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21/07/31 23:06



[今歷단상-7월20일] 역사의 시작은 신화 또는 조작

...중국공산당의 경우

흔히 '공청단(共靑團)'으로 부르는 공산주의 청년단은 중국공산당의 후비대(後備隊)로 불린다.

공산당 간부가 될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단체인데 그저 학교의 학생회나 보이스카웃과는 천양지차가 난다.

공청단 제1서기 중 두 사람, 즉 후야오방과 후진타오가 일당독재 국가 중국의 집권당 중국공산당의 당수이자 최고 지위 직책인 당 총서기를 역임했다. 또 현재 중국 권력 서열 2위인 총리 리커창도 공청단 제1서기 출신이다

중국 권력 핵심파벌로 공산혁명 원로의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과 경제 수도인 상하이를 연고로 한 '상하이방'과 함께 '단파‘가 꼽히는데 이 단파는 공산주의 청년단 간부 출신들을 지칭한다.

필자가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베이징에 주재할 때인 1993년~1995년에는 공청단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2년 10월에 개최된 14대(중국공산당 14차 전당대회)에서 공청단 제1서기 출신 후진타오가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1989냔 천안문 민주화 시위는 공청단 제1서기 출신 전 총서기 후야오방의 갑작스런 죽음이 불러일으킨 젊은 세대의 상실감을 촉발시켰고 천안문 광장을 메운 대학생 시위대를 쓸어내기 위한 1989년 5월20일의 계엄령 선포 여부를 놓고 벌인 정치국 상무위 회의에서 5인의 위원 중 자오쯔양 총서기와 함께 반대표를 던진 이는 후지리로 그는 공청단 서기(제1서기 다음에 여러 명의 서기를 두었다) 출신이었다.

공청단 출신들이 위축될 것으로 보았는데 3년 만에 그 제1서기 출신이 황태자의 입지를 확보하였으니 그 단체를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청단에 대해 이모저모 살피는 동안 필자로서는 한 가지 의문거리가 생겼다.

공청단 즉 공산주의 청년단이 공산당 창당보다 더 빨리 성립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젊은이들이 만든 공산주의 청년단이 공산당의 모태가 되었나하고 넘어갔다.

이집트에서 젊은 장교들이 구성한 자유장교단과 터키에서 청년 튀르크당이 집권당이 된 사실이 있었기에 더 이상 의문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창당일은 실제 열린 날과 기리는 날이 다르고 당수로 선출된 사람도 이설이 있는 등 살피면 살필수록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7월1일을 창당일로 기리고 있으나 중국공산당 스스로도 창당 회의가 열린 날은 그보다 23일 뒤인 7월23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산당의 활동에 관한 이력에 대해서는 공산당 탄생 전후부터 안광이 지배를 철하듯 주시했던 국민당은 공산당 역사가 기록한 날보다 사흘 앞선 7월20일로 보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실제 창당일과 다른 일자로 기념일로 삼은 것은 '마사지' 차원으로 볼 수 있겠다. 한해의 반의 첫날이니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창당회의에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천두슈가 당수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힘든 의문으로 남는다. 그 회의에서 실제 당수로 선출된 이는 장궈타오라는 설도 있다.

심지어 실제 창당은 훨씬 앞서 열렸으며 그때 회의를 주재한 천두슈가 당수가 되었고 문제의 2021년 7월20일(혹은 7월23일 )은 1차 전당대회(1대)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민당의 창당이 1919년에 이루어졌고 1차 전당대회(1대)는 1924년 1월에 개최됐다.

이것이 일반적인 당시 중국 정치 단체의 설립과 운영 방식이라고 본다면 공산당이 먼저 창당 되고 1921년 7월20일 또는 7월23일에 열린 회의는 1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맞는 듯하다.

이런 이설을 정설로 간주하면 그동안 문득문득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던 '후비대'가 모태가 되었다는 모순은 해결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마사지 차원이 아니라 조작이다.

이설을 제기한 이들은 창당 모임에 마오쩌둥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1대를 창당일로 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신화 만들기를 위한 조작이다.

천두슈는 죽음에 앞서 공산주의 이념을 포기하였고 장궈타오는 마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전향했다. 두 사람의 정확한 역할과 위상을 지우는데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서 많은 창업은 미화되고 조작을 통해 신화가 되었다.

중국공산당의 남상도 여기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의 출발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장려하였다.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우리의 조상은 해적이었다고 솔직하게 밝힌 것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은 출발마저 장려하였다고 꾸몄다. 한마디로 '왜곡'이다. 표현을 바꾸면 '조작'이다.

<스위프트-류야저우-버크왈드>

류동희 차이나워치 대표 2019년 7월20일

2021/07/2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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