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1/16 00:13



[今天歷史-1월13일]蔣經國 사망..세습 자발적 안락사

1988년 1월 13일 장제스(蔣介石)의 아들이며 대만 총통으로 있던 장징궈(蔣經國)가 타이베이(台北)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

장징궈의 어린 시절 이름은 젠펑(建豊)이었으며 러시아 유학 시절에는 ‘니콜라’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장징궈는 1910년(중국공산당의 기록은 그가 신해혁명이 발발하던 1911년에 태어났다고 밝히고 있다) 저장(浙江)성 펑화(奉化) 현에서 장제스와 첫 부인 마오푸메이(毛福梅) 사이에서 태어났다.

1920년 상하이(上海)의 유명한 완주(萬竹)소학교를 다녔으며 장제스가 광둥(廣東)성에서 손문(孫文 : 쑨원)을 도와 일하게 되면서 천궈푸(陳果夫)에게 맡겨졌다.

천궈푸는 훗날 장제스 집권 시기 장제스의 장씨 가문, 쑹쯔원의 쑹(宋씨 가문, 쿵샹시의 쿵(孔)씨 가문과 함께 장제스 독재 치하의 국민정부를 좌지우지한 4대 가문중 하나인 천(陳)씨 가문의 리더다.

1925년 10월 장징궈는 소련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중산은 손문의 호이며 : 손문의 자(字)를 따서 손일선(孫逸仙 : 쑨이센 대학으로도 불리웠음-에 유학하였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는 1차 국공합작 기간이다.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 반공 정변'으로도 불리는 ‘4.12 상하이 쿠데타’을 일으켜 반공반소 입장을 드러내자 소련에 있던 17세의 장징궈는 아버지인 장제스가 혁명을 배반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 성명서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그(장제스)의 혁명 사업은 이미 끝났다. 그의 혁명에 있어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혁명을 배반한 이상 이제부터 그는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적이다. 과거에 그는 나의 부친이며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적의 진영으로 돌아선 이상 그는 나의 적일뿐이다.”

이때의 장징궈는 중국 전통의 효(孝) 사상보다는 아버지를 ‘반혁명적 언동’을 밀고한 아들이 영웅으로 대접받는 ‘볼세비키 윤리’에 충실했던 셈이다.

장징궈는 1928년 레닌그라드로 보내져 홍군군정학교(紅軍軍政學校 : Central Tolmatcheh Military & Political Institute)에 입학한다.

하지만 1931년 이후 트로츠키파 숙청 여파로 농장, 광산 및 공장을 전전해야 했다.

그는 이때 생의 반려를 만나게 된다. 우랄기계 공장(Ural Heavy Machinary Plant)의 부공장장으로 있던 1935년 3월 그는 공장 노동자 파이나(Faina)와 결혼했다.

파이나는 장징궈가 중국으로 귀국할 때 중국으로 함께 왔으며 이름도 장팡량(蔣方良)이라는 중국식으로 고쳤다.

창팡량과의 사이에서 이해 12월 첫 아들 애륜(중국명 장샤오원蔣孝文)을, 다음해에는 딸 애리(중국명 장샤오장蔣孝璋)를 낳았다.

장샤오장은 훗날 장제스의 국민 정부가 대만으로 철수한 뒤 대만에서 국방부장을 지내는 위다웨이(兪大維)의 며느리가 되었다.

위다웨이는 2012년부터 2017년 10월 19대(중국공산당 제19차 전당 대회)까지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정협 주석 위정성(兪正聲)의 종조부로 장샤오장은 그의 당숙모가 된다.

이어 장샤오우(蔣孝武)와 장샤오융(蔣孝勇)이라는 또 다른 아들 둘이 태어났다.

장징궈는 1936년 1월 소련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장제스의 초공(剿共) 5차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장정(長征)을 거쳐 서북 변방지구로 쫓겨온 공산당에 대한 토벌에 전력을 다하는 부친 장제스를 비난하는 공개서신을 발표했다.

이 시점은 장제스가 서북 변방지구에 쫓겨온 공산세력의 숨통을 조여 최종적으로 이를 끊어버리려는 시점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당 이후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하였고 소련으로서도 중국 내 공산세력이 뿌리채 뽑힐 위기감에 휩싸인 때다.

이런 위기감 때문인지 장지궈의 공개서신에서 사용한 용어 하나하나는 장제스의 어떤 정적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매섭고 신랄한 것이었다. 서신의 첫 대목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후 세 차례의 반란에서 그때마다 중국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었으므로 그는 중국인민의 적이기 때문이다.”

서신에서는 또 장징궈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엿볼 수 있다. 장제스가 제창한 충효사상의 가면을 벗긴다는 소제목 아래 쓰여진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어머니, 어머니는 기억하십니까. 누가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의 머리를 잡아챘으며, 누가 어머니를 2층에서 아래로 던졌습니까. 그 모두가 장제스의 짓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

장징궈는 1939년 일본군의 폭격으로 모친이 사망한 이후 그의 전기를 썼으며 총통이 된 후 자신의 집무실에 모친의 대형사진을 걸어 두었을 정도로 모친에 대한 효성이 각별하였다.

장징궈는 1937년 귀국한다.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西安事變)
을 계기로 성립한 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국민정부와 소련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시안사변으로 감금된 장제스와 협상할 때 아들의 문제를 슬며시 꺼내 완강하게 버티던 장제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일조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1925년 10월에 유학, 1937년 3월에 귀국했으니 소련 생활은 12년간이었다. 장제스는 귀국한 아들을 펑화현 시커우(溪口)의 고향으로 보내어 ‘맹자’와 ‘증문정공 가서(曾文正公家書 : 증문정공은 曾國藩을 말한다) 등의 고서를 읽게 한다.

장제스는 이를 '보충수업(補課)‘ 또는 ’세뇌(洗腦筋)‘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총리전집‘과 ’15년 이전의 장제스‘와 같은 장제스의 전기도 읽도록 했다.

이 ‘세뇌’는 장제스가 바라던 대로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때 공산당원이었으며 소련에서 12년을 생활했고 소련여자를 부인으로 둔 장징궈였지만 이후 장제스의 정치노선을 충실히 따랐다.

일본군에 상하이가 함락된 이후 난창(南昌)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으며 1938년 궁현의 현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장시(江西) 제4행정구 독찰전원(督察專員), 보안사령, 방공사령, 방호단장, 삼민주의 청년단 장시 지단부 주임, 장시성 정부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때에 삼민주의 청년단에서 교육을 받던 장야뤄(章亞若)와 만났으며 장야뤄는 장징궈의 쌍둥이 아들을 낳은 뒤 얼마 안가서 사망했다.

이들 두 아들은 장씨 가문의 인정을 받지 못해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

대만 외교부장을 역임한 장샤오옌(章孝嚴)과 대만 동오(東吳) 대학 총장을 지낸 장샤오츠(章孝慈)가 바로 장징궈의 서자 형제이다.

민간인 신분이었던 장샤오츠는 양안간 교류가 시작되면서 중국 내 모친의 묘소를 찾는 등 중국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1994년 베이징에서 중풍으로 쓰러져 사망하고 말았다.

러시아 여자 사이에 난 적자들인 샤오원, 샤오우, 샤오융 3형제는 정보 계통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서구적인 외모가 주는 대중의 거부감, 건강 및 복잡한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해 정치무대에서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한 반면 서자인 샤오옌은 외교부장에 이어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을 지내는 등 대만 정계의 실력자로 성장했다.

장샤오옌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장팡량 여사가 사망한 후인 2005년 3월 ‘장(蔣)씨’로 개성(改姓)절차를 마치고 이후부터는 ‘장샤오옌(蔣孝嚴)’으로 활동하였다.

章孝嚴 “이제부터 蔣孝嚴입니다” 2005/03/07 16:49

장징궈는 1944년 1월 삼민주의 청년단 중앙간부학교 교육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해 10월에 장제스가 발기한 10만 청년 종군운동에 참여하였고 청년군 총정치부 주임에 임명되었다.

1945년 당시 국민당 정부의 행정원장이던 쑹쯔원(宋子文)을 수행하여 소련과 담판, ‘중소우호 동맹조약’을 체결했다.

항일전쟁 승리 이후 동북행영(東北行營)의 외교특파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삼민주의 청년단을 이끌면서 국민당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1949년 1월 국공내전의 연이은 패전에 책임을 지고 장제스가 일시 총통 직을 사임하고 고향인 지커우로 내려 가자 장징궈 역시 부친을 따라갔다. 결국 청두(成都)에서 부친과 함께 대만으로 철수했다.

대만에서 장징궈는 국민당 대만성 당부 주임위원, 대만 국방부 총정치부 주임, 국방부 부부장, 부장, 행정원 부원장, 원장을 역임했다.

장제스 사망 3년 뒤인 1978년 5월20일 중화민국의 제 6대 총통에 취임했으며 1988년 1월13일 사망했다.

장징궈는 사망에 앞서 대만의 계엄상태를 해제하였으며 중국의 친지를 방문하는 탐친(探親)을 허용하였다. 또한 대만성 출신 리덩후이(李登輝)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등 현실주의 노선을 채택하였다.

중국은 장징궈가 사망한 다음날인 1월14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중국은 장징궈가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국가통일을 추구하였으며 양안관계의 긴장완화를 위해 일정한 노력과 행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련 인사 및 중국 내 친지들이 모두 타이베이에 조전을 보냈다.

중국은 저장성 펑화 현 시커우 진의 산시(剡溪)의 장제스 일가의 고택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2000년 8월 장샤오옌이 가족과 함께 조상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이곳을 찾기도 했다.

장징궈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본토 수복 후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가매장됐다.

장징궈의 부인 장팡량 여사는 대만독립을 강령으로 하는 민진당 집권 기간인 2004년 1월 가족 명의로 대만 정부에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대만 매장을 청원, 타이베이(台北)현 우스잔(五指山) 국군묘지에 유택도 마련되었으나 장샤오옌의 반대에 따라 매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蔣介石 총통부자 대만매장 연기 2005/10/31 09:18

2021/01/1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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