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9/25 00:03



[今天歷史-7월5일] 新疆 인종충돌, 北 미사일 실험

宏觀調控, 대만해협서 양안 공중전, 복제양 돌리 탄생, 영국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제도 개시, 알제리 독립, 이한열 사망

<2009년 7월5일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 구도(區都)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과 한족 간 유혈충돌이 발생했다.

5일 위구르족이 한족을 공격 시작된 사태는 이틀 뒤인 7일 한족이 위구르족을 상대로 보복 공격을 벌여 중국에서 수십 년래 최악의 유혈 인종분규로 발전했다.

당국 발표에 따르면 유혈사태로 197명이 사망했으며 1700여명이 부상했다. 사상자 다수는 한족이었다.

이후 8월까지 우루무치와 주변지역에서 위구르족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 검거 선풍이 불어 2000명 가까이 체포됐다.

사태의 배경은 공산중국 건국 이후 60년 동안 한족의 이주가 꾸준히 진행되면서 자치구 내에서조차 위구르족이 최다수 민족의 위치를 위협받게 된 점과 30년 동안의 개혁개방으로 자원의 보고인 이곳에서 경제가 발전하면서 한족과 위구르족 간 경제적 불평등 현상이 심화한 것 등이다.

2009년 당시 자치구 내에서 위구르족은 주민의 48%를 차지, 한족의 38%를 여전히 크게 앞서고 있으나 50% 이하로 과반수 선에서 밀려난 처지다.

잠재한 갈등을 폭발시킨 유혈사태 이후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는 중앙정부의 강력한 통제와 위구르족의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테러 행위가 물고 물리는 악순환을 이루고 있다.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족의 저항은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영향 때문인지 대단히 공격적이고 테러 지향적이다.

이는 라마불교를 신봉하며 정신적 최고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주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파괴적인 성향이 제지되고 있는 티베트족의 저항 양태와는 크게 다르다.

때문에 신장 위구르족 사태는 중국 중앙정부가 가장 신경을 기울이는 소수민족 문제가 되고 있다.

2006년 7월5일 새벽 북한이 장거리 탄도 미사일 대포동 미사일을 포함한 7기의 미사일을 발사 실험을 동해상에서 했다.

북한리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실험을 강행했다.

이날은 독일 월드컵 4강전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새벽에 TV중계를 시청하던 한국들을 포함, 많은 세계인이 TV 화면 자막 긴급속보를 통해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알게 됐다.

한편 발사시점은 미국시간으로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4일 오후였다. 미국은 독립기념일을 맞아 우주왕복선을 발사하는 등 축제 분위기였는데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잔치분위기가 냉각되었다.

미국의 주요 방송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사실을 속보로 보내면서 우주왕복선 발사 및 독립기념일 행사 프로그램이 뒷전으로 밀렸다.

북한의 이 같은 미사일 발사 시점 선택은 2002년 6월29일 제2 연평해전이 북한의 의도적 공격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북한은 한일 월드컵 한국과 터키 간 3,4위 결정전 시작 몇 시간여를 앞두고 서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 함정의 기습공격으로 벌어진 교전에 대해 "우발적"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공격으로 인해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홍보 효과는 만점이었다. 그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실험은 실패했다.

미사일 발사 실험의 가장 핵심적인 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은 3번째로 쏘아 올려졌는데 완전 실패한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국 정보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대포동 2호는 발사대로부터 1.5km 영공 지점에서 폭발, 곧바로 아래로 낙하했다.

일본 방위청도 당초 400km로 추정했던 대포동 2호의 비행 추정거리를 북한 영내로부터 수십 km 떨어진 지점으로 수정했다.

나머지 6발은 2발이 노동, 4발은 스커드였다.

유엔 안보리는 같은 달 1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 실시를 비난하고 탄도 미사일 계획의 중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대포동 미사일 2호의 실패로 ‘미사일 카드’가 소기의 효력을 보지 못하자 북한은 이해 10월9일 마침내 지하핵실험 실시를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보다 강화된 새로운 안보리의 제재결의안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북한과 미국의 직접 접촉이 이루어졌고 북한의 동결계좌 해제와 핵동결과 중유 등 에너지 지원과의 교환을 골자로 한 2007년 ‘2.13’ 합의가 도출됐다.

단기적 결과를 놓고 볼 때 이는 북한의 또 한번의 벼랑끝 외교의 성공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 부시 행정부가 이때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북한의 미사일 수준과 핵무기 개발 수준이 당초 예상보다 형편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미사일 발사 실험 실패와 핵실험을 통해 당시 북한의 핵프로그램이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등을 위협하지만 미국을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은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다.

또한 북한 핵프로그램의 실체가 드러나면 날수록 부시 행정부가 추진하는 미사일 방어(MD)에도 좋을 것이 없다는 고려 역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미사일 발사 실험 1주년을 이틀 앞둔 2007년 7월3일 양제츠(楊潔篪) 중국 외교부장을 만난 김정일의 모습은 한결 수척했다.

지하핵실험 실시에 따른 과도한 긴장 탓으로 짐작됐다. 2008년 8월의 뇌졸중과 2011년 12월 말 심장마비 사망 등도 자신에게 집중된 과도한 긴장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김정일은 '목숨을 건 도박 감행'으로 일정 부분 국면 돌파에는 성공했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수명을 단축한 셈이다.

북한은 김정일이 죽고 미국에서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이 힘겨운 재선 레이스에 돌입한 시기였던 2012년 4월13일 4번째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이날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는데 공교롭게도 '13일의 금요일'이었다.

북한은 그러나 이해가 가기 전인 2012년 12월12일 5번째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 실험을 단행, 이를 성공시켰다.

이 시기는 미국의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한 이후이자 남한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기 일주일 전이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을 13일 앞둔 2013년 2월 12일 북한의 3차 핵실험이 실시됐다.

2016년 1월6일에는 4차 핵실험이, 2016년 9월9일에는 5차 핵실험이 실시됐고 핵실험 이후 탄도 미사일을 포함한 각종 미사일 발사 실험이 실시됐다.

2017년 9월 초에는 6차 핵 실험이, 그해 11월 말에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 ) 급 미사일이 발사 됐다. 북한은 핵 무력이 완성

2021/07/05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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