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11/24 07:02



[今天歷史-7월31일] 흐 중소 연합함대, 맥 6.25 직후 訪臺

독일 바이마르 헌법 통과, 나치당 독일 제1당으로, START 체결, 아세안 설립을 위한 방콕선언 발표, 대한제국 군대 해산령, KEDO 뉴욕서 총회, 이범석 초대 총리 취임, 진보당 조봉암 사형 집행, 문공부 각종 간행물 172종 등록 취소, 엄홍길 히말라야 14좌 완등, 조앤 롤링 출생, 생텍쥐페리 사망

1958년 7월31일 소련 공산당 제1서기 겸 총리인 니키타 흐루시초프(Nikita S. Khrushchyov)가 베이징(北京)을 비밀리에 방문, 마오쩌둥(毛澤東)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수정주의자’와 ‘교조주의자’간 만남은 중소 이념분쟁의 분기점 구실을 했다.

마오쩌둥은 이 시기 ‘대약진 운동’과 ‘영구혁명’이라는 슬로건이 상징하는 새로운 대내외 급진정책을 추진하는 중이었고 흐루시초프는 안으로는 스탈린 격화운동을 펼치면서 밖으로는 평화공존론에 입각, 서방과 화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마오는 흐루시초프의 소련이‘부르주아화’하고 있다고 의심했고 흐루시초프는 마오의 중국을 광(狂)적이고 유치하다고 보았다.

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진먼다오(金門島)을 둘러싸고 양안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점을 겨냥, 중국에 중소 연합함대 구상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는 중국의 의심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었다.

미국이 중국을 공격할 경우 핵무기와 군사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던 흐루시초프는 이 약속 이행의 전제 조건으로 ‘극히 취약한’ 중국 해군을 연합함대 지휘 하에 두어야만 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마오의 강렬한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렸고 기왕에 지닌 소련의 ‘대국 쇼비니즘’에 대한 불만을 강화시켰다.

마오는 흐루시초프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련이 중국의 연해지방을 차지하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따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 스튜어트 슈람(Start R. Schram)은 자신의 저서 ‘마오쩌둥(Mao Tse-tung)’에서 “흐루시초프가 어떤 그의 선임자들보다 유럽과 미국을 더 잘 이해했다면, 중국인의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는 스탈린보다 훨씬 잘 모르고 있었다”고 평했다.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와 가진 베이징 비밀회담이 1개월 채 지나지 않은 이해 8월23일 진먼다오에 대해 세계 전사상 당시까지 최대 규모인 밀집포격을 가했다.

이는 소련의 해군력 도움 없이 대만을 해방하겠다는 의욕과 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한편 흐루시초프는 회담 후 반년 뒤인 1958년 12월 미국 상원의원 험프리(Humphrey)와 가진 사석에서, 그 다음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중국의 인민공사
(人民公社)
를 조롱했으며 자신의 의도대로 중국을 인도하기 위해 경제적 압력을 가할 뜻이 있음을 시사했다.

흐루시초프의 일련의 행동은 마오로 하여금 유럽인의 과거의 오만을 상기시켰고 흐루시초프의 소련이 자본주의 국가와 구별하기 힘들다는 믿음을 강화시켰다.

흐루시초프는 1959년 9월30일 다시 중국을 방문, 마오가 베푼 환영만찬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을 무력으로써 시험해 보려는’ 자들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 측 지도자들은 이를 진먼다오 포격전 이후 최고조에 달한 양안긴장, 인도과 벌인 국경충돌을 지적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양국 정상회담에서 흐루시초프는 소련이 10월 혁명 후 시베리아에 비(非)볼셰비키 정권인 극동공화국의 성립을 인정하는 ‘잠정적인 양보’를 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이는 ‘양안간 평화공존’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오는 흐루시초프가 ‘두개의 중국’을 은근히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양국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화하었고 1960년 7월 소련 기술자의 일방적 철수 결정, 그리고 1969년 3월의 대규모 국경 군사충돌로 이어졌다.

[今天歷史-7월 16일] 소련 중국서 기술자 전면 철수

[今天歷史-3월 2일] 중소 국경충돌

1950년 = 한국전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도쿄(東京)에 비행기편으로 대만 타이베이(台北)를 방문했다. 한국전 발발한지 1개월6일 뒤였다.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한국전 참전 의사를 표명하였으나 미국 측은 중국과 확전을 우려하여 이를 거절하였다.

세계사 속 오늘

독일 바이마르체제의 탄생과 종말이 이날 이루어졌다. 독일 국민의회가 바이마르 헌법을 통과시켰으며(1919), 나치당이 총선에서 승리, 독일 제1당이 되었다(1932).

미소 정상회담에서 전략무기 감축협정(STARTⅡ)이 체결되었다(1991).

필리핀, 말레이시아, 그리고 태국의 외무장관이 동남아 국가연합의 설립 목적을 명시한 ‘방콕선언’을 발표하였다(1961).

아세안(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으로 약칭되는 동남아 국가연합은 1967년 8월 '방콕선언'에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 5개국이 서명하면서 정식으로 창설되었고 상설 중앙사무국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두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은 회원국 정상회담(매 3년마다 공식 개최), 외무장관회의, 경제장관회의, 경제장관회의, 상임위원회, 아세안 지역안보포럼, 아세안+한중일 정상회의 등을 통해 동아시아 지역 협력의 주도적 역할을 추구하고 있다.

1984년 1월 브루나이가 가입하고 1995년 7월 베트남, 1997년 7월 라오스·미얀마 1999년 4월 캄보디아가 가입하면서 가입국은 총 10개국이 되었다.

영국에서 담배 TV광고가 금지됐다(1965).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대한제국이 군대해산 조칙을 발표했다(1907).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유엔주재 미국대표부에서 30여개국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총회를 개최했다(1995).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이범석(李範奭)이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했고(1948), 여성 첫 국무총리에 임명된 장상(張裳) 인준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2002).

양길승(梁吉承) 청와대 제1부속실장의 향응비디오가 TV에 공개되어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2003).

문화공보부가 주간지, 월간지 등 각종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했다(1980). 엄홍길이 히말라야 8,000m 이상 14개봉(14좌)을 완등했다(2000).

7월31일은 '해리포터'를 쓴 영국작가 조앤 캐슬린 롤링(1965- )이 태어난 날이며 '어린왕자'를 지은 프랑스 행동주의 작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ery : 1900-1944)가 사망한 날이다.

2차대전 중 자유프랑스군의 조종사로 연합군의 시칠리아 진공을 도운 생텍쥐페리는 1944년 정찰비행에 나갔다가 실종됐다. 독일 전투기와 조우, 격추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은 공산주의자로 활동했으나 광복 후 전향한 뒤 초대 농림장관을 역임한 조봉암(曺奉岩.1898-1959)이 국가보안법 혐의로 처형된 날이다.

국회부의장 등을 지낸 조봉암은 1952, 195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 낙선했으며 1956년 11월 혁신정당인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으로 있던 중 1958년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

그의 혐의는 '평화통일론'이 국시에 위반된다는 것과 간첩 양명산(楊明山)으로부터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았다는 것 두 가지였는데 평화통일론은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간첩 혐의는 양명산의 진술 번복에도 불구하고 인정되어 사형이 선고되었다.

진보당 사건은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한 권력의 음모임과 동시에, 냉전 분위기에 편승한 분단주의자들의 평화통일론에 가한 탄압이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함께 기간산업, 거대산업 국유화 등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지향하였으며 그의 저서 중에는 ‘공산주의 모순 발견’도 있다.

2020/07/3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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