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4/15 23:13



[今歷단상-3월24일] 금수저 장군과 흑수저 대통령

1951년 3월 말 한국전의 전선은 발발 때의 상황인 9 개월 전인 1950년 6월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밀리고 미는, 밀고 밀리는 상황을 각각 한 차례 반복한 뒤 원 위치에서 마주한 양측은 이제 앞으로의 전쟁 방향을 놓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공'은 자유진영 코트로 넘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 진영의 한국전 유엔군 총사령관이자 참전 16개국 유엔군 주축인 미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와 대통령 해리 트루먼과의 심각한 갈등이 노정되었다.

맥아더는 지역 차원의 전쟁에 머무른 한국전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글로벌 전쟁으로 전환됐다고 개념 정리하고 전쟁의 승리를 위해 인천 상륙작전의 글로벌 버전인 만주 폭격을 주장했다.

만주를 척추로 한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연결한 물적, 인적 보급로를 끊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가미가제'와 '옥쇄 저항'의 중국 버전인 '인해전술'을 분쇄하려고 만주에 대한 원폭 투하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워싱턴의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의 참전이 없을 것으로 오판하여 1950년 말 한반도 북반부에서 대패주를 초래한 맥아더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만주까지 확전하더라도 소련의 참전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트루먼은 1950년 9월 웨이크 섬에서 회담을 통해 맥아더의 정세 판단을 믿고 한만 국경선까지 북진을 허용한 참혹한 결과를 초래한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자세였다.

트루먼은 세계 전략적 차원에서 소련이 미군의 전력의 상당 부분을 병력만 많은 중공군을 총알받이 미끼로 유인하여 묶어두고 서유럽으로 진공할지 모른다는 점을 몹시 걱정했다.

전략적 가치로 보면 서유럽에 비해 한참 낮은 한반도와 중국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순망치한의 관계인 서유럽을 위험에 빠트릴수 없다는 판단에 무게를 두었다.

맥아더와 트루먼, 두 사람은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물이었다.

맥아더는 남북전쟁 참전에서 군 생활을 시작, 필리핀 총독을 지낸 아서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금수저였다,.

트루먼은 '미주리 촌놈'으로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이다. 흑수저였다.

맥아더의 경력은 화려했다. 1차대전에 참전, 인상적 전공을 세웠고 이후 승승장구 2차대전 전에 이미 육군 참모총장을 지냈다.

태평양 전쟁에서 지상군의 최고 지휘관으로 일본군의 항복문서를 받아낸 승리 주역이었고 한국전에서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밀리던 전세를 단번에 반전시킨 탁월한 군사 전략가이자 담대한 장군이었다.

반면 트루먼은 억세게 운이 좋은 인물이었다.

유군 소령 예편 뒤 양복점을 운영했으나 3년 만에 다 털어먹은 사업 실패자였으나 도리어 정계로 진출, 상원의원까지 오르는 입지전적 성공을 거두었다. 전화위복이다.

상원의원으로 국방위원장을 맡기는 했으나 그리 눈에 띨 만한 활약이 없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위 소찬'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판단, 트루먼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지만 이것은 그에게 초대박을 안겨주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뇌일혈 사망으로 부통령 취임 불과 3개월 뒤에 대통령에 오른 그는 나치 독일의 항복을 받아냈고 이어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그의 행운 잭팟은 대통령 재선 성공이었다.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모두 그의 패배를 예상했으나 그는 보기 좋게 승리했다.

두 사람의 지적 능력은 모두 탁월했다.

맥아더는 미국 연방 육군사관학교, 별칭 웨스트포인트를 수석 졸업했다.

그의 성적은 역대 수석 졸업자 중에서도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다른 한편 권위적이고 오만한 처신으로 '태평양의 시저'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양 고전의 반열에 오른 '갈리아 원정기'를 쓴 시저(카이사르)를 의식했음인지 맥아더의 문장은 그가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수사로 유명하다.

트루먼은 고교 재학 시절 부근 공공 도서관에 소장된 책을 모두 읽었다는 과장된 말이 나올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과도한 독서로 인해 눈이 나빠져 희망하던 사관학교에 가지 못했으나 주 방위군 군사학교에 입학하였고 1차대전에도 참전했다.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지만 주 방위군에서는 대령까지 지냈다.

상원에서 국방위원장을 맡은 경력이라든가 그가 1차대전 중 병과가 포병이던 점에 비추어 보면 그의 '히어로'는 나폴레옹인 듯 싶다.

지지하는 당도 다르고 이력도 대조적인 '금수저'와 '흑수저'는 1951년 3월까지는 오월동주 했다.

맥아더가 1880년생이고 트루먼이 네살 아래다. 그러나 그 불안한 공존은 마침내 파탄이 난다.

'나의 뒤에는 아무도 없다'라는 최종 결정권자는 대통령 나 자신이라는 신념과 결단의 지도자 트루먼은 맥아더의 군라이벌 조지 마셜 지지 아래 '정치적 주사위 를 던진 '태평양의 시저'를 해임했다.

'공'은 다시 코트 너머 공산 진영으로 넘어갔다.

스탈린은 상대방을 쓰러뜨릴 생각이 없는 미국과 쓰러뜨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중국이 잽 펀치를 교환하는 랠리를 벌리는 시점인 1951년 6월에 휴전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게임을 연장에 재연장으로 끌고 가도록 유도하며 미국과 중국의 틈을 벌릴 대로 벌렸고 그 불필요한 전투를 겪은 뒤 스탈린의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소련에게 최대 실리를 안기면서 말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2021/03/2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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