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05:53



[今天歷史-7월25일] 청일전쟁 개전, 한국전 참전탑

1차 카라한 선언, 버마 루트 개통, 닉슨 독트린 발표, 자본론 1권 완성, 무솔리니 정권 붕괴, 세계 첫 시험관 아기 탄생, 영국-터키-필리핀 지상군한국전 파병 결정, 미8군 사령부 도쿄서 서울로 이전 결정, 한-프랑스 외규장각 도서 맞교환 방식 반환 합의, 동인지 폐허 창간, 전국 기자연맹 결성

1894년 7월 25일(조선 고종 31년) 일본 군함이 조선 서해안의 풍도(豊島) 부근에서 중국 군함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이 개막됐다.
풍도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딸린 섬으로 면적 1.843㎢, 해안선 길이 5.5㎞인 작은 섬 (2019년 86 가구 12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이다. 위치는 동경 126°19′, 북위 37°8′이며 인천광역시 남서쪽 41㎞, 에 위치한 대부도(大阜島) 남서쪽 24㎞ 떨어져 있는 지점에 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의 패권적 지배권을 놓고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간에 60여년에 걸쳐 3차례 벌어진 전쟁의 첫 번째였다.

청일전쟁에서 해양세력인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의 지정학적 역학관계는 일변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조공과 책봉 관계라는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바탕을 둔 중국, 즉 대륙세력이 압도적 우위를 견지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해양세력의 우위로 역전되었고 1904~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또 다시 대륙세력 러시아에 승리함으로써 해양세력의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이 확립되었다.

일본이 1945년 2차 대전에서 패배한 뒤의 한반도는소련이 대표하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미국이 38도선을 경계로 대치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균형은 1,000년 이상 단일국가로 지속돼 온 한반도를 기계적으로 분단한 것으로 기형적이었다.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중첩되어 남과 북에서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북한은 동서 2면만이 바다이고 남쪽 한 면이 막힌 '불구의 반도'가 되어 대륙성이 강화되었다. 반면 남한은 대륙과의 연결이 끊어진 채 3면이 바다인 '불완전한 섬'이 되어 해양성이 짙어졌다.

1950년 소련의 지원과 중국의 동의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은 이를 타파하기 위한 시도였다. 만일 이것이 성공했다면 한반도에 대한 대륙세력의 배타적 영향력이 복원됨으로써 1894년 이전 체제의 구조로 돌아갔을 것이다.

한편 미국이 대표한 해양세력 또한 6.25룰 계기로 한반도에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를 했으나 중국의 개입으로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은 1953년에 이르러 1945년에 엉겁결에 수립된 기형적 힘의 균형의 틀로 복귀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소모전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한민족에게는 비정상적인 이 분단 상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66년 째인 2019년 현재까지도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불안한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억제해왔다.

이렇게 된 데는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모두 6.25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을 구축하려는 시도가 막대한 비용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러한 비용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그 목표를 실현시킬 가능성이 희박하고 설사 성사시킨다해도 오래 유지할 수 없다는 인식을 공유하였기 때문이다.

'불구의 반도'인 북과 '불완전한 섬'인 남은 이후 각각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에 포섭되는 가운데 상호 대척적인 발전모델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남북은 이질화하였고 그 성취 또한 크게 달라짐으로써 한반도의 기형성은 심화하였다.

1953년 휴전 이후 66년동안 남북 국력의 비대칭성( 2014년 기준 남북의 1인당 GDP는 22대 1) 과 주변 국제정세의 변화는 한반도의 이 기형적 균형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강요하고 있는 형국이다.

'21세기 판 천동설'을 고집하는 붃한의 핵 개발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반동적 몸부림이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2018년 4월 27일 남북 정상 회담과 같은 해 6월 12일 북미 정상 회담을 통해 비핵화를 공개적으로 약속하였으나 이것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인지 아니면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시간 끌기인지 여부는 아직 모호하다.

따라서 불가피한 변화의 압력을 연착륙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가 우리에게 지워진 역사적 소명이다.

하지만 배부른 돼지와 궁지에 몰려 고양이를 무는 쥐의 비유는 아직도유효하다. 잔뜩 경계해야한다.

(참고로 2017년 한반도선진화재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북한 ‘종합국력은 남한을 100으로 할 때 평시에는 62.1로 전시에는 97.8로 평가됏다.

통일’과 ‘선진화’를 주제로 연구하는 민간 싱크탱크 한반도선진화재단이 국가보훈처의 의뢰를 받아 2016년 12월~2017년 2월 수행한 연구용역 결과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남한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2015년 남한 국민총소득은 1565조8155억원인데 반해 북한은 남한의 45분의 1에불과한 34조5120억원
이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南韓)보다 군사력은 2.2배, 정보력은 1.3배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경제력과 군사력 외에 기초국력, 경제력과 같은 하드파워와 과학기술력, 국정관리력, 외교력 등 ‘소프트파워’를 망라하여 ‘종합국력’을 비교하면 남한이 100점으로 간주할 때 평시와 전시의 경우 북한은 각각 62.1점, 97.8점인 것으로 추정됐다. 바꿔 말하면 평시엔 남한의 국력이 북한에 크게 앞서지만, 전시엔
양측이 엇비슷한 힘으로 맞붙게 되는 셈이라고 이 기관은 판단햇다.

한반도 전장(戰場) 특수성과 북한의 양적(병력 ) 우세 극대화 전략 탓에 무기체계의 질적 차이는 무의미해진다고 분석됐다.

간첩·남한 언론 통해 정보 취득하는 북한의 정보력은 남한의 1.3배가 되는 것으로 평가됐다.
⊙ 애국심 낮은 남한 … 자국 역사 자랑스럽다는 답변율은 북한의 5 분의 2수준으로 나타났다.
이 싱크 탱크는 북한 핵무기 개발로 북한 주도의 적화 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햇다. )

청일전쟁은 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기습으로 시작되었고 서전에서 기선을 제압한 일본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통한 개전은 이후 러일전쟁에서도, 태평양전쟁에서도 구사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기습 개전이 지역분쟁이었을 경우는 승리를 보장해주었지만 국제전의 경우에는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북한의 남침도 기습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개전 패턴을 채용한 것이다.

한국전이 국제전화하면서 북한은 기습을 통한 우위를 지켜낼 수 없었다.

풍도해전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7월 25일 새벽 조선 동학 혁명군 진압 지원을 위한 청나라군 병력수송선의 호위임무를 마치고 아산(牙山)에서 기지인 중국의 뤼순(旅順)항으로 귀환하기 위해 풍도 서북해상을 지나던 청나라 북양(北洋)함대 소속순양함 제원(濟遠)호와 군함 광을(光乙)호가 갑자기 일본 군함의 차단 포위공격을 받았다.

같은 시각 청군 병사를 싣고 있던 고승(高升)호가 일본 군함의 공격을 받았으며 호위함 조강(操江)호가 나포되었다. 고승호는 병력수송을 위해 임차한 영국 상선으로 1,000명 이상의 병사가 타고 있었다.

고승호의 청병들은 투항을 거부해 격침됐고 일본군이 유럽인 선원만을 구조하고 청군 병사들과 청나라 선원들은 방치하는 바람에 모두 익사했다.

고승호 공격을 명령한 일본 해군 함장은 러일 전쟁때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섬멸하개되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찌로(東鄕平八郞)이다.

광을호는 포격과 암초에 좌초되면서 일어난 화재로 심각한 손상을 받았다. 제원호의 함장은 백기를 내걸고 항복하려 하였으나 청병의 수병들은 이에 반발, 일본 군함에 포격을 가하는 등 저항을 했다. 이 공격으로 일본 군함 요시노(吉野)호가 타격을 입었다.

제원호는탈출했다.

결국 풍도해전은 일본의 대승으로 끝났고 일본은 이후 한반도 해역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같은 날 일본군 4,000명은 아산과 성환에 주둔해 있던 청병을 공격했다. 총병 섭사성(聶士成)이 이끌던 부대가 패전하자 제독 엽지초(葉志超)는 탈주했고 아산은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청일양국은 1876년 조일수호조약 체결이후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대립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군사적으로 대립, 충돌했던 양국은 1885년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맺어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파병할 경우 쌍방이 미리 통보하고사태가 수습된 뒤에는 즉시 철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양국 군대는 철수했으나 청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의 측근 원세개(袁世凱 ; 위안스카이)는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로서 서울에 상주하면서 조선의 내치와 외교를 간섭하였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원세개는 1905년 을사늑약(을사 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통감 이토오 히로부미와 같은 역할을 하며 조선을 청의 속국화하였다.

이는 전통적 중국과 조선과의 관계가 아니었다. 중국이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편 것인데 제국주의의 피해를 받고 있던 중국의 이 제국주의 대외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 제국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

1894년 조선에 동학농민 혁명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이해 6월 3,000명의 청나라 군대가 들어왔고, 일본은 이에 항의하여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 명목으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갑신정변 이래 10년 만에 청일 양국의 대규모 군대가 한반도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재연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약화되자 조선은 곧 일본군의 철병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의 오토리(大鳥圭介) 공사는 본국 훈령대로 이를 거부하였다.

일본의 궁극적 목적은 동학농민운동의 진압보다는 청나라 군대에 압력을 가하고 조선 조정에서 친청(親淸)의 척족(戚族)을 몰아내어 친일정권을 세우는 데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국에 친일개화정권이 들어서고 갑오개혁이 단행되는 가운데 청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이 전쟁에서 열강들이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 방관하는 가운데 근대적 군비를 갖춘 일본은 일방적인 승전을 거듭하였다.

일본 육군은 이해 9월 평양에서 승리하고 10월 랴오둥반도(遼東半島)로 진격하였으며, 일본 헤군은 황해(서해) 북부의 압록강 하구 부근 해역에서 청나라의 북양 함대(北洋艦隊) 주력 군함들과 벌인 해전에서고전했으나 결국 승리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 해군은 합동 작전을 전개하여 랴오둥 반도의 뤼순(旅順)·다롄(大連)과 산둥(山東) 반도의 웨이하이웨이(威海衛) 등을 공격, 점령하고 북양함대를 섬멸하였다.

[今天歷史-2월10일] 잡지 ‘
인권’ 창간, 북양함대 定遠호 자침


청일전쟁시 침몰 定遠-致遠號 복원 2004/01/28 21:59

[今天歷史-12월17일] 北洋海軍, 瓦窯堡회의, 胡適, 김정일 사망

추억...李自成과 鄧世昌 동상 2015/02/11 12:41

전쟁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을 성립시켰다. 이조약에서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이다"라는 문구를 넣는데 동의하였고 이는 조선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이와 함께 청나라는 배상금 2억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반도, 대만, 펑후제도(澎湖諸島)를 할양함과 동시에 통상의 특권을 일본에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3대 대륙 국가인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이른바 '3국간섭'으로 랴오둥은 반환되었으나, 이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확인되어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 하였다.

일본은 전쟁 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주의국가로 등장하여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충돌하여 후일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1993년 7월 25일 한국전 종전 40주년을 이틀 앞두고 신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중국 단둥(丹東)에서 확장된 한국전참전 기념관(중국명 抗美援朝紀念館) 개관식과 함께 참전기념탑 제막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으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껄끄러운 상태였다.

탑의 제자(題字)인 ‘항미원조기념탑(抗美援朝紀念塔)’은 덩샤오핑(鄧小平)이 썼으며 장쩌민(江澤民), 리펑(李鵬), 그리고군사위 부주석 류화칭(劉華淸)도 각각 기념관을 위해 기념글씨를 써주었다.

이들의 제사는 당시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를 반영하듯 양국 관계의 언급은 없고 참전이 중국에 갖는 의의만을 언급하고 있다.

장쩌민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애국주의, 국제주의 그리고 혁명영웅주의 정신은 영원히 빛나리”라고 썼고 리펑은 “항미원조로 국가를 보위한 위대한 승리를 기념한다”라고 썼다.

한편 류화칭은 “항미원조 전쟁 중 영광스럽게 희생한 열사들의 공은 영원하라”이라고 썼다.

이날 기념식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정치국 상무위원 겸 서기처 서기, 천무화(陳慕華) 전인대 상무 부위원장, 국무위원겸 국방부장, 중앙군사위 위원 츠하오톈(遲浩田)상장, 훙쉐즈(洪學智) 정협 부주석이 참석했다.

1919년 = 소련이 1차 ‘카라한 선언’을 발표했다.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 강요한 불평등 조약의 자발적 철폐를 밝힌 이 1차 카라한 선언의 공식명칭은 ‘중국 인민과 중국의 남북 정부를 향한 호소’이다.

후속문서는 1920년 9월 27일에 발표한 외무인민위원부 명의의 ‘중국 외교부에 대한 각서’로 ‘2차 카라한 선언’으로 불린다.

두 문서 모두 소련 인민위원회의 외무인민위원 대리 레프 M 카라한(Lev M. Karakhan : 1889~1937)이 서명, ‘카라한 선언’으로 불린다.

1 차 선언이 1920년 3~4월 중국에 소개되었을 때 앞서 일본의 21개조 요구 인정으로 인해 파리 강화회의에 실망하고 있던 중국 각계 사람들은 소련정부에 대한 감사와 공감으로 환호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발표한 1차선언과 《이스베스차》 《프라우다(1919년 8월 26일자)》에 게재된 것 및 제 2 차 선언 사이에는 중동철도 무상반환에 관한 문제와 관련, 중대한 차이가 있어 1924년 중·소간 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카라한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페트로그라드 대학 재학 중 정치범으로 시베리아에 유배되었다가 1917년 3월 혁명 후 석방되어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1918년 브레스트 회의의 수행원을 거쳐 외무인민위원 대리가 되었다. 1934년까지 재직하면서 극동(極東)외교에 주력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의 대두를 프랑스 등 서방 세력과 손을 잡아 견제하려는 M. M. 리트비노프의 대두로 실각하여 1937년 총살되었으나 그 뒤 복권되었다.

1939년 = 중일전쟁 시기 중칭(重慶)의 국민정부의 중요한 외부 원조 통로인 ‘뎬몐(滇緬) 공로(公路)’가 개통됨.

‘버마루트’로 통칭되었으며 ‘원장(援蔣)루트’라는 별칭을 갖기도 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의 힘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되는 ‘닉슨 독트린(괌 독트린)’이 발표됐다(1969). 이 독트린은 미군의 베트남 철수와 주한 미군의 감축으로 구체화하였다. 이 독트린 발표 2년 뒤인 1971년 미국의 아시아 전략과 세계 전략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미중 화해가 시작됐다. 그리고 다시 40년 뒤인 2011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 전략이 선언됐다.
이 전략이 '아시아로의 회귀'로 번역되기도 하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괌 독트린의 대반전을 의미한다.

체외수정을 통한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영국 올드햄 병원에서 탄생했으며(1978), 조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 시운전에 성공했으며(1814), 49세의 카를 마르크스가 런던에서 자본론 1권을 완성했다(1867).

엥겔버트 돌푸스 오스트리아 총리가 빈에서 나치 비밀특공대원에게 암살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이 기정사실화하였고(1934),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실각해 파시즘 정권이 붕괴됐다(1943).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46년 간의 적대관계 종식에 합의한 공동선언에 서명했다(1994).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네덜란드가 대한민국을 승인했고(1949), 영국. 터키. 필리핀 등이 한국전에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1950).

미국의 극동 지상군 사령부와 8군사령부를 도쿄(東京)에서 서울로 이전키로 결정했다(1955).

문예동인지 폐허가 창간되었으며(1920) 전국 기자연맹이 결성되었다(1922).

한국과 프랑스 정부가병인양요 때( 1866년, 고종 3년 )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약탈해간 프랑스 소장 외규장각 도서 297권과 국내 고문서를 맞교환키로 합의했다(2001).

2020/07/25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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