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17:59



[今天歷史-7월26일] 李自成 피살, 포츠담 선언

나세르 수에즈 웅하 국유화, FBI 발족, 미 국방부 창설, 김정일 러시아 방문, 노근리 사건 발생, 6.25당시 미군 극동군 사령관 리지웨이 사망, 에바 페론 타계, 동국통감완성

1645년 7월 26일 중국 명나라 말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로 명나라를 멸망시킨 이자성(李自成)이 후베이(湖北)성 퉁산(通山)현 구궁산(九宮山 : 주궁산) 아래에서 현지의 지주(地主) 무장 세력의 공격을 받고 피살됐다. 향년 39세였다.

대순(大順)황제에 올랐던 이자성은 이 때 본대와 떨어져 있어 주위에 단지 28명의 친위병 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이자성은 이들 친위대와 함께 맞서 싸우다 피살된 것이다. 베이징에 입성하여 대순 황제의 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뒤의 일이었다.

명말 농민반란의 지도자인 그는 1644년 3월 명의 주력부대가 청군을 막기 위해 산해관(山海關)으로 나가 있는 틈을 타 베이징을 공략, 점령하였다.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는 이자성 군대가 입성하자 자살했다. 이로써 명은 멸망했다.

이자성은 그러나 산해관을 지키다 명나라 멸망 소식을 듣고 청에 항복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와 청병의 연합공격을 받고 이해 5월 베이징을 내주고 자신의 근거지로 퇴각해야 했다. 결국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관중(關中)을 거쳐 후베이까지 쫓긴 끝에 어이 없게 피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를 몰락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한 데는 오삼계와 한인 지주 무장세력 등 한인(漢人)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외세, 즉 당시 청나라 세력의 침략위협을 받고 있는 가운데 한인들을 통합하지 못한 과오가 그의 몰락과 죽음을 재촉한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뒤 베이징에 입성하기 전 ‘이자성을 잊지 말자’라고 주위에 말했다고 한다.

역사에서 이자성의 경우처럼 군의 최고 지휘관이 소수의 병력으로 전선 지역 또는 적진 깊숙이 들어 갓다가 죽음을 당하거나 낭패의 경우에 처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뀌게 한 경우가 적지않게 발견된다.

중국 역사의 경우에는청나라 멸망 뒤 군벌 시대의 혼란기를 종식시키는 통일을 이룩한 중화민국 국민정부 최고 실권자 장제스가 1936년 12월 장쉐량 군의 공산군 토벌을 독려 하기 ㅣ해 시안으로 측근 만을 대동하고 갓다가 공산 군과 연계된 장쉐량과 양후청에게 구금되어 공산군과의 합작, 즉 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인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는 결국 장제스의 국민당이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엇다.

1870년 나폴레옹 3세는 보불 젅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군을 독려하기 위해 전선 지역인 세당에 까지 갓다가 프로이센 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프랑스 제2 제정의 붕괴와 독일 통일로 이어졋다. 프랑스 제정 체제는 이로써 불가역적 종언을 고햇다.

일본에서는 1560년 전국 시대 말기 일본이 '천황'으로 부르는 군주가 거주하는 교토 부근 남동부 지역의 유력 세력이엇던 오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진영 깊숙이 쳐들어 온 대립하던 세력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대를 급습 그최고 지도자 이마가와 의 목을 벤 오케하자마 전추투가 잇다 이마가와의군 병력은 2만 여 명을 넘엇으며 기습한 오다의 병력은 3 천여 명에 불과햇다. 오다의 이 승리로 그의 부하 도요토미 히데 요시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는 발판을 마련했고 이는 도요토미가 1592년 조선을 침략하는 바탕의 단초가 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백제의 성왕이 신라군과 싸우고 있던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으로 행군하다 신라군의 기습을 받아 포로가 되어 참수당하는 일이 잇었다. 이는 여제 동맹을 통해 수복하고자 하였던 백제가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회복하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배경이 되었다.

나폴레옹도 러시아 원정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1813년 소수의 친위병만을 읶끌고 정찰에나섯다가 다수의 적과 조우하는 위기를
겪은 일도있었다.

나폴레오은 이자성의 경우와는 달리 적병을 격퇴하여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잇었다. 그러나 그는 이자성과 그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당한 엯사적 패배를 막지는 못햇다.단지 조금 늦추었을 뿐이다. 2년 뒤인 1815년 워털루 전투 페배로 불가역적으로 몰락했고 영국에 세계 패권 시대를 넘겨주어야 했다.

추억...李自成과 鄧世昌 동상 2015/02/11 12:41

[胡錦濤시대]화호점정 (畵胡點睛)(1) 2003/02/16 00:38

1945년 =중국과 미국과 영국 등 3국 수뇌가 일본에 대한 전후처리 방침을 담은 포츠담 선언(Potsdam Declaration)을 발표했다.

7월 17일부터 시작된 포츠담 회담 기간 중인 이 날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蔣介石), 미국 대통령 H.S.트루먼대통령, 그리고 영국 총리 W.L.S. 처칠명의로 발표된 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최종적으로 통첩한 선언이다.

공식 명칭은 '포츠담항복권고최후통첩(Potsdam Surrender Ultimatum)'이다.

포츠담 선언 이후 유럽문제로 논의가 집중되면서 회담에 합류한 I,V.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겸 총리도 소련이 얄타회담 때의 약속에 따라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이 선언문에 추가로 서명하였다.

'포츠담선언'은 1943년 11월 27일의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면서 무조건 항복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선언은 모두 13개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제1∼5항은 전문(前文)으로 일본의 무모한 군국주의자들이 세계인류와 일본국민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이 선언을 즉각 수락할 것을 요구하였다.

제6항은 군국주의의 배제, 제7항은 일본영토의 보장점령, 제8항은 카이로선언의 실행과 일본영토의 한정, 제9항은 일본군대의 무장해제, 제10항은 전쟁범죄자의 처벌, 민주주의의 부활 강화, 언론 ·종교 ·사상의 자유 및 기본적 인권존중의 확립, 제11항은 군수산업의 금지와 평화산업유지의 허가, 제12항은 민주주의 정부수립과 동시에 점령군의 철수, 제13항은 일본군대의 무조건항복을 각각 규정하였다.

특히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해 8월 6일과 9일 각각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소련도 8월 8일 참전하자, 일본은 10일 이 선언을 수락했고,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독일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개최된 이 회담은 포츠담 선언 이후에도 8월 2일까지 계속됐다. 포츠담 선언 이후에는 주로 유럽 전후처리문제가 논의되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된 날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 처칠이 총리직에서 사임하였다. C.R. 애틀 리가 처칠 후임 총리가 됐으며 이후에는 애틀리가 회담에 참가하였다

정리하면 포츠담 선언 이후에는 중국 측이이 빠진 가운데 미국 트루먼대통령, 영국 .R. 애틀리, 스탈린이 참석하여 회담을 계속한 것이다.

회담은 독일로부터의 배상금 징수문제와 독일과 폴란드 국경 확정문제를 두고 미국·영국 측과 소련 측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다가 7월 31일 배상문제에 대한 타협안이 이루어졌다.

회담 결과는 '포츠담 협정(Potsdam Agreement)'으로 정리되었다.

이 협정은 총 21장과 2부속서로 구성되어 연합국의 독일점령 원칙으로서 독일의 무장해제와 비군사화, 군국주의와 나치즘의 근절, 민주화, 경제력의 과도집중 배제, 정치기구의 지방분권화 등을 제시하였다.

얄타회담에서 결정된 5D원칙, 즉 비군사화(demilitarization)·비나치스화(denazification)·민주화(democrat-ization)·분산화(decentralization)·비산업화(deindustrialization)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협정은 당분간 독일에는 중앙정부를 두지 않되 독일을 단일 단위로서 다루며, 분할을 궁극의 방침으로 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이어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 작성을 위하여 외무장관이사회 설치와 배상금 징수를 결정하고, 영토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규정하였다.

서방 여러 나라는 그들 점령지대에서 배상을 받아내고, 소련은 자기 점령지대에서 얻는 것 외에 추가로 서방점령지대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의 25%를 받을 것, 오데르 강에서 나이세강에 이르는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독일의 동부 국경으로 삼을 것, 단 그 최종결정은 연합국의 완전한 의견일치에 따르도록 하되 미국·영국·소련 3개국은 오데르-나이세 라인을 지지한다는 것 등을 약정하였다.

8월 2일 미국·영국·소련 3국이 합의·서명한 이 협정은 프랑스를 배제한 채 이루어져 그 뒤 독일문제에 분규를 불러일으킨 한 원인이 되었다.

이 협정으로 그 뒤 냉전 상황에서 분단으로 이어진 독일의 분할점령이 확정되었다

회담에서는 이밖에도 오스트리아 점령지 문제, 동유럽에서 소련의 역할 문제 등이 논의되었다.

1930년 = 안창호, 김구 등 민족지도자들이 중국 상하이(上海)서 한국 독립당을 결성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라이베리아가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 중 최초로 독립했으며(1847),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화를 접수해 국유화하였다(1956).

미 연방 수사국(FBI)이 발족했고(1908), 미 국방부가 창설되었다(1947).

미 국방부는 안전보장법에 의거, 육해공 3군의 장관 위에 국방장관을 두고, 각의(閣議)에 출석하는 것은 국방장관만 하게 하여, 3군을 정치적으로 통합한 것이다. 국방장관에는 민간인을 임명, 군에 대한 문민통제(Civilian Control)를 구현했다. 구체적으로는 군에서 예편한지 10년 넘어야 한다는 제한 규정이다.

초대 국방장관은 군부의 텃세에 신경쇠약에 걸려 집무실에서 투신자살했고 그 후임 역시 군부 내 알력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한국전 발발 초기인 1950년 9월 3대 국방장관으로 2차 대전 중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조지 마셜이 임명됐다. 마셜 임명은 문민통제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나 국방부가 재 기능을 하는 기반을 다졌다.

1951년 4월 11일 한국전을 중국 만주 지역까지 확대하는 문제를 놓고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해임된것은 마셜 이 국방장관으로 재임할 때였는데 마셜의 존재와 동의그리고 그의 권위가 없었으면 대통령의 문민통제 원칙을 구현하는 그러한 대단히 정치적이며 극적인 결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마셜 이후 국방 장관 문민 통제 원칙이 지켜졌으나 군부의 등살에 장관이 전전긍긍 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전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는 예산 통제를 통해 군부를 확고히 장악했다. 맥나마라를 포함, 역대 국방장관들 중에는 경영학과 출신들이 많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첫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는 마셜 이후 두 번째로 문민 통제우ㅢ 원칙에 어긋난 국방장관이다. 해병대 대장에서 2013년 퇴역한 그는 국방장관에 임명되기위해서는 7년 이상 현역에서 금무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 초기에는 10년 이상)크게 어긋나 있는 신분이엇다. 메티스는 마셜 처럼 상원의 동의를 얻어 국방 장관에 임명됐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태국 방콕에서 사상 첫 남북외무장관회담 열렸으며(2000),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열차 편으로 러시아 방문 길에 올랐다(2001).

한국전 초기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던 미군이 충북 영동 경부선 철교 밑에서 피란 주민들 학살한 `노근리 사건'이 발생했고(1950), 6.25 참전 이후 한국에 주둔했던 영국군이 철수했다(1957).

신라부터 고려까지 역사를 집대성한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완성됐다(1458).

이날은 한국전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후임으로 미국 극동군사령관을 지낸 매슈 벙커 리지웨이 장군(1895-1993)과 '에비타'로 불린 아르헨티나의 여걸 에바 페론(1919-1952)의 기일이다. 리지웨이 장군은 향년 98세이고 에바 페론의 향년은 33세였다.

2020/07/26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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