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1 01:05



[今天歷史-7월29일] 저우융캉 조사, 가쓰라-태프트 밀약

중 원폭-수폭 개발자 鄧稼先 사망, 八股文, 개선문 완공, 무적함대 격파, 히틀러 나치당수 선출, 무솔리니 출생

2014년 7월29일 중공중앙(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후진타오 2기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기간(2007년~2012년) 중 상무위원으로서 정법위원회 서기를 겸했던 저우융캉의 엄중한 기율위반 문제와 관련한 사건을 정식 접수해 심사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저우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체제 들어 뇌물수수, 정변기도 등 각종 부정부패 혐의로 당국의 추적 조사를 받고 있다는 관측이 꾸준히 제기됐는데 이날 당 중앙은 언론 매체를 통해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한 것이다.

그는 장쩌민 시절 중국석유천연가스 사장, 쓰촨(四川)성 당서기, 정치국원, 공안부장, 국무위원 등을 거쳐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에서 최고 권력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과 공안·사법·정보 분야를 총괄하는 중앙정법위 서기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저우융캉은 사법절차에 회부돼 2015년 6월11일 톈진(天津)시 제1중급인민법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법원은 또 저우융캉에 정치권리 종신 박탈과 함께 개인재산 몰수형도 내렸다.

저우는 유죄를 인정하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수뢰와 권력남용, 고위 국가기밀 누설죄였다.

저우융캉은 1949년 공산 중국 수립 이래 부패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은 최고위급 인사다.

애초 저우융캉에는 부패척결 의지를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사형판결이 내려질 것이란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시진핑(習近平) 지도부가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등 원로와 타협해 극형을 면하게 하는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하는 선에서 저우융캉 사건을 종결키로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재판 과정에서 그동안 무성했던 그의 정변 기도 혐의가 다루어지지 않은 것은 '현재 권력'과 '과거 권력' 간 정치적 타협을 반영한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빅딜’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체결되었다.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桂太郞)와 미 육군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간에 이루어진 밀약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 종결을 다룰 포츠머스 회담에 앞서 태프트를 일본에 특사로 파견하여 성사시킨 것이다. 태프트는 이후 미 대통령과 대법원장을 역임했다.

태프트와 가쓰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밀 각서(覺書)를 교환했다.

①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적 의도를 품지 않고 미국의 지배를 승인할 것;

②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영·일 3국은 실질적으로 동맹관계를 확립할 것;

③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할 것.

이 협약은 결국 일본이 영일동맹의 갱신으로 한국에서 얻은 지위를 미국으로 하여금 보장케 하는 대신에 미국의 필리핀 점유를 묵인한다는 것으로 일본에게는 한일합방의 사전 정지 작업이었다.

전 워싱턴 포스트지 기자인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는 자신의 저서 ‘두 개의 한국( The Two Koreas’에서 한국인은 이 사건을 미국의 ‘첫 번째 배반’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썼다.

그는 이 대목에 앞서 1882년 조선과 미국 간 ‘수호통상조약’에는 제3국이 조선을 위협하는 경우에 미국 정부가 ‘중재’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음을 강조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산파인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belt) 대통령은 1905년 말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을 중재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성문화됐다.

루스벨트는 러시아와 일본 간 강화조약 중재의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태프트는 루스벨트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5년 1개월 뒤인 1910년 8월 29일 대한 제국은 일본에 공식적으로 병탄됐다.

1986년=중국 원자폭탄과 수소폭탄(兩彈) 개발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덩자셴 (鄧稼先)이 타계했다.

[今天歷史-10월 16일] 원자폭탄 실험 성공 則天武后

[今天歷史-6월17일] 중국 수소폭탄 실험 성공

덩자셴은 중국 공산정권 수립초기 미국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중국으로 귀국, 핵물리이론 연구에 종사했다. 1958년 가을 중국에서 핵무기를 연구하는 기구가 창설되자 그는 이론부 주임이 되었다.

덩쟈센은 선발된 젊은 학자들과 함께 연구를 거듭한 끝에 6개월 만에 원자탄 설계 이론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1901년 =청(淸)의 광서제(光緖帝)는 ‘8고(股)문’ 형식과 무과 폐지 등 과거제도의 개혁을 지시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 조칙에 따라1904년 7월4일 마지막 과거가 실시됐고 다음해인 1905년에 청 정부에 의해 정식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됐다.

[今天歷史-7월4일] 중국 마지막 과거 실시, 러일 2차 밀약

이로써 그 기원이 한(漢)나라 때까지로 소급되는 중국의 전통적인 관리 등용방식인 과거제는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갔다. .

한편 고려 광종 때 과거제를 도입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10년 전인 1895년 갑오경장 개혁 일환으로 폐지되었다.

‘8고문’은 명나라 초기 과거시험에 채택된 특수한 문장 형식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의 1·2구 또는 여러 구를 제목으로 고인(古人)을 대신해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제정 당초의 취지였다. 1370년(홍무 · 洪武 3년) 향시(鄕試)에 처음 채용되었다.

처음에는 형식에 특별한 규정이 없었으나, 1384년 3월에 공포된 과거 성식(成式 : 정식 · 定式이라고도 한다)에 과거 과목이 ‘주자(朱子) 집주(集注)’, ‘정씨역전(程氏易傳)’과 ‘주자본의(朱子本義)’로 정해지면서 형식화되기 시작했다.

영락(永樂) 연간(1403~24)에는 ‘사서오경대전’을 주로 사용하게 되어 경문의 해석이 하나로 통일되었고 그 결과로 문장형식이 더욱 딱딱해져갔다.

1487년(성화 · 成化 23년)의 회시(會試) 이후로는 파제(破題)·승제(承題)·기강(起講)·입제(入題)·기고(起股)·허고(虛股)·중고(中股)·후고(後股)·속결(束結) 등의 부분으로 구성되면서 형식의 틀이 완비되었다.

그 기고·허고·중고·후고의 '고'는 독특한 긴 대구(對句)로 이루어져, 그것이 8개의 기둥을 세우듯이 되므로 팔고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고'란 대우(對偶)라는 뜻이다.

지정된 경서의 의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는 입장에서 경의(經義). 제의(制義)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나라 중기 이후에는 팔고문 참고서가 많이 만들어져 수험생은 그 예문의 자구(字句)를 암기해 문장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내용이 없는 형식적인 글을 양산, 과거제 폐지의 결정적 명분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사 속 오늘:

프랑스에서 개선문이 완성됐다(1836).

프랑스를 처음 찾는 외국인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곳 중의 하나이며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는 프랑스인도 거의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다.

나폴레옹이 1806년 2월22일 파리에서 아우스테르리츠 회전 전승 행사를 갖던 중 개선문을 건축할 구상을 했으며 이해 8월15일에 기공식을 가졌다.

나폴레옹의 몰락, 왕정복고와 잇따른 혁명으로 여러 차례 공사가 중단된 끝에 기공 30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개선문은 높이 50m, 폭 45m의 대형 건축물이다.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의해 격퇴됐다(1588).

히틀러가 나치당 당수로 선출된(1921년) 이날은 무솔리니의 생일이기도 하다(1883). 극우정당인 나치당의 명칭은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이다.

2020/07/29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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