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0/09/23 19:01



[今天歷史-8월2일] 馬祖島 직항, 廬山회의

티베트에 본토 주요 성 교사 대거 파견, 국민당 광둥 정부 중앙은행 설립. 통킹만 사건,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히틀러 총통 취임, 2차 단발령, 서석재 총무처 장관 전임 대통령 차명계좌
폭로


2001년 8월2일 오전 9시 중국 여객선이 중국인 승객을 싣고 푸젠(福建)성 푸저우(福州)시 마웨이(馬尾)항을 떠나 대만이 관할하고 있는 마쭈다오(馬祖島)에 도착했다.

이는 중국과 마쭈다오 간의 첫 선박 직항이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마쭈다오의 친척을 방문하려는 사람들이었으며 여객선의 이름은 ‘서광(曙光)’이었다.

첫 운항 후 6개월 사이 마쭈와 마웨이 직항은 모두 18차례 이루어졌으며 승객은 양측 모두를 합하여 연인원 1330명에 달했다.

샤먼(廈門)시와 진먼다오(金門島) 그리고 푸저우(福州)시와 마쭈다오 간의 이러한 선박 직항과 교류를 ‘소삼통(小三通)’으로 부르고 있다. 이는 춘제(春節 설날 연휴) 기간 전세기 직항의 정례화를 가져왔다.

1974년 = 시짱(西藏 : 티베트)의 낙후한 교육을 발전시킨다는 명목으로 상하이(上海), 랴오닝(遼寧), 장쑤(江蘇), 허난(河南), 후난(湖南), 쓰촨(四川)과 국무원 각부 계통에서 선발된 389명의 교사가 시짱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8개소의 중학(중국에서는 우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이 통합되어 있다)에 배치되었다.

1959년 = 중공 중앙은 여산(廬山 : 뤼산)에서 개최된 8기 8중전회에서 펑더화이(彭德懷)가 마오쩌둥(毛澤東)에게 보낸 서신을 “우경기회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당권을 탈취하려는 강령”이라고 규정하고 펑더화이와 그를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한 황커청(黃克誠), 장원톈(張聞天), 저우샤오저우(周小舟)가 ‘군사클럽’ 성격의 반당집단을 결성했다고 선포했다.

펑더화이는 편지에서 '대약진 운동'을 '소(小) 부르주아적 열정'이라며 이의 중단을 촉구하는 등 마오가 추진한 일련의 정책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마오는 펑이 비밀리에 보낸 이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고 당 지도부의 반응을 살핀 뒤 펑과 펑의 지지자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8월 11일 마오쩌둥은 “여산에서 발생한 새로운 투쟁은 새로운 단계의 투쟁”이라고 규정하고 “과거 10여 년 간 자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생사를 건 투쟁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2 주일 뒤인 8월 16일 당 중앙은 ‘펑더화이 동지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당집단의 착오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키고 펑, 황, 장, 저우를 국방, 외교, 성위 영도 직에서 해임했다. 이후 린뱌오(林彪)가 국방부장에 임명되어 군사위의 일상 업무를 관장하였다.

한편 이와 함께 1959년 경제목표에 대한 조정이 이루어졌다. 강철은 1,800만 톤에서 1,200만 톤으로, 석탄은 3억 8,000만 톤에서 2억 3,500만 톤으로, 식량은 1조 500억 근(斤)에서 거의 절반인 5, 5000억 근으로, 또 면화도 1억 단(?)에서 절반 이하인 4,620 단으로 큰 폭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는 대약진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마오는 '충신'은 처벌하되 '충언'은 받아들인 것이다.

[今天歷史-7월2일] 뤼산회의 개막

1924년 = 국민당 광둥(廣東)정부가 중앙은행을 설립했다.행장에는 쑹쯔원(宋子文)이었다.

광둥정부는 1916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사망 이후 베이징(北京)의 중앙정부가 군벌의 발호로 혼미를 거듭하자 쑨원(孫文)이 1921년 4월 세운 정부이다.손문은 위안스카이가 1913년 쑹자오런 암살 후 황제제로 전환하려 하자 2차 혁명 운동을 벌여 베이징의 정부를 를접수하려다가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쑨원의 이 광둥 정부는 1922년 8월 광둥 군벌 천즁밍(陳炯明)의 반란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를 열고 공산당과의 국공합작을 정식으로 성립시켰다. 이 대회에서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부조(勞農扶助)의 3대 정책이 제시되었다.

쑨원의 사망(1925년 3월 12일) 후 광둥 정부는 1925년 5월 30일부터 시작된 반제국주의 운동(5 · 30운동)을 지도하면서 하나의 지방정권에서 전국혁명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해 7월 국민당이 중심이 된 ‘국민정부(주석 왕징웨이 · 汪精衛)’가 성립되었으며 정치, 군사, 재정, 외교를 통괄하는 조직을 구비하고 다음에 올 전국통일정권의 모델이 되었다.

1995년 = 중국 정부 군사기지에 대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미 공군 장교 2명의 추방을 명령.

1961년 = 케네디 미 대통령과 천청(陳誠) 대만 부총통이 워싱턴에서 회담을 갖고 중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는 공동성명 발표.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의 베트남 전 본격 개입의 구실이 된 통킹만 사건이 발생하였다(1964).

미국은 통킹만에서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며 북베트남 연안 기지를 폭격했다. 이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전쟁 수행 권한을 의회에 요구, 의회는 압도적 다수로 승인했다.

미국 국방부는 미국의 구축함 매독스호와 터너 조이호가 각각 1964년 8월 2일과 4일에 통킹만 공해상에서 초계(哨戒) 중 각각 북베트남의 어뢰정 3척으로부터 공격받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 외무부는 매독스호가 북베트남 영해 내에서 북베트남 초계정을 포격하였다고 반박하였다.

나중에 폭로된 미국 국방부의 베트남비밀보고(펜타곤 페이퍼)에 의하면, 이미 1964년 2월 1일부터 사이공(현 호치민시)의 미 군사원조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34-A작전계획’이라는 북베트남에 대한 광범위한 비밀작전이 발동되고 있었다.

이것은 정보수집·파괴활동·연안시설의 포격으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는 북베트남 경제의 핵심부를 파괴한다는 ‘선전포고 없는 공격’, ‘기만작전’이었다. 통킹만 사건은 이와 같은 작전의 일환으로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칭공했으며(1990년), 일본이 시베리아 파병을 선언했다(1918).

앙골라 반군 군대 해산으로 앙골라 내전 완전 종결되었다(2002).

독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히틀러가 총통에 취임했다(1934).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한미 대표가 한미행정협정(SOFA)를 다른 나라 수준으로 개정키로 합의했다(2000).

`국민투표는 만능이 아니다'라는 사설로 동아일보 고재욱(高在旭) 주필. 황산덕(黃山德) 논설위원이 당국에 체포됐으며(1962), 국회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가결했다(1964).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 서경원(徐敬元)의원 밀입국 사건과 관련돼 안기부(현 국정원)에 구인돼 조사받았으며(1989), 서석재(徐錫宰) 총무처 장관이 "전직 대통령 중 한 명이 차명 계좌에 4,000억 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1995).

조선 조정이 군부와 경무청 관리에 단발령을 내렸다(1902).

이 단발령은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고종 32년(1895) 11월 17일 처음으로 내린 단발령과는 달리 고종의 주도로 내려졌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청일전쟁 직전인 1894년 7월에 성립된 친일 개화파 정권인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갑오경장을 추진하면서 일련의 근대화 개혁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 후 러시아, 독일과 프랑스 등 3국 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주는 등 국제적 고립에 빠져들고 조선에서도 반일 세력이 득세하는 등 궁지에 몰렸다.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을 통해 배일세력의 핵심인물로 지목되어온 조선 국왕 고종의 비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는 국제적 범죄를 자행 친일 정권을 회복시켰다.

단발령은 이 만행 불과 1개월 9일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1차 단발령에 대해 조선 민중은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이었는데, '신체·머리털·살갗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유교 윤리가 생활 깊이 뿌리내린 조선사회의 지도층과 민중들은 이는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조처'라며 반대한 것이다.

단발은고종을 비롯해 정부 관료에 대해 단행된뒤 전 국민에게 강요되기 시작했는데, 당대 유림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질타해 감히 깎지 못하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을 통해 김홍집 친일내각을 붕괴시킨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1897년부터 주체적 입장에서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했다.

고종은 1902년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맞아 주체적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다시 단발령을 내린 것이다. 여전히 단발령에 대한 반발이 거세자 이해 10월에는 불응하는 사람의 머리를 자르게 할 정도의 강경한 입장을 천명하였다.

대한제국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李垠)의 비에 일본왕족 방자(方子)가 결정되었다(1916).

컬러 TV 국내시판 개시됐다(1980).

대한제국이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변경했다(1907년). 이는 고종 황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의 압력을 받고 순종에 양위함에 따라연호가 새로운 것으로 바뀌게 된것이다.

2020/08/02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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