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8/03 22:47



[今歷단상-7월31일]정치는 생물 어제 적도 내일은 변해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마오쩌둥은 비슷한 데가 있다

적대세력에 대한 창조적 유연성과 내부 도전자에 대한 단호함이다.

흐루시초프는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힌 동서냉전 절정기에 '평화공존'을 내세웠다.

이는 적대세력에 대한 화해의 손짓이었다. '콜드워'를 '데탕트'로 유턴시켰고 '인류 멸망' 또는 '지구 종말' 시계의 시침을 오후 11 55분 언저리에 머물게하고 깊고 깊은 동면하도록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 개입 결정으로 미국과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1972년 미국과 화해의 첫 단추를 꿴 인물은 한국전 개입의 최종적이며 유일무이한 중국공산당 지도자이던 마오쩌둥이다.

그는 중미화해 첫걸음 결정 과정에서도 '최후의 1인'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마저 아직은 때가 이르다며 주저할 때 마오는 모든 논의 결과를 뒤집는 결단을 내렸다.

리처드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한 날 닉슨을 자신의 숙소로 초치하여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그때 기념사진에서 마오의 손이 닉슨 몸쪽으로 뚜렷하게 더 다가가 있었다.

마오의 '손찌르기 공격'을 닉슨이 가까스로 몸에 닿기 전에 막아내는 모양새였다.

이로써 미중화해의 주연과 조연이 분명해졌다. 물론 조연은 닉슨이다.

내부의 적에 대해 흐루시초프는 전혀 유연하지 않았다. 레닌과 스탈린 못지 않았다.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베리아, 불가닌과 말렌코프 등 대권 경쟁자들을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2차대전 군사영웅 주코프와 소련외교의 총설계자 몰로토프 등도 역시 숙청했다.

처형한 비밀 경찰의 우두머리 베리아를 제외하고는 죽이거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도 않고 신의 집에서 말년을 보내도록 만들었다. 스탈린에 비해보면 우아하고 인자했다.

그러나 크렘린궁 상공은 말할 것도 없고 소련 젼역 상공도 물론 동구 공산권과 세계 다른 지역 공산국가들의 하늘 위에 배회하고 있는 '스탈린 망령'을 스탈린 격하 발언을 통해 지상에 패대기치는 냉혹한 계산의 대담함을 과시했다.

마오쩌둥은 경쟁자는 물론 자신의 노선에 방해되는 이들을 모두 집요하고 철저히 쓸어버렸다.

1935년 1월 지도권을 장악한 이후 가장 강력한 대권 도전자 장궈타오와 왕밍 등을 쫓아내거나 팔다리를 잘라 무력화 시켰다.

공산중국을 건국한 뒤에는 가오강 등을 숙청하고 왕밍을 집요하게 압박하여 제발로 중국을 떠나 소련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

왕밍은 생물학적 생명을 보존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마오에 도전하지 않았던 그러나 그의 노선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했던 펑더화이와 류샤오 치등을 핍박 속에 죽게 만들었다.

이 비슷한 성격과 강력한 신념의 두 사람이니정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둘은 서로를 '내부의 적'으로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오는 사회주의자였다. 닉슨은 자유주의자였다.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마오는 좌편 쪽 극단에, 닉슨은 우편 쪽 극단에 있었다.

그는 공산진영에서 교조주의자로 불렸고 닉슨은 미국에서 한때 매카시스트로 간주됐다. 극좌 원리주의자와 극우 원리주의자 취급받았다.

마오와 닉슨 두 사람의 악수는 극과 극이 통하는 것이었다.

마오는 후르시초프를 수정주의자로 흐루시초프는 마오를 교조주의자로 비난했다. 그

그러나 둘다 마르크시즘과 레닌이즘을 신봉하는 사회주의자였다. 둘은 상대를 내부의 적을 단호하게 숙청하였던 것처럼 외부의 적대세력보다 최우선 적으로 무너뜨리려 하였다.

내부의 적과는 화해할수 없다. 다만 불구대천의 외부 적과는 화해할 수 있다. 그것이 정치다. 생물과 같은...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2020/07/3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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