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8/03 22:47



[今天歷史-8월1일] 紅軍창설, 중 핵잠 해군 첫 배속

청일전쟁 선전포고로 공식 개전,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 본격화, 베를린 올림픽 개막

1927년 8월 1일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허룽(賀龍) 등의 지도로 난창(南昌)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은 국민당 군에 의해 진압, 실패했지만 이때의 무장 세력이 홍군(紅軍), 8로군을 거쳐 인민해방군으로 발전했으며 중국은 이날을 건군(建軍)기념일로 삼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자체 무장역량을 확보하기로 결심한 것은국민당 우파 지도자인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가 이해 4월 12일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세력을 일소함으로써 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상하이의 공산당 세력은 북벌군이 상하이에 진입하기 이전, 무장폭동을 일으켜 군벌 세력을 몰아내고 상하이를 장악했었다. 이는 외국 제국주의 세력과 상하이의 국내외 자본가 세력의 불안감을 가중시켰고 일찌감치 국공 합작에 부정적이었던 장제스는 마침내 이들과 손을 잡고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난창폭동에 참여한 병력은 3만 명으로 공산당의 별도의 무장 조직이 아니라 국민 혁명군에 소속돼있던 군대였다.

건군 91주년을 맞 인민해방군은 250 만 명 전후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4년 전인 2014년 현재 인민해방군은 병력 수가 230만~260만 으로 추산됐다. 250만을 기준으로 할 때 각군 병력은 육군 178만, 해군 23만, 공군 42만(비행사 1만 5,000명), 제2포병(미사일 부대) 7만으로 구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을 당시 변변한 무기를 갖추지 못해 ‘인해전술’이라는 인적 소모전에 주력했던 인민해방군은 현재 탱크 1만여 대

헬기 500여 대 무인기 1500대

함정 230여 척(항공모함 2척과 이지스함 8척 등 미사일 구축함 23척
포함)

잠수함 73척(핵추진 탄도미사일 1척을 비롯, 핵추진 잠수함 6척 포함)

항공기 3,200여 대

전략 및 전술핵 무기 400여 기

등을 갖춘 현대적 군대로 변모했다.

난창 폭동 이후 인민해방군의 발전과정은 다음과 같다.

난창폭동을 계기로 조직된 공농혁명군(工農革命軍)은 1927년 9월 추수폭동에 실패한 후 징강산〔井岡山)을 공산 혁명의 근거지로 삼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세력과 합하여 공농홍군(工農紅軍)으로 개편했다.

특히 1928년 4월에 조직된 홍군 제4군(군장 · 軍長은 주더, 당대표는 마오쩌둥)은 각지에 흩어져 있던 홍군과 함께 세력권을 신장시켜 나갔으며 1931년 루이진(瑞金)에 중화소비에트임시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1928년 북벌 완료를 통해 1912년 청조 멸망과 중화민국 수립후 이어져 온 분열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단 외형적으로 중국을 다시 통일한 장제스는 이를 방치할 수 없었다.

홍군은 중화민국 국민 혁명군의 이른 바 초공(剿共) 캠페인에 따른 포위공격으로 1934년 10월 역사적인 장정(長征)에 나서게 되었다.

이 장정 도중인 1935년 1월중국공산당은 쭌이(遵義)회의를 계기로 마오쩌둥이 1927년 이래 군권의 명실 상부한 실세이자 최고 지휘자로 활약해왔던 저우언라이로부터 군권(軍權)을 인수받아 당내 지도권을 확립하고 장정을 ‘혁명을 위한 파종의 기회’로 삼아 1만 2,000㎞의 장정을 완료하고 1935년 가을 산시(陝西)성 북부에 새로운 혁명근거지를 세웠다.

[今天歷史-1월15일] 遵義회의

이때부터 홍군은 유격전 중심의 ‘마오쩌둥 군사사상(毛澤東軍事思想)’에 근거한 사상무장을 했고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시작된 뒤 2차 국공합작에 따라 국민혁명군 제 8로군과 신편 제 4군( 신사군(新四軍))으로 개편되었으며 항일전쟁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했다. 항일전쟁 기간 동안 정규군 90만과 민병 220만의 대군으로 성장했다.

항일전쟁 승리 후에 국공(國共)이 다시 분열되었고, 1946년 7월 이후에는 전면적인 국공내전(제 3차 국내혁명전쟁)에 돌입했다.

홍군은 1947년 10월 인민해방군으로 개칭한 다음 총반격으로 전세를 전환시켜 1948년 가을부터의 랴오선 전투(遼瀋戰役) 화이하이 전투(淮海戰役) 그리고 핑진전투((平津戰役) 등 3대 전투를 거쳐서 국민당 군을 압도하고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게되었다.

정규군과 지방군 그리고 민병으로 이루어진 인민해방군은 ‘3대기율 8항주의’를 건군의 윤리로 삼았고 계급제도가 없고 직책만 있는 ‘인민의 군대’였다. 건국 후에는 총정치부·총참모부·총후근부(總後勤部)로 이루어지는 국방군이 되었다.

1950년 10월 한국전에 참전, 현대화한 미군의 실력을 피부로 체험한 펑더화이(彭德懷) 국방부장 통솔 하에 계급제도의 도입 등 군의 근대화가 시도됐다.

그러나 이는 마오쩌둥의 건군노선과 대립되는 것이었으며경제 노선과 정치 이데올로기 상의 대립이 중첩되어 펑더화이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펑이 실각한 1959년 이후에는 린뱌오(林彪) 국방부장이 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린뱌오는 1966년 여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에서 마오쩌둥의 탈권투쟁(奪權鬪爭)을 전면적으로 지원하였고 군사관제(軍事管制)를 단행, ‘병영국가’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린뱌오는 1971년 9월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소련으로 도망하던 중 가족과 함께 의문의 추락사를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부터 인민해방군 내부의 동요를 수습하고 당이 군을 지도하는 체제를 굳혔고 또 1979년 2월에 발생한 중-베트남 전 패배도 교훈이 되어 덩샤오핑(鄧小平) 당중앙 군사위원회 주석을 중심으로 ‘4대 현대화’의 목표이기도 한 국방의 현대화를 추진하였다.

종래의 유격전 병력 중심이었던 군의 체질을 전환하기 위하여 원자력잠수함과 핵미사일의 개발에 주력하였고, 이러한 군정예화에 따라 육상병력 100만 명이 감축되었다.

1984년 5월 새로운 병역법이 제정되어 계급제 실시를 명시하였다. 또 1985년 7월에는 종래의 11대군구(大軍區)가 7대군구로 개편되었고 1988년 10월 계급제가 부활되었다. 원수 계급이 폐지되고 장군 4계급, 교관(영관) 4계급, 위관 3계급으로 되어 있다.

1989년 천안문(天安門)사태 당시 비무장 시위대를 유혈진압, 인민의 군대라는 위상에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의 걸프전 승리에 자극받아 1998년 기존의 3총부에 총장비부를 추가, 4총부로 체제로 개편하였고 크게 성장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장비의 현대화, 첨단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50만 명의 추가감군과 대군구 수의 축소 등이 검토된 끝에 20만 감군안이 확정되어 2005년 말까지 완수되었으며 이에 인민해방군의 총병력은 230만~ 260 만 명 수준을 유지하게 됐다.

2016년 2월 1일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에 주도로 최고 지도자의 군령권 강화와 종전 7대군구를 통폐합한 '5대 전구(戰區)'가 창설되는 대대적 군 개편이 단행됏다.
5대 전구는 동부, 남부, 서부, 북부, 중부 전구이며 선양, 베이징, 지난, 난징, 청두, 란저우, 광저우에 두었던 7대 군구는 폐지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전구마다 육해공군 등을 총괄하는 통합작전 지휘체제를 구축했다.
5대 전구 사령원은 모두 1950년대 생으로 군 지도부의 세대 교체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그간 비대한 지상군을 지휘할 육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전략미사일 부대인 제2포병을 로켓군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사이버와 우주전략 등을 담당하는 전략지원부대를 신설했다.

또한 종전 총참모부를 비롯한 4대 총부를 해체하고 중앙군사위 직속으로 15개 부문의 기관이 설치됐다.

시 주석은 군 개혁 일환으로 신설한 연합작전지휘 중심의 최고 수장인 '총지휘'를 맡았다. 신화 통신 영문판은 시 주석의 새로운 직책을 'Commander in Chief'(최고사령관)으로 번역 소개했다.
이로써 시진핑은 중국군의 군사작전을 총괄하는 수장 자리를 새로 맡게 되됨으로써 당정군의 실질적인 모든 권환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덩샤오핑은 말할 것도 없고 마오쩌둥마저 하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차지 햇음을 의미한다.

마오는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총구는 당의 지배 하에 있어야 한다'는 말로 군령권은 당을 통한 간접 통제를 했으나 시는 이를 직접 통제하는 체제로 바꾼 것이다.

시진핑은 인민 해방군 총 병력 수를 2017년 까지 200만 명으로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했었다.

中 군병력 총 230만으로 감축 2006/01/09 14:12

중국 인민해방군 감축 연혁 2003/09/02 17:43

1915년 = 베이징 정부 위안스카이(袁世凱) 얼굴 모습이 담긴 은화를 발행, ‘원대두(袁大頭)’로 불리는 이 화폐 발행을 통해 전국의 은폐(銀幣)를 통일함.

1926년 = 광둥(廣東)대학이 중산(中山)대학으로 개명됨.

1928년 = 국민당 정부 난징(南京)에 라디오 방송국(中央廣播電台) 개설.

1959년 = 미국, 대만과 대만방위협정 체결.

1974년 중국 중앙군사위는 중국이 자체 설계하여 제작한 핵추진 잠수함을 ‘장정(長征)1호’로 명명하고 정식으로 해군에 배속시킨다고 발표했다.

이 잠수함은 핵추진 잠수함이었으나 미사일 발사가 가능한 전략 잠수함이 아닌 어뢰공격용 잠수함이었다.

이날 중앙군사위는 이 잠수함에 대한 군기수여식을 거행하였다. 잠수함 명명식을 겸한 이 행사에는 해군사령원 샤오진광(肖勁光), 국방과학위 부주임 첸쉐썬(錢學森) 등이 참석했다. 이로써 중국 해군은 핵추진 잠수함을 보유하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에 앞서 이 핵 추진 잠수함은 1970년 12월 26일 제작 완료와 함께 진수식을 가졌다.

1894년 8월 1일 중국의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패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이 정식으로 시작됐다.

청이 이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명조 이래 조선에 대해 종주권에 기초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중국은 이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중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부터 56년 뒤인 1950년 10월 한국전에 참전하면서부터이다.

우리가 청일전쟁으로 부르는 이 전쟁을 일본은 일청전쟁, 중국은 ‘갑오(甲午)전쟁’으로 부른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

1894년 1월 조선 남부에서 동학 농민혁명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청에게 진압을 위한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조는 이 같은 요청에 따라 태원(太原 :타이위안) 총병 섭사성(聶士成)과 직예(直隸)총독 엽지초(葉志超)의 지휘 아래 2,000 명(일부에서는 3,000명을 파견한 것으로 기록)의 병력을 파병하여 아산(牙山)에 진주하게 했다.

청과 일본은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한반도에서 양국 충돌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1885년 천진(天津 : 톈진) 조약을 체결, 조선에 변란이 일어나 파병할 경우 쌍방은 상대방에 이를 미리 통보하고 사태 수습 후 즉시 철병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이 천진조약을 근거로 영사관과 교민 보호 명목의 병력을 파견하여 인천에서부터 서울에 이르는 중요 전략지역을 점거하였다.

동학 농민혁명이 진정되자 청은 일본에 양국군의 철수를 제의하였으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도와야 한다며 철수를 거부했다. 7월 23일 일본군은 조선 궁궐에 난입, 고종을 협박하여 친일 정권을 수립하였다.

7월 25일 일본군 함정이 선전포고 없이 서해 풍도(豊島) 해상에서 중국의 호위함 ‘탐강(探江)’호와 전함 ‘고승(高升)’호를 습격하였으며 29일에는 아산 청군을 공격하여 성환(成歡)을 점령했다.

8월 1일에 중국과 일본은 동시에 선전을 포고하고 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열강들이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한 가운데, 전쟁은 근대적 군비를 갖춘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 속에 진행되었다.

아편전쟁 패배(1842) 후 중체서용(中體西用)에 입각한 청의 양무운동(洋務運動)과 미국 페리 제독에 의한 개항(1854) 후 화혼양재(和魂洋才)에 바탕을 둔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맞붙은 것인데 일본이 이긴 것이다.

일본 육군은 9월 평양에서 승리하고 10월 요동(遼東: 랴오둥)반도로 진격하였으며, 해군은 황해(黃海) 해전에서 승리한 뒤 육군과 함께 여순(旅順 : 뤼순), 대련(大連: 다롄), 위해위(威海衛 : 웨이하이웨이) 등을 공격, 점령하고 청나라 북양함대(北洋艦隊)를 섬멸하였다.

전쟁 결과, 청나라는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하관(下關 : 시모노세키)조약을 성립시켰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확인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냥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요동, 대만(臺灣), 팽호(澎湖 :펑후)열도를 할양함과 동시에 통상의 특권을 일본에 제공하게 되었다.

뒤에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간섭으로 요동은 반환되었으나, 이 전쟁으로 청나라의 무력함이 확인되어 열강들의 중국 침략이 가속화하였다.

일본은 전쟁 후 동아시아의 새로운 제국주의국가로 등장하여 조선 침략을 본격화하고,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충돌하여 후일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세계사 속의 오늘

영국에서 노예해방 선언이 발표되고(1834) 세계 최초로 소포제도가 도입되었다(1883).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으며(1914) 나치독일의 선전무대가 된 베를린 올림픽이 개막되었다(1936).

2020/08/01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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