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3/05 23:31



[今天歷史-2월21일] 닉슨 방중, 傅作義, 譚嗣同

흥중회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역사적인 중국 방문을 시작했다.

이날 밤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닉슨과 만난 마오쩌둥(毛澤東)은 (사진) “미국 방면의 침략, 혹은 중국 방면의 침략, 이런 문제는 비교적 작은 문제로 큰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이유는 현재 우리들 사이에는 상대방에 타격을 가하려는 문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닉슨은 “미국과 중국은 서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 우리들이 이렇게 온 것은 새로운 정세가 모습을 드러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와 닉슨의 이 같은 말의 교환은 그들의 이력을 배경에 놓고 볼 때 지극히 극적이다.

마오는 미국이 신생 공산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의구심 때문에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전에 개입한 인물이었고 닉슨은 미국 공화당 출신으로 1950년대 매카시즘 관련 의혹을 받을 정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마오는 1893년생으로 79세였고 닉슨은 1913년생으로 59세로 20세의 나이차가 있었다.

방문 마지막 날인 1972년 2월 27일 상하이(上海)에서 발표된 ‘중미(中美)상하이 공동성명’은 1979년 1월 1일의 ‘중미 수교 공동성명’ 그리고 미국과 대만과의 무기거래의 규제 원칙을 밝힌 1982년 8월 17일의 ‘8 · 17 공동성명’과 함께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지도하는 3개 공동성명으로 취급되고 있다.

상하이 공동성명은 “양국은 사회제도가 어떠하든 간에 각국의 주권과 영토의 완정(完整)을 존중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상호평등의 입장에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며 평화공존의 원칙 아래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를 처리한다는 데 동의 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성명은 이어 “중미 양국 관계정상화는 상호 국가의 이익이 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만 문제에 관해 양국은 서로 다른 각자의 입장을 따로 따로 발표했다. 중국으로서는 ''오월동주'의 입장이었고 미국으로서는 프라그마티즘의 구현이었다.

중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주장했고 미국은 '하나의 중국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One China, not now)' 입장을 표명했다.

양자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즉 '같은 것을 추구하되 다른 것을 그대로 둔다'라는 자세에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한 것이다.

이로 인해 상하이 공동성명이 곧바로 양국 수교로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이 완전 소외된 채 최대 동맹국 미국과 최대 가상적국 중 국 간 화해를 떨떠름하며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 보았던 일본은 이해 9월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했다. 당시 일본 총리는 다나카 가쿠에이였다.

미국이 중국과 수교한 것은 닉슨이 사임(1974년 8월)하고 정권도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넘어간 뒤 한참 후인 1979년에서야 이루어졌다.

지미 카터 행정부는 결국 일본의 예를 쫓아 대만과 단교라는 중국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한국이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할 때도 이러한 선례를 따랐다.

1949년 = 국민정부의 ‘베이핑(北平 : 국민정부 당시 베이징의 이름, 당시 푸쭤이(傅作義)가 공산군의 사령부가 있는 시바이포(西柏坡)에서 마오쩌둥(毛澤東)과 만났다.

푸쭤이는 1개월 전인 1월 22일 공산군에 항복했다. 반나절 동안 회견에서 푸쭤이는 단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내가 죄를 지었다(我有罪)”.

이 말은 공산군과 싸운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반대로 공산군에 수도를 넘겨 준 자신을 책망하는 말일 수도 있다.

푸쭤이는 본거지인 서북지구로 가는 탈출로가 봉쇄되자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항복을 선택했다.

그는 장제스 하에서도 세력을 유지하였던 것처럼 마오의 공산정권 하에서도 군사적 지분을 유지함을 통해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마오는 장이 아니었다. 푸가 항복한 뒤 그의 군대는 곧바로 공중 분해식으로 해체되어 인민해방군에 편입했다.

시바이포에서 마오와 면담한 푸는 자신의 '순진한' 착오를 절감했을 것이다.

1986년 = 중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 천바오중(陳寶忠)이 미그 19기를 몰고 서해 영공을 통과하여 한국에 착륙했다.

1898년 = 변법파의 담사동(譚嗣同)이 당재상(唐才常) 등과 함께 창사(長沙)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창설했다. 담사동이 남학회를 세운 목적은 남부지역 성의 지사들을 조직히기 위해서였다.

매월 4차례 집회를 가졌는데 모인 사람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담사동은 이해 광서제(光緖帝)의 지원 아래 변법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서태후(西太后) 일파의 무술정변(戊戌政變)으로 개혁은 좌절되고 그 역시 처형됐다. 남학회 역시 이 과정에서 폐지됐다.

담사동(譚嗣同) : 1865∼1898

중국 청나라 변법(變法) 사상가. 자는 복생(復生), 호는 장비(壯飛). 후난(湖南)성 출생. 어릴 때부터 호방한 성격으로 남자다운 기상과 무술을 좋아했으며, 광범위한 독서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의 패배에 분개, 변법을 행하는 외에 다른 중국 회생의 길은 없다고 자각, 다음해 베이징(北京)에서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운동을 시작하였다.

1896년 후보지부(候補知府)로서 난징(南京)에 재직하며 양문회(楊文會)에 나가 불교를 배웠는데, 이때 그의 명저 『인학(仁學)』이 완성되었다. 『인학)』에서는 세계의 존재와변화의 근원을 <에테르(ether)>라 규정, 그 보편적 유통을 막거나 방해하는 일체의 사회·정치적 속박을 격파할 것을 강조하였다.

1897년 귀향하여 시무학당(時務學堂)·남학회(南學會)를 설립하고 일간신문 <상보(湘報)>를 발행하는 등 변법유신(變法維新)의 선진을 위해 바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광서제(光緖帝)가 변법의 조서(詔書)를 발하자 사품경군기장경(四品卿軍機章京)의 벼슬에 올라 캉유웨이 등과 함께 신정(新政)을 추진시켰으나, 변법의 실패로 무술정변 때 처형당하였다.

그는 이른바 무술육군자(戊戌六君子)의 한 사람이며,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하여 혁명파로부터도 평가를 받았다. 저서에『담사동전집』이 있다.


1895년 = 손문(孫文)이 광저우(廣州)에서 청조 타도를 목표로 한 흥중회(興中會)를 창립했다.

바로 3년 뒤 같은 날 있은 담사동의 처형은 중국에서 정치 전환의 주도권이 '메이지 유신식 개혁'에서 '한족에 의한 청조 타도와 혁명'으로 넘겨지는 계기가 됐다.

2021/02/21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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