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17:59



[今天歷史-7월28일] 탕산대지진, 1차 세계대전 발발

대만 중화문화 부흥 추진위원회 발족, 로베스피에르 처형, 닉슨 인도네시아 방문, 고르비 블라디보스토크 선언, 북로당 결성, 한국LA 올림픽서 10위

1976년 7월28일 새벽 3시42분53.8초 중국 베이징(北京) 북동쪽에 위치한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시에서 진도 7.8의 대지진이 발생했다.

대지진은 지진 규모가 측정되기 시작한 이래 중국에서 발생한 2번째로 규모가 큰 강진이다.

최대 규모 강진은 2008년 5월12일 쓰촨(四川성 원천(汶川)에서 발생한 규모 8.0의 쓰촨 대지진이다.

그러나 탕산대지진의 규모와 관련해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7.8을 넘어서 최대 8.3이라는 기록도 있다. 규모의 우열과는 관계없이 피해 측면에서 보면 탕산 대지진이 최대이다.

23초 동안 계속된 이 강진-1차 지진은 14~16초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후 규모 7.1의 여진이 뒤따랐다- 으로 교외 지역을 포함 인구 160만의 탕산시(중국 당국은 당시 탕산시 인구를 100만명으로 밝혔다) 완전히 폐허가 되고 베이징과 톈진(天津) 등 2개 도시도 큰 피해를 입었다.

사망자는 24만 명이고 부상자가 16만명으로 집계됐다고 공식 발표됐다(쓰촨 대지진의 사상자는 사망, 실종자 8만7000명을 포함, 25만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서방 관측통들은 사망자가 중국 당국의 발표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했으며 총 사망자가 75만명이라는 주장이 나오기까지 했다.

탕산은 공업도시로 당시 많은 광부가 야간작업 중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생매장 되었다. 1차 지진으로만 8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쓰촨 대지진에 비해 규모가 다소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가 많았던 것은 탕산 대지진이 인구 밀집 지역인 도시 지역에 진앙을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진 발생 시각도 한밤중이었기 때문이다. 쓰촨 대지진은 오후 2시28분에 발생했다.

탕산 대지진으로 지상 건축물의 97%와 생산설비의 55%가 파괴되었다. 교통, 수도 및 전기공급이 모두 끊어졌다. 당시 서방 언론은 "중국 지도상에서 탕산이 사라졌다"고 표현했다.

당시 집권 4인방은 국제단체가 제공하는 원조를 모두 거절하는 등 사태 수습보다는 사망이 임박한 마오쩌둥(毛澤東) 사후(이해 9월 9일 사망)를 대비하여 덩샤오핑(鄧小平) 비판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인민 사이에 인재(人災)가 천재(天災)를 불렀다는 여론을 조성하였고 마오의 사후 10월정변으로 4인방이 실각하는 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탕산 대지진이 있던 이해는 공산 중국을 건국한 3명의 지도자가 모두 사망한 해이다.

탕산대지진에 앞서 이해 1월8일과 7월6일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주더(朱德)가 각각 사망하고 탕산 대지진 한달 13일 뒤인 9월9일에 마오쩌둥이 숨을 거두었다.

1967년 =중화문화 부흥운동 추진위원회(中華文化復興運動推行委員會)가 대만 양밍산(陽明山) 중산루(中山樓)에서 창립대회를 가졌다.

문화유산 파괴 활동으로 이어진 중국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모색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1976년 중국에서 ‘비공비림(批孔批林)운동’이 한창일 때 대만에서 공자기념당을 세운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세계사 속 오늘

7월28일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저서로 이상주의자들에 의한 전체주의를 비판한 영국 철학자 칼 포퍼(1902-1994)가 태어난 날이며 혁명의 완수를 위한다는 목적 아래 공포정치를 편 프랑스 대혁명기의 정치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사망한 날이다.

로베스피에르는 동료로부터 '부패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펼친 공포 정치는 무자비했다.

결국 로베스피에르도 그가 바로 하루 전까지 정적들을 처형한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날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29-1994)가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가 단두대에서 처형됨으로써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 공격을 계기로 하여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이 5년2주일 만에 사실상 끝을 맺었다).

이날 재판절차를 거침이 없이 처형된 인사는 로베스피에르 형제, 생쥐스트. 꾸똥 등 19명이었다. 다음 날에는 공포정치가 시작된 이래 하루 처형 숫자로는 가장 많은 71명이 단두대에 올랐다.

공포정치는 공포정치의 최대 처형 기록을 세우며 최후를 맞은 것이다.

1793년 3월부터 1794년 6월10일까지 1년3개월 동안 파리에서 처형된 사람의 수가 1251명이었다.

이후 7월27일까지 한달 보름여 동안 대(大) 공포정치의 법령에 의해 처형된 수는 이전 1년3개월 동안 처형된 수자를 상회하는 1376명에 달했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각각 1793년 1월20일과 같은해 10월16일에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당시 혁명재판소의 검사였던 푸키에 땡빌은 "사람들의 목이 마치 판암(板岩) 떨어지듯 잘려 나갔다"고 표현했다.

1개월 보름 동안에 처형된 사람 중에는 가장 급진적인 수평파의 지도자 에베르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료였던 당통, 드믈랭 등이 포함되었다.

또 에베르와 드물랭의 부인마저 감옥에 갇힌 남편을 탈옥시키려 했다는 혐의로 처형했다.

로베스피에르, 당통 그리고 드물랭 3인은 서로 다른 성격의 인물로 혁명 초기 서로의 장점으로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며 혁명을 이끌었다.

진지한 로베스피에르는 언제나 높은 곳을 지향했고 항상 낙관적인 명랑한 조직가인 거구의 당통은 좌중을 휘어잡는 대단한 웅변가였다. 말을 더듬었던 드물랭은 글은 날았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발군의 문장력으로 민중을 움직였다.

로베스피에르 처형 하루 전인 7월27일에 있은 국민공회 결의를 통한 그의 체포를 '테르미도르(熱月) 반동'으로 부른다.

'테르미도르의 반동'은 몽타냐르당(산악당)을 중심으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로베스피에르파를 몰락시킨 쿠데타. 혹은 이를 계기로 한 급진혁명의 종결을 말한다.

쿠데타가 혁명력(革命曆)에 의한 테르미도르(熱月) 9일(7월 27일)에 일어났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로베스피에르파의 몰락 배경에는 공안위원회 내부 알력 및 공안위원회와 보안위원회라는 두 독재기관의 대립이 있었다.

알력과 대립은 내란이 진정되고 플뢰뤼스의 전승(1794)을 계기로 외국 반혁명 세력과의 전쟁에서 전황이 유리해지면서 위기감이 약화된 데서 비롯됐다.

공안위원회가 하층계급(상퀼로트)의 독재 완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자 그동안 독재를 감수하던 의회 내 부르주아적 당파(중도파와 지롱드파의 잔당)들이 반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또한 상퀼로트와 로베스피에르 체제를 연결시켜준 급진 과격노선의 에베르파에 대한 탄압과 공포정치 자체에 의해 상퀼로트의 활력이 약화되고, 토지를 얻은 농민도 보수화하는 등 전체적으로 로베스피에르파에 대한 지지가 떨어진 것이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채포당한 로베스피에르는 "공화국은 망했다"라고 절규했으나 단두대로 끌려가는 그를 바라보며 파리 민중은 "당통의 피에 그의 목을 잠기게 하라"는 말을 퍼부었다. 이는 당통의 처형이 부메랑이 되었음을 반영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은 처음에는 독재 완화만을 목표로 하였으나, 반동의 진행을 거스를 수 없었고 군을 배경으로 한 나폴레옹 독재체제에 길을 열어주었다.

이란 대통령에 개혁파인 하세미 라프산자니가 선출됐다(1989).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들이 은행 보험 증권 등 금융 분야 시장을 개방하기 위한 협정을 공식 승인했다(1995).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했다(1914).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했으며(1969)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을 발표했다(1986).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백남순 북한 외무상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태국 방콕에서 사상 첫 각료급 북미회담을 가졌다(2000). 경주 천마총에서 신라금관이 발견됐다(1973).

서울지검 창고에서 최고(最古) 재판기록인 동학농민전쟁 재판기록이 발견됐다(1967).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한국이 종합 10위를 차지했다(1984).

제1차 한국전 휴전회담이 판문점서 열렸고(1951), 북조선 노동당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결성됐다(1946).

2020/07/2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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