950년 11월 말부터 12월 초 사이 미 해병 1사단과 중공군 7개 사단이 벌인 장진호(長津湖)전투가 포함되었다.

히틀러는 독소전선 남부의 군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카프카스의 곡창과 유전지대에, 다른 하나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시켰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 공업도시이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히틀러는 전략적 목적 외에 스탈린의 이름을 붙인 도시를 빼앗음으로써 소련군 지도부에 중대한 심리적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런 만큼 소련군의 저항도 강력했다.

1942년 9월 F. 파울루스 장군 휘하의 제6군을 주축으로 한 33만의 독일 연합군(선봉은 독일군이 맡았지만 후방의 보급선 보호 임무는 독일이 점령한 국가에서 징발한 군대에게 담당하게 했다.

이것이 독일이 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단초가 되었다)은 시내에 돌입했으나 시가전이 격렬하여 소련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다.

소련군은 반격계획을 세워 그해 11월19일 독일 측 루마니아 제3군을 공격하여 남서쪽으로 패주시켰다.

20일 루마니아 제2군도 쫓아내고 23일에는 양쪽 방향에서 루마니아군을 공격한 소련군이 합류함으로서 스탈린그라드 도심으로 진출해 있던 독일 제6군을 포위하였다.

파울루스는 제6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기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모든 원조를 약속했다.

그러나 공군 원수 괴링에 의한 공수보급(空輸補給)은 요구의 1/7에도 미치지 못했고 F.E. 만슈타인 원수의 포위 돌파작전도 실패했다(장진호 전투에서는 미 10군단 알몬드 소장이 중공군 개입이 있기 전 간이 활주로를 건설해두었기 때문에 보급을 확보할 수 있었고 포위된 해병사단의 '뒤로 돌격'이라는 구호가 말해주듯이 포위망 돌파에 전력을 다해 성공적인 철수를 할 수 있었다. 이후 10만의 피난민을 수송하는 '흥남철수'를 통해 전쟁의 명분을 확보함으로써 '영광의 후퇴'가 될 수 있었다).

1943년 1월 소련군은 포위망을 좁혀 시내에 돌입하여 항복을 권고했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 허가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원수로 승진시켜 격려했다. 명예롭게 자살하라는 요구였으나 파울루스는 1월31일 항복했다.

24명의 장성과 2500명의 장교를 포함한 9만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소련군은 사기가 올라 전면적 반격을 개시, 전세가 바뀌고 독일군은 충격을 받고 수세에 몰렸다.

한편 포로가 된 독일군 중 전쟁 후 독일로 귀환한 수는 불과 6000명이었다. 전염병과 영양실조로 포로의 90% 이상이 사망한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무시한 최고 통수권자의 잘못된 결정이 어떤 참변을 빚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파울루스 경우와 달리 아프리카 군단의 롬멜 원수는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후퇴를 했으며 그 결과 롬멜이 떠난 뒤 아프리카 군단은 항복하기는 했으나 인명손실은 최소화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와 일본 역사에도 이런 비슷한 경우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유재란 당시 국왕 선조 등 조정의 잘못된 지시를 따르지 않은 이순신 장군과는 달리 그릇된 것인 줄 알면서도 이를 충실히 이행한 원균 장군은 이전까지 한번도 패전하지 않은 조선 해군을 칠천량 해전이라는 한 차례 싸움에서 전멸 당하게 만들었다.

태평양 전쟁 때 일본 해군도 도쿄 황궁에 대한 미군기의 폭격을 빨리 중단시키기 위해 조급하게 결전을 서두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인도네시아에서 압두라만 와이드 대통령이 탄핵 당함에 따라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인도네시아의 5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며(2001), 그리스 군사정부가 7년 만에 붕괴하고 민정이 복귀했다(1974).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918).

2020/07/2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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